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 불만백(不滿百)의 천년 걱정

수백년은 됨직한 도토리 나무가 가지마다 수많은 잎들을 달고 하늘을 가리고 있다. 사람이 나무라면 저 잎들만큼 많은 걱정을 달고 사는 건 아닌지?!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   사는 해 백년도 못 채우면서 늘 천년의 걱정을 품네 
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주단고야장 하불병촉유)   낮은 짧고 밤이 길어 괴로우면 어찌 촛불 밝혀들고 놀지 않나 
為樂當及時 何能待來茲(위락당급시 하능대래자)   즐기는 것도 때가 있나니 어찌 멍석 깔아주길 기다리나 
愚者愛惜費 但為後世嗤(우자애석비 단위후세치)   어리석은 자 돈쓰는 것을 아깝게 여기나니 후세 웃음꺼리가 될 뿐 
仙人王子喬 難可與等期(선인왕자교 난가여등기)   왕자교는 신선이 됐다지만 그처럼 따라하기는 어려운 것을.                                       
                                                                                                       <시대․작자 미상 고시(古詩)> 

끔은 밥이 아니라 걱정을 먹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식구들 먹여 살릴 걱정, 인생 내리막길의 불안과 두려움, 앉으나 서나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그걸 잠시나마 잊기 위해 술도 마셔보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바둑판 위의 승부에 자존심을 걸어보기도 하나 모두 그 때 뿐, 혼자 있을 때면 머릿속에서 꺼진 불 다시 살아나듯 걱정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게 느껴진다. 걱정의 불씨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태우면서 생겨난 연기가 너무 메케해서 머리가 아프다. 아픈 머리 식힐 겸 가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비온 뒤 시원한 바람에 팔랑거리는 저 플라타너스 잎들도 걱정을 할까? 하겠지, 그래서 안절부절 안팎을 뒤집어 보는 게 아닌가? 별 걸 다 보고 별 걸 다 걱정한다. 걱정도 팔자라더니, 걱정을 타고난 건가? 그런가?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까지 걱정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人生)을 ‘고해(苦海)’ 즉 ‘괴로움의 바다’에 비유한다. 석가모니가 29세 때 출가한 것도 인생고해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치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 전 6세기 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 기슭 카필라 성에서 석가(釋迦)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꽤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나, 어느 날 외출하여 힘들게 밭을 가는 농부와 새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와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태어나서 고통스럽게 일하다가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슬픔을 절감했던 바,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깨치기 위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출가했다고 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4고8고(四苦八苦)’로 정리되는데, ‘4고(苦)’는 석가모니가 주목했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고, 8고(苦)는 석가모니의 4고에 후대의 제자들이 덧붙인 또 다른 4고를 통칭하는 바, 그 또 다른 4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애별리고(愛別離苦)’-‘원한 깊은 미운 자와 만나야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구(求)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모든 것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5취온고(五取蘊苦)’를 말한다. 

제1,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허무감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 인간의 이성과 역사의 발전 그리고 신의 권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은 나머지 인간의 실존(實存)을 확인하려 했던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들이 ‘불안(不安)’을 눈여겨본 것도 인간의 생로병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원래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은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바, 단독자(單獨者)인 인간의 실존(實存) 속에 내재한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여 초인(超人)으로 거듭나자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은 단독자(單獨者)의 유한성에서 배태된 것인 바, 특정 대상이나 일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 상태로 존재하는 공포(恐怖)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영어로 말하자면 ‘불안’은 ‘anxiety’이고 ‘공포’는 ‘fear’, ‘anxiety’의 뿌리는 ‘불편한’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anxius’이고 ‘fear’의 뿌리는 ‘놀라게 하다’ ‘무섭게 하다’라는 의미의 고대영어 ‘fǣran’인 바, ‘불안’은 스스로 느끼는 것인 반면 두려움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말한다. 

조선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 '상춘야흥'.
석가모니처럼 해탈하지도 못하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처럼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한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인생의 불안과 걱정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절간으로 달려가 석가모니의 말씀을 되새겨보거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던 예수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많고, 석가모니나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자신을 위해 교회나 절간 나다니는 것을 낯 간지러워하는 사람들은 아예 불안과 걱정을 마누라처럼 끌어안고 살기도 하고, 그런 강단이나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에 찌드는 것을 본다. 또 그런 저런 모든 것과 거리가 먼 어떤 사람들은 아기자기하게 사는 재미나 만들어 불안과 걱정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한자 근심 우(憂)는 머리 혈(頁) 아래 마음 심(心)과 뒤져올 치(夂)가 차례로 붙은 것으로서, 머릿속의 생각(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잘 걷지 못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그 옛날 중국인들도 그걸 잠시나마 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梁)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춘추(春秋)시대로부터 양나라 때까지의 문학작품을 모아 편수(編修)한 시문선집(詩文選集) ‘문선(文選)’에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라는 시대․작자 미상 고시(古詩)가 실린 것을 보면 꽤나 오래 전부터 머릿속의 불안과 걱정을 잊으려고 온갖 궁리를 다했던 것 같다. 이미 그 때 “세상에 태어나 백년도 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깨쳤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낮은 짧고 밤이 길어 괴로우면 촛불을 밝혀들고 놀자”는 등 낙천적이고도 적극적인 생활태도는 지금 본받아도 괜찮을 정도로 훌륭해 보이고, 선인(仙人) 왕자교(王子喬) 흉내를 내지 못할 바에야 생긴 대로 능력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살겠다는 대목에서는 순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순응(順應)이 돋보이기도 한다. 왕자교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에게 직간하다가 평민으로 폐위(廢位)됐다는 인물, 어느 날 강에서 뱃놀이를 하던 중 화려한 꽃 장식 배를 타고 노니는 일곱 도사(道士)를 만나 신선도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바, 신선이 이상한 술병을 가져와 술을 따르면 끊임없이 술이 흘러나왔지만 왕자교가 따르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사람과 신선은 외형상 똑같지만 속된 뼈[俗骨]와 평범한 태[凡胎]를 일신(一新)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지 못하기에 거기서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면 인생의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아직은 젊어서 시간이 있을 때, 호주머니에 돈푼이라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살자는 장삼이사의 소박한 인생철학을 가벼이 웃어넘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덮고 나면 약효 떨어졌다는 듯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걱정, 걱정, 걱정...그래선지 ‘생년불만백 상회천세우(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라는 구절이 입안에서 맴돈다. 염불처럼 외워진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 처녀 시인의 당돌한 사무사(思無邪)

