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 불만백(不滿百)의 천년 걱정

수백년은 됨직한 도토리 나무가 가지마다 수많은 잎들을 달고 하늘을 가리고 있다. 사람이 나무라면 저 잎들만큼 많은 걱정을 달고 사는 건 아닌지?!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사는 해 백년도 못 채우면서 늘 천년의 걱정을 품네 
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주단고야장 하불병촉유)   낮은 짧고 밤이 길어 괴로우면 어찌 촛불 밝혀들고 놀지 않나 
為樂當及時 何能待來茲(위락당급시 하능대래자)   즐기는 것도 때가 있나니 어찌 멍석 깔아주길 기다리나 
愚者愛惜費 但為後世嗤(우자애석비 단위후세치)   어리석은 자 돈쓰는 것을 아깝게 여기나니 후세 웃음꺼리가 될 뿐 
仙人王子喬 難可與等期(선인왕자교 난가여등기)   왕자교는 신선이 됐다지만 그처럼 따라하기는 어려운 것을.                                       
                                                                                                       <시대․작자 미상 고시(古詩)> 

끔은 밥이 아니라 걱정을 먹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식구들 먹여 살릴 걱정, 인생 내리막길의 불안과 두려움, 앉으나 서나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그걸 잠시나마 잊기 위해 술도 마셔보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바둑판 위의 승부에 자존심을 걸어보기도 하나 모두 그 때 뿐, 혼자 있을 때면 머릿속에서 꺼진 불 다시 살아나듯 걱정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게 느껴진다. 걱정의 불씨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태우면서 생겨난 연기가 너무 메케해서 머리가 아프다. 아픈 머리 식힐 겸 가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비온 뒤 시원한 바람에 팔랑거리는 저 플라타너스 잎들도 걱정을 할까? 하겠지, 그래서 안절부절 안팎을 뒤집어 보는 게 아닌가? 별 걸 다 보고 별 걸 다 걱정한다. 걱정도 팔자라더니, 걱정을 타고난 건가? 그런가?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까지 걱정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人生)을 ‘고해(苦海)’ 즉 ‘괴로움의 바다’에 비유한다. 석가모니가 29세 때 출가한 것도 인생고해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치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 전 6세기 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 기슭 카필라 성에서 석가(釋迦)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꽤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나, 어느 날 외출하여 힘들게 밭을 가는 농부와 새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와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태어나서 고통스럽게 일하다가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슬픔을 절감했던 바,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깨치기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출가했다고 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4고8고(四苦八苦)’로 정리되는데, ‘4고(苦)’는 석가모니가 주목했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고, 8고(苦)는 석가모니의 4고에 후대의 제자들이 덧붙인 또 다른 4고를 통칭하는 바, 그 또 다른 4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애별리고(愛別離苦)’-‘원한 깊은 미운 자와 만나야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구(求)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모든 것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5취온고(五取蘊苦)’를 말한다. 

제1,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허무감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 인간의 이성과 역사의 발전 그리고 신의 권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은 나머지 인간의 실존(實存)을 확인하려 했던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들이 ‘불안(不安)’을 눈여겨본 것도 인간의 생로병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원래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은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바, 단독자(單獨者)인 인간의 실존(實存) 속에 내재한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여 초인(超人)으로 거듭나자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은 단독자(單獨者)의 유한성에서 배태된 것인 바, 특정 대상이나 일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 상태로 존재하는 공포(恐怖)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영어로 말하자면 ‘불안’은 ‘anxiety’이고 ‘공포’는 ‘fear’, ‘anxiety’의 뿌리는 ‘불편한’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anxius’이고 ‘fear’의 뿌리는 ‘놀라게 하다’ ‘무섭게 하다’라는 의미의 고대영어 ‘fǣran’인 바, ‘불안’은 스스로 느끼는 것인 반면 두려움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말한다. 

조선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상춘야흥'.
석가모니처럼 해탈하지도 못하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처럼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한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인생의 불안과 걱정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절간으로 달려가 석가모니의 말씀을 되새겨보거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던 예수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많고, 석가모니나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자신을 위해 교회나 절간 나다니는 것을 낯 간지러워하는 사람들은 아예 불안과 걱정을 마누라처럼 끌어안고 살기도 하고, 그런 강단이나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에 찌드는 것을 본다. 또 그런 저런 모든 것과 거리가 먼 어떤 사람들은 아기자기하게 사는 재미나 만들어 불안과 걱정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한자 근심 우(憂)는 머리 혈(頁) 아래 마음 심(心)과 뒤져올 치(夂)가 차례로 붙은 것으로서, 머릿속의 생각(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잘 걷지 못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그 옛날 중국인들도 그걸 잠시나마 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춘추(春秋)시대로부터 양나라 때까지의 문학작품을 모아 편수(編修)한 시문선집(詩文選集) ‘문선(文選)’에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라는 시대․작자 미상 고시(古詩)가 실린 것을 보면 꽤나 오래 전부터 머릿속의 불안과 걱정을 잊으려고 온갖 궁리를 다했던 것 같다. 이미 그 때 “세상에 태어나 백년도 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깨쳤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낮은 짧고 밤이 길어 괴로우면 촛불을 밝혀들고 놀자”는 등 낙천적이고도 적극적인 생활태도는 지금 본받아도 괜찮을 정도로 훌륭해 보이고, 선인(仙人) 왕자교(王子喬) 흉내를 내지 못할 바에야 생긴 대로 능력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살겠다는 대목에서는 순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순응(順應)이 돋보이기도 한다. 왕자교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에게 직간하다가 평민으로 폐위(廢位)됐다는 인물, 어느 날 강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 화려한 꽃 장식 배를 타고 노니는 일곱 도사(道士)를 만나 신선도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바, 신선이 이상한 술병을 가져와 술을 따르면 끊임없이 술이 흘러나왔지만 왕자교가 따르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사람과 신선은 외형상 똑같지만 속된 뼈[俗骨]와 평범한 태[凡胎]를 일신(一新)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지 못하기에 거기서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면 인생의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아직은 젊어서 시간이 있을 때, 호주머니에 돈푼이라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살자는 장삼이사의 소박한 인생철학을 가벼이 웃어넘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덮고 나면 약효 떨어졌다는 듯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걱정, 걱정, 걱정...그래선지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라는 구절이 입안에서 맴돈다. 염불처럼 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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