롱아일랜드 동쪽 끝 오리엔트 포인트의 조약돌길. 천명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면 길거리의 작은 돌멩이들에서도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는 디킨슨의 관찰에 동의한다.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저 작은 돌은 얼마나 행복할까 
That rambles in the road alone,          길에서 혼자 노닥거리네, 
And doesn't care about careers          출세 따윈 걱정 안하고 
And exigencies never fears;               급한 일로 두려워하지도 않네;
Whose coat of elemental brown         천연의 갈색 코트는 
A passing universe put on;                 지금의 이 우주가 입혀준 것;
And independent as the sun               태양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서 
Associates or glows alone,                함께 어울리거나 혹은 홀로 빛나거나,
Fulfilling absolute decree                   순전(純全)한 천명을 이행하네 
In casual simplicity.                          스스럼없는 질박함 속에서      
                                          
                                                                         <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년-1886년> 

대 중국 최초의 시가집 ‘시경(詩經)’을 편찬했던 공자(孔子)는 “시 3백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말했었다. ‘詩經’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詩’를 파자해보면 말씀 언(言)에 절 사(寺)로 나눠지는데, ‘寺’는 발 지(止)와 손 우(又)가 합쳐진 것으로서 ‘마을’ ‘관청’을 뜻하다가 ‘모시다’라는 의미가 추가되었으나, 후한 이후 불교가 전래 된 이후 ‘절’을 뜻하게 됐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시경’이 후한 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편찬된 것임을 감안할 때 ‘詩’는 원래 ‘말로 모시다’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일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바, 시는 진실만을 말하여 모시는 것이라는 행간이 읽혀지고, 공자가 ‘사무사(思無邪)’를 말했던 것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는 사특함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또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로 옮긴 것(詩言志)”라는 말이 나오는데, 뜻 지(志)는 원래 발 지(止)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것으로서 ‘행동이나 말로 하고자 하는 것’을 뜻했던 바, 거기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공자가 환생하여 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년-1886년)의 시를 읽는다면 ‘사무사’라는 감탄을 연발할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순진무구(純眞無垢) 그 자체다. 시어로 선택한 어휘들도 흡사 길거리의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시 전편을 굴러다니며 소리를 낸다. 천진난만한 심성을 타고나지 않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이미지와 소리를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그걸 원고지에 옮겼던 디킨슨은 55세로 타계할 때까지 결혼도 거부한 채 은거하면서 시 쓰기에만 전념했던 ‘영원한 처녀’였다. 1800편에 가까운 그녀의 시 가운데 생전에 발표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의 사후 그녀의 동생이 시집을 낸 후 천재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세상과 거리를 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영원한 처녀’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건 자연이었고, 그 자연 속에서 순진무구한 영혼으로 인간의 사랑과 죽음과 이별을 노래하면서,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었다. 디킨슨이 '자유시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과 함께 19세기 미국 시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자연과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타고난 천재성으로 순진무구한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던 탓이 아닌가 한다. 디킨슨과 휘트먼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미국정서를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의 시는 청순한 처녀애가 곱게 접어놓은 손수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깔끔하다. 시를 다듬고 포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통찰과 감정을 싱싱하게 드러내면서도,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한편,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당돌함과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다. 길거리의 하찮은 돌멩이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직관도 놀랍거니와, 그 돌멩이의 이미지(coat of elemental brown)를 자신이 속한 ‘현재의 우주(A passing universe)’로까지 확장시켜 놓은 후, ‘순전한 천명(absolute decree)’을 수용하고 있음에 질박하면서도 순수한 디킨슨의 심성이 절로 느껴진다. 영어 ‘decree’의 뿌리는 ‘결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cernere’다. 타고날 때 하늘이 결정해준 운명을 말하는 바, 자연에 귀의한 한자문화권의 시인들이 ‘순응(順應)’을 삶의 지표로 삼았듯이, 디킨슨 또한 19세기 당시 미국의 전원에서 꽃피웠던 초월주의(Transendentalism)에 심취하여 ‘absolute decree’을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행복 추구의 지름길이요 자연에의 귀의(歸依) 완성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초월주의는 직관적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내재하는 신성 및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망라하는 관념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립 이후 미국 특유의 역사적․문화적 토양에서 필연적으로 자생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시의 매력은 당돌함에 있다. ‘당돌하다’는 것은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올차고 다부진 것”, 마음에 구김살이나 두려움이나 욕심이 있으면 나타나기 어려운 바, 돌멩이를 이 우주의 중심인 태양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디킨슨의 당돌함에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이 작품 속의 ‘돌멩이(the little Stone)’가 디킨슨 자신의 삶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돌멩이의 당돌함은 디킨슨 자신의 심성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을 표출한 것이라고 하겠다. 노처녀 시인의 당돌한 순수, 욕망으로 뒤범벅된 세상이 지저분하다고 느껴질 때 읽어보고 싶은 시들 중의 하나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 같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 정크아트 시작의 신선한 충격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대 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 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권혁웅; 1967년- > 


름다움이라는 게 뭔가? 한자 미(美)는 그 옛날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으로 삼았던 양 양(羊) 아래 큰 대(大)를 붙여 만든 글자로서 ‘살이 쪄서 큰 양’을 뜻했다. 신에게 바치는 희생이므로 큰 게 좋아 보였고, 좋아 보인다는 것은 만족감을 주는 바, ‘美’는 “눈으로 보기에 좋아야 하고 쾌감(만족감)을 주는 것”이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반면 영어 ‘beauty’의 뿌리는 ‘하다’ ‘수행하다’ ‘호의를 보이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인도유럽어 ‘deu-’에서 나온 라틴어 ‘bellus’로서 감각보다는 기능을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beauty’가 과일이 익었을 때 또는 여자가 성숙하여 일생 중 제일 아름다운 때 등등 ‘-한 때(전성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hōraios’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모양을 중시하는 데 반해 서양 사람들은 실속이나 기능을 중시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미의 반대 개념은 추(醜), 한자 ‘醜’는 술을 뜻하는 유(酉)에 무서운 탈바가지를 쓴 형상의 귀신 귀(鬼)가 붙은 것으로서, 무섭거나 보고 싶지 않은 꼴을 뜻하는 바, 추(醜)라는 것 또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어 ‘ugly’의 뿌리 역시 ‘무섭게 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노르웨이어 ‘ugga’로서, 한자 추(醜)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美’든 ‘beauty’든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변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미의 개념이 시대와 관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미리 확장할 수도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서 석고나 돌 등 균일한 재료를 사용해온 전통적인 조소(彫塑) 기법에 대한 반발로 폐기물 따위를 이용하여 오브제를 만들어낸 정크아트(Junk Art) 또는 스크랩아트(Scrap Art)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의 개념 확장 노력의 일환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정크 아티스트들은 전후 쏟아져 나오는 가정 및 산업 폐기물들이 기계문명 시대의 미술재료로 안성맞춤일 거라는 생각으로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개척했던 바, 1961년 뉴욕 최초로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아상블라주 예술(The Art of Assemblage)’전(展)의 기획자 겸 당시의 MoMA 큐레이터 W. 사이츠(William Seitz)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시(詩) 하면 정갈하고 아름다운 느낌부터 떠올리는 한국서 쓰레기 같은 낱말들로 시를 쓸 수 있을까? 다른 시인들은 머뭇거릴지 몰라도 고려대 국문과 출신으로 199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권혁웅(1967년- )은 그럴 수 있다고 단호히 대답할 것 같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한 해 전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려 비평(批評)과 시작(詩作)을 겸해온 권혁웅의 작품을 보면 다른 시인들이 쓰고 버린 단어 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어들만 일부러 골라 시를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도 그 중 하나다. ‘변비’ ‘신의주찹쌀순대’ ‘눌린 머리 고기’ ‘새우젓’ ‘당면’ ‘선지’ ‘빨래판’ ‘휴지를 든 손’ 등등 듣기만 해도 불유쾌한 이미지부터 떠오르는 어휘들을 시어(詩語)로 사용했다는 그 자체가 파격이고 도발로 보인다. 시의 첫 머리를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라고 시작하여 x싸는 장면을 환기시킨 후, 음식물이 목구멍과 위와 소장과 대장을 거쳐 항문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듯 사적 감정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나서, 마지막 행에 가서는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라고 독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공감을 유도하고 있음을 본다. 흡사 변기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가득 채워놓고는 관람객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상블라주’ 아티스트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권혁웅의 시를 “시의 품격과 미를 파괴하는 기괴한 개인 방언”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x싸는 장면이나 x싼 후 밑을 닦으려고 휴지를 손에 든 순간의 멈칫거림도 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34년 7월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처음 연재됐을 때 극렬한 반발을 야기하여 중단됐으나 지금에 와서는 ‘천재시인’이라고 추켜세우고 있듯이, 반세기 전 ‘정크 아트’가 태동했을 때 모두들 쓰레기라고 비웃었으나 요즘의 미술전시회 태반이 ‘아상블라주’인데서 보듯, 권혁웅의 시 또한 훗날 높이 평가받을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유보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미술이든 시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고갱이가 있는 것이지 전통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할 당위는 없는 것이고 보면, 권혁웅의 ‘시의 품격과 미를 파괴하는’ 시 또한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황금나무 아래서'(2001, 문학세계사)와  '마징가 계보학'(2005, 창비)
권혁웅은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도’ 속에서는 전통과 관습으로 굳어진 격식의 파괴와 사사로운 경험의 보편성 확인 내지는 공유 노력이 단연 돋보인다. 자칫 자기중심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시대와 사람이 변했는데도 예전의 틀에만 사로잡혀 있을 건가? 현재 내가 경험한 것과 느낀 것을 당신도 공감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도로 이해되거니와, 쓰레기 같은 어휘나 상황을 시 속에 등장시키는 것 역시 “미(美)라는 게 아름다운 것들만의 ‘아상블라주’는 아니다. 추한 것들의 ‘아상블라주’도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것 같고, 2001년 펴낸 첫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1) 이후 2010년 펴낸 정치풍자 시집 <소문들>(문학과지성사, 2010)에 이르기까지 매 편의 시가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나고 있음에 결코 ‘한 때의 불장난’은 아닌 듯싶다. 군중의 부화뇌동에 함몰된 개인의 감성을 되살려보자는 외침으로도 들린다. 선배 시인들이 꽃을 보고 놀았다면 권혁웅은 ‘마징가 Z’를 갖고 놀았고, 선배 시인들이 비 오는 호숫가에서 애인과 헤어졌다면 권혁웅은 ‘신의주찹쌀순대 2층’에서 결별할까말까 망설였을 뿐, 그의 감성이 더럽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의 시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시작에서 비유(比喩)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권혁웅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의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마징가 계보’의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의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등등은 비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비유 덩어리다. 게다가 권혁웅의 비유는 알맹이를 돋보이게 하는 겸손한 비유다. 아무렇게나 고른 싸구려 선물을 비싼 포장지로 포장하면 기대를 배반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지만 정성으로 고른 귀한 선물을 수수한 포장지로 포장하면 기대 이상의 성의가 느껴지듯이, 권혁웅이 순대 접시나 새우젓 종지에 담아놓은 것들 또한 소박한 눈으로 다시 보게 된다. 그런 겸손하고 소박한 비유 또한 자질구레한 폐기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아상블라주’와 꼭 닮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듯이 시인들의 시작 또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시를 꽃그늘 아래서 또는 비 오는 밤 창가에서만 읽는 시대는 지났다. 콘크리트 숲 속 아파트 변기에 앉아 읽기도 하고 워크래프트(Warcraft) 게임을 하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기도 한다. 지난 세기 백남준(白南準)이 버려진 텔레비전 수상기들을 모아 조잡한 그림을 보여줬을 때 모두들 “그게 예술이냐? 아이들 장난이지”하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 ‘아이들 장난’이 ‘비디오 아트(Video Art)’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로 자리를 잡았듯이, 지금의 권혁웅의 ‘x싸는 시’ 또한 먼 훗날 “시와 미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말의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경험과 감성을 어떻게 보편화하여 공감적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쓰레기 같은 어휘들로 꽃 같은 비유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비유의 옷을 입힐 시대정신 또는 알맹이는 찾아냈는지, 보편성을 확보하고 시대정신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시’로서의 항상성(恒常性)은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등등의 진지한 고민이 끊임없이 추가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우리가 물이 되어 - 수극화(水剋火)인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인가?

플러싱 리버의 물과 롱아일랜드만의 물이 만나는 플러싱 베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이렇듯 고요하고 평안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986년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姜恩喬); 1945년- > 

원 전 4,5세기 서양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많은 원자로 이뤄져 있으며, 원자가 합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지만 동양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 나타난 용마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하도(河圖)’와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 나타난 신령스런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는 ‘낙서(洛書)’에서 비롯된 음양의 이치를 풀기 위해 주역(周易)이 등장했고, 거기에 우주 만물과 모든 변화는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원소가 운행변전(運行變轉)하여 만들어진다는 오행(五行)설이 추가되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나타났던 바, 이미 은(殷)나라 유민(遺民) 기자(箕子; 기원전 1175?-1083?)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언급했다는 게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서양보다 5백년은 더 앞선다고 하겠다. 그 ‘오행설’은 전국시대 이후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의 상생설(相生說)과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의 상극설(相剋說)로 분화․발전한다. 

오행의 상극과 상생 관계도
오행에서도 특히 주목받았던 것은, 물은 생명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은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먹고 살던 농경문화권이었기에, 물이었던 것 같다. 음양오행의 출발점이었던 하도(河圖)와 낙수(落水) 둘 다 물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양오행설이 널리 퍼지기 시작할 즈음 활동했던 초나라의 노자(老子)도 그의 명저 ‘도덕경(道德經)’에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도(道)로 설명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故幾於道)”고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 물은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 일례로 냇물[川]에 머리[頁]가 붙어 만들어진 ‘순(順)’은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한자문화권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서 그런지 지금도 한자문화권의 많은 시인들이 물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고, 또 자연의 이치에 대한 순응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물을 노래하고 있음을 본다.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1968년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 강은교(姜恩喬; 1945년- )도 그 중 하나였다. 1986년에 펴낸 자신의 시선집(詩選集) <우리가 물이 되어>의 표제시로 올린 ‘우리가 물이 되어’를 보면 오행설의 수극화(水剋火)를 풀어쓴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다.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나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은 한(漢)나라 초의 학자 복생(伏生)이 물에 부여
'강은교의 시세계' 2005년 천년의 시작
했던 ‘임양(任養)의 덕(德)’을 풀어쓴 것 같고,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는 ‘화극금(火剋金)’의 치열한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는 ‘수극화(水剋火)’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 쉽게 읽혀지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애송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뭔가 모자라 보인다. 시(詩)라는 것 또한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의 철학과 전통과 관습에서 배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십분 이해하더라도, 독창적인 시상(詩想) 대신 모두 가 다 아는 개념에 비유의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시적(詩的) 감동보다는 교시적(敎示的) 깨달음이 먼저 감지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수극화(水剋火)인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인가? 오행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도 ‘우리가 물이 되어’의 감상은 달라진다. 이 작품에서는 물과 불이 상극(相剋)으로만 파악되어 물의 이미지로 화합-생성-조화-생명-만남 등이 떠올려지는 반면 불의 이미지로 갈등-소멸-투쟁-죽음-이별 등이 떠올려진다지만, 상생의 관점에서 보면 수(水)는 목(木)을 낳고 목은 불[火]을 낳는 바, 사물을 선악 내지는 대립관계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거부감마저 느껴진다. 그럼으로써 ‘상선약수’의 덕을 축소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행설에서 비롯된 물의 이미지를 제쳐놓고 읽기도 뭐하고, 그걸 머릿속에 떠올려놓고 읽자니 멈칫거려지는 부분이 많은 바, 부담없이 매끄럽게 읽기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시이지만 곰곰이 따져 읽을 때는 꽤나 난해한 감상을 요구하는 시들 중의 하나다.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춘망사(春望詞) - 그리움, 그 끊을 수 없는 춘수(春愁)

매사추세츠 보스턴 캠브릿지와 알스턴을 가로지르는 강가 공원의 꽃그늘 아래서 한 여성이 책을 읽고 있다. 사는 게 권태롭고 불안하고 외로울 때 그리움이 싹트는 것은 아닌지?!

春望詞(춘망사) 


花開不同賞 (화개부동상) 꽃이 피어도 함께 감상하지 못하고 
花落不同悲 (화락부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欲問相思處 (욕문상사처) 그리운 임(상사) 계신 곳 묻고파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꽃은 피고 꽃은 지는데 

攬草結同心 (남초결동심) 풀 뜯어 한 마음으로 엮어 
將以遺知音 (장이유지음) 임(지음)에게 보내려다가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봄의 시름으로 끊고 마는데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봄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바람에 꽃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아름다운 만날 기약 아직 아득한데 
不結同心人 (부결동심인) 사람의 마음은 함께 엮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헛되이 풀만 같은 마음으로 엮네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꽃으로 가득 찬 가지 어찌 감당하리오 
翻作兩相思 (번작량상사)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아침에 거울을 보면 흐르는 옥 젓가락 같은 두 줄기 눈물 
春風知不知 (춘풍지부지)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설도(薛濤); 768-832> 

‘그리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랑하거나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라고 풀이돼 있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대상이 없는 ‘막연한 그리움’도 수두룩하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마음고생 몸 고생 없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하며, 날이 갈수록 왠지 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옛날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이란 현재의 허전함이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 오늘의 삶이 외롭고 쓸쓸할수록 그리움은 커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세상의 단맛 쓴맛 떫은맛을 어느 정도 맛본 사람들은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시 속에서의 그리움 또한 대부분 사랑하는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나타나지만 그게 꼭 사랑의 파트너를 향한 그리움만만은 아니다. 김소월(金素月)의 그리움에서 보듯, 되레 그걸 빌려 외롭고 쓸쓸한 자신을 달래고자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굳이 실존(實存)철학자들의 말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 자체가 권태(倦怠)와 불안(不安)과 고독(孤獨)으로 뒤범벅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바, 그 권태와 불안과 고독 속에서의 고뇌와 고통이 커지는 것과 비례하여 막연한 그리움도 커지고, 그 막연한 그리움이 투사(投射)되어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리움’ 즉 ‘상사(想思)’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명나라 때 그려진 설도 초상화와 설도 시집(인민문학출판사  1983)
중국 당(唐)나라 때 장안(長安)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四川省)의 서도(成都)로 이주한 후에 기생이 됐던 여자 설도((薛濤; 768-832) 또한 상사(相思)에 걸렸던 것 같다. 그의 시 ‘春望詞(춘망사)’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설도가 성도 교외 완화계(浣花溪)에서 은거할 때 만난 시인 원진(元稹)과의 정분을 잊지 못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시로 읊은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꼭 그런 눈으로만 볼 건 아닌 듯싶다. 당시 서천(西川) 절도사로 부임했던 위고(韋皐)가 설도를 기적(妓籍)에서 빼내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녀의 시문(詩文)이 뛰어났다고는 하나, 기생 출신으로서 동천(東川) 감찰어사로 내려왔던 원진과 맺어지기를 기대했을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거니와, 설사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나눴다고 하더라도 백거이(白居易)와 유우석(劉禹錫) 등 당대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설도전(薛濤箋)으로 불리는 종이까지 만들어 쓸 정도로 똑똑했던 여자가 바람둥이로 소문 난 원진과의 사랑을 못 잊어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바, 위 작품 또한 인생의 권태와 불안과 고독에서 배태된 막연한 그리움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제2수의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의 ‘지음(知音)’과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의 ‘춘수(春愁)’도 그 점을 잘 말해준다. ‘지음’은 춘추시대 진(晉)의 대부로서 거문고를 잘 탔던 백아(伯牙)가 자신의 음률을 가장 잘 이해했던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렸다는 데서 나온 고사 ‘백아절현(伯牙絶絃)’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설도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그리워했던 바, 그게 원진이었든 또 다른 그 누구였든 아니면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든 시상의 전개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런 그리움의 맺음을 ‘춘수’로 끊었다는 것은 삶이 지속되는 한 매해 화창한 봄날이면 천형처럼 겪는 ‘봄앓이’가 더 컸다는 말이 아닌가?! 

어쩌면 삶 자체가 그리움 맺기인지도 모른다. 현재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 안에 그녀가 종이 뜰 때 물을 길었다는 유적 설도정(薛濤井)과 함께 설도 기념관과 석상이 세워져 설도를 기리고 있다고 하나 모두 다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봄날 꽃그늘 아래서 춘망사(春望詞) 한 수 읊조려보면서 설도의 그리움의 깊이를 가늠해보는 것도 삶의 권태와 불안과 고독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상린관계(相隣關係) 속의 두려움과 설렘

담을 넘어 나온 벚꽃나무 가지가 꽃을 활짝 피웠다.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 데 대한 기쁨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두려움도 엿보인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작가세계’ 봄호, 정끝별; 1964년- > 

률 규정에 의해 소유권이 제한되는 경우의 하나로서 ‘상린관계(相隣關係)’라는 게 있다. 서로 인접한 토지 소유자가 각자의 소유권을 억제하는 것에 따라 양자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분쟁을 해결하여 이웃간 토지 이용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상린관계에 의한 소유권 제한은 법률상 당연히 인정되는 바, 미리 약속해 둘 필요가 없는 점에서 문서에 의해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지역권(地役權) 등과는 다르다. 상린관계에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수지(樹枝)·목근(木根)의 제거권이다. 이웃 토지의 나뭇가지가 경계를 넘어 자기 토지로 들어왔다고 해서 이를 함부로 절단할 수는 없고, 그 소유자에 대하여 가지의 제거를 청구할 수 있는 바(민법 제240조 1항), 소유자가 청구에 의하지 아니하면 청구자가 가지를 제거할 수 있으며(2항), 수목의 뿌리가 경계를 넘은 때에는 임의로 제거할 수 있다(3항). 

나뭇가지에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있어서 관습과 법을 안다면 담을 함부로 넘을 수 있을까? 상린관계에 있는 담 저편의 토지 소유자가 제거를 요구하면 어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인 담을 넘어보고 싶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 반 설렘 반, 시인으로 타고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름 또한 매우 시적인 시인 정끝별도 ‘가지가 담을 넘을 때’를 쓸 때 그런 심정을 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는 것을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의 혼연일체 성원(?)에 힘입어서, 그리고 또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와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에 억지로 밀리다시피, 담은 넘은 가지에게 있어서 담은 도박이자 도반이었다고 말한 정끝별의 관찰에서 그런 심정이 진하게 읽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읽을 때의 감정의 진동 폭이 들쭉날쭉하기는커녕 잔잔하면서도 섬세하게 조율되는 것은 일부러 관찰자의 시점을 선택한 시인의 의도가 성공을 거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 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대학 강단에까지 서고 있는 정끝별의 시작(詩作)이 감성의 분출보다는 섬세한 관찰과 분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로도 보인다. ‘-을 것이다’라는 제3자의 추측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선한 느낌까지 준다. 

정끝별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  2005년 민음사
그러나 ‘가지가 담을 넘는 것’이 정끝별의 독창(獨創)은 아니다. 이미 기독교 구약성서 창세기에 49장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Joseph is a fruitful bough, even a fruitful bough by a well; whose branches run over the wall)’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사랑받으면서 넓은 식견으로 순결하게 살았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나 그런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다. 정끝별이 그 구절을 읽어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지가 담을 넘는다’는 표현이 독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바, 그게 주옥같은 이 작품의 티라면 티일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금단의 담’으로 등장했던 담이 마지막 연에 가서는 ‘도박’이자 ‘도반’으로 변하는 것도 독자를 머뭇거리게 한다. ‘도박’이야 그렇다고 치고, ‘도반’을 ‘도를 같이 닦는 벗’이라는 의미의 ‘道伴’으로 이해한다면 ‘담을 넘는’ 행위가 도를 깨우치는 범위로 한정되고 ‘칼자국’을 뜻하는 ‘刀瘢’으로 이해한다면 ‘신명 나는 일’이 아닌 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의 극적 효과가 무한 확대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시적 모호성(模糊性, ambiguity)을 증폭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자어를 병기하지 않은 것이라면 할말이 없지만. 

어쨌거나 ‘가지가 담을 넘을 때’는 상린관계의 당사자이면서도 관찰자인 듯한 입장에 서서 짐짓 태연하고 매끄러운 감정이입(感情移入)을 부추김으로써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자칫하면 튀기 쉽상인 시 속 감성의 흐름을 차분하고 섬세한 터치로 조율하는 것도 돋보이고. 정끝별의 시가 나름대로의 경지에 올랐음을 공표하는 것 같다.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음울한 현실 속의 노란 열망

함형수가 시작 활동을 했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 거리 풍경.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 함형수(咸亨洙); 1914∼1946> 

합성(光合成)으로 생장 에너지를 생산하는 식물은 빛을 향해 굽는 굴광성(屈光性)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해바라기 꽃이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해바라기는 국화과(菊花科)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서, 줄기가 최대 4~8m까지 자라고 무려 1,000여개의 씨를 맺는 꽃 크기도 매우 커서 지름이 60cm를 넘기도 하는 바, 그 만큼 많은 햇빛을 필요로 하기에 늘 해를 향한다. ‘sunflower’, ‘해바라기’, ‘향일화(向日花)’, ‘향일규(向日葵)’ 등등의 이름이 붙은 것도 그와 무관치 않거니와 관련 전설도 많다. 예쁜 목소리와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물의 요정 크리티가 황금마차를 타고 다니는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반한 나머지 날마다 아폴론을 바라보면서 한번만이라도 눈길을 주기를 고대했지만, 아폴론은 매번 그대로 지나쳤고, 한 자리에 서서 아폴론만 바라보던 크리티의 다리는 뿌리가 되어 땅 속 깊숙이 박히고 몸은 녹색 줄기가 되고 귀여운 얼굴은 아폴론처럼 둥글고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고흐의 해바라기(188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해바라기가 유럽에 전해진 건 16세기 초, 당시 중남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던 스페인 탐험가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멕시코의 아즈테크족과 남아메리카 잉카족이 해바라기 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줄기와 뿌리를 약으로 쓰는 것을 보고 씨를 유럽으로 들여왔던 바, 기름 생산 등을 위한 경제작물로 각광을 받다가 차츰 관상용으로도 널리 퍼지게 됐다. 특히 단식 기간 중 해바라기 기름 식용이나 사용이 허용됐던 러시아 정교회 지역에서는 재배면적이 급격히 확산되어 우크라이나에선 국화(國花)로까지 선정됐고, 기독교도들은 일편단심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를 오로지 진리의 빛을 추구하는 영성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19세기 탐미주의자들은 해바라기의 강렬한 색조에 주목하여 그들의 상징물로 삼기도 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가 저 유명한 해바라기 시리즈를 작품화한 것도 그 즈음이었는데, 정신질환으로 자살을 감행하기 전 10년 동안 무려 9백여 점의 작품과 1100여 점의 습작을 미친 듯이 그렸던 고흐는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들의 색조가 자신의 우울증에 비례하여 어둡게 변해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1936년 서정주(徐廷柱)의 주도로 창간된 문예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에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을 발표했던 시인 함형수(咸亨洙; 1914∼1946)는 고흐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고흐에 관해 얼마나 알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관한 상세한 자료나 증언은 없으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시작에 매달리다가 세상을 뜬 그의 삶이 고흐의 삶과 닮았고, 그의 대표작으로 남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의 부제가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고 붙은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눈도 비슷하다. 가난과 고독과 질병 속에서 정열과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노란 해바라기에 집착했던 고흐나 자신의 무덤에 ‘차거운 비(碑)ㅅ돌’ 대신 ‘태양같이 화려하고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했던 함형수에게 있어서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만 볼 뿐 정작 가까이 다가가거나 품지는 못하는 해 바라기”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최근 들어 함형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1914년 한반도 맨 꼭대기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정신착란증으로 고생하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북한서 사망한 함형수가 한국 시단(詩壇)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1935년 동아일보에 ‘마음의 단편’을 발표하고 1936년 서정주 등과 함께 동인지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죽을 때까지 남긴 작품이 17편에 불과하고 그 나마 습작 수준이어서 나름대로의 시세계(詩世界)를 구축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품들 또한 뛰어난 시재(詩才)를 꽃 피우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더 많이 읽혀지고 있음을 본다. 대표작 ‘해바라기의 비명(碑銘)’도 미완성의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는 해바라기와 보리의 파종 시기가 달라 노란 해바라기 사이로 보리밭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까지 동시에 목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토착 정서의 배반을 시적 자유로 너그러이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적 자유의 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 이미지 조합을 위해 시 이해의 밑바탕인 토착 정서를 배반했다는 데서 오는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는 바, 왠지 잔손질을 끝내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이 읽혀진다. 

함형수가 시작(詩作)에 눈 떴던 1930년대는 한반도에 서구 모더니즘의 물결이 막 밀려오던 시절, 모더니즘에 심취한 시인들은 감상적인 언어의 구사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한 정확한 묘사와 공감각적 이미지 환기를 중시했던 바, 함형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에서도 이미지의 배합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차거운 비(碑)ㅅ돌’의 촉각(觸覺), ‘노오란 해바라기’의 시각(視覺),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의 청각(聽覺) 등을 자극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함형수의 뛰어난 테크닉은 또 다른 작품 ‘교상(橋上)의 소녀(少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못견디듯미풍(微風)에하느적거리든실버들가지. 
달콤한초조(焦燥)에떨며소녀(少女)는분홍(粉紅)빛양산(陽傘)을쉴새없이돌렸다 
그러나다리아래의흐르는물이그급(急)한소년(少年)의걸음보다도쉬지않는것을소녀(少女)는몰랐다           
 <‘교상(橋上)의 소녀(少女)’ 전문> 

‘미풍에 하느적거리는 실버들 가지’ ‘분홍빛 양산’ ‘다리 아래 흐르는 물’ 등 감각적 이미지의 나열로 구체적인 장면을 실감나게 연출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해바라기의 비명(碑銘)’과 꼭 닮았다. 함형수가 좀 더 오래 생존하여 시작(詩作)을 계속했다면 그런 이미지 환기 기법이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 과작(寡作)에도 불구하고 함형수의 시들이 주목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일 터, 그가 미완(未完)의 대기(大器)로 남은 게 아쉽다.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귀거래사(歸去來辭) - ‘마음고생’ 많은 사람의 속세 고별사

롱아일랜드 북쪽 철망 사이로 바라다보이는 별장촌 풍경. 예나 지금이나 현실의 삶이 정신을 옭아매고 있다고 느껴질 때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라라.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리라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무성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지만 어찌 한탄하고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랴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이미 지나간 일은 말해봤자 소용없는 것을 깨달았으매 앞으로 다가오는 일은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실로 잘못 들어선 길이 그리 멀어지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 잡으리라 각성한다 

舟遙遙以輕颺 風飄飄而吹衣(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표표히 불어 옷자락을 날리네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미)
 길 지나는 사람에게 앞으로 갈 길을 묻노라니 희미한 새벽빛이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載欣載奔(내첨형우 재흔재분)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집, 기쁜 마음 분주한 발걸음 

僮僕歡迎 稚子候門(동복환영 치자후문) 
반가이 맞이하는 어린 하인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어린 아들 

三徑就荒 松菊猶存(삼경취황 송국유존)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 우거졌어도 소나무와 국화는 예전 그대로 남아 있네 

携幼入室 有酒盈樽(휴유입실 유주영준)
어린 아들 손잡고 실내로 들어서니 술이 술통에 가득 차 있네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술병과 술잔 끌어당겨 자작하면서 뜰의 나뭇가지 지긋이 바라보니 미소가 머금어지는구나 

倚南窗以寄傲 審容膝之易安(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남쪽 창에 제멋대로 기대니 몸이 편안해지는 자세를 찾게 되네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정취가 있고 문은 있으되 늘 닫혀 있네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책부노이류게 시교수이하관)
지팡이 짚고 다니다가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 들어 먼 곳 바라보네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구름은 무심하게 산꼭대기서 피어오르고 날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오네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데 우뚝 선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어 보네 ............(이하 생략) 

                                                                          <도잠(陶潛); 365년-427년>

음이 육신을 움직이나? 육신이 마음을 움직이나? 대부분 마음 가는 대로 육신을 움직이고 싶어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 험난하고 치사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선 육신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좇는 경우가 더 많다. 그걸 ‘형역’(形役)이라고 한다. ‘걷다’라는 의미의 조금 걸을 척(彳)에 몽둥이 수(殳)가 붙은 ‘役’의 원래 의미는 ‘부리다’ ‘시키다’, ‘형역’은 부리는 대로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뜻하는데, ‘심위형역(心爲形役)’의 준말로서, 부림을 당하는 대로 마음의 모양새를 만드는 것 즉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삼는다는 의미다. 시쳇말로 말하자면 ‘마음고생’이다. 

부모에게 재산 물려받은 것 없고 오락가락하는 권세 끄나풀 하나 못 쥐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선 ‘마음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이름은 잠(潛)이지만 연명(淵明)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년-427년)도 먹고 살기 위해 꽤나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동진 초기 군벌 도간(陶侃)의 증손이라고는 하나 몰락한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았고, 시문이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리로만 전전하면서 중앙 정계엔 진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존심만 강해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내몽고출판사에서 펴낸 '도연명집'(왼쪽)과 후대에 그려진 도연명 초상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나온 것도 도연명의 마음고생 탓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도연명이 41세 때 팽택(彭澤) 현령 자리를 얻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던 중 의관을 정제하고 군(郡)의 독우(督郵; 순찰관)을 맞이하는 게 싫어서 “그까짓 오두미(五斗米; 급여)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고 사임한 후 ‘귀거래사’를 썼다는 이야기가 송서(宋書) 은일전(隱逸傳)에 전한다. 이후 심양의 전원에 파묻혀 은일(隱逸)의 선비로 처세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했으나 만년이 편안하지도 않았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불타 일가를 거느리고 심양 남쪽 근교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죽을 때까지 빈한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흔히 지금도 정부 고위관리들이 자리를 물러나면서 이임사 대신 ‘귀거래사’를 읊조리지만 도연명이 은둔이 좋아서 은둔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지레짐작이라는 핀잔을 들어 마땅하다. 까놓고 말하자면 대부분의 고위관리들이 정권이 바뀌거나 임면권자가 사표를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듯이, 도연명 또한 ‘심위형역(心爲形役)’을 견디다 못해 전원으로 돌아갔다는 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걸 도외시하면 ‘귀거래사’의 감동 또한 반감되고 만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원이 무성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田園將蕪胡不歸)”라는 구절을 들어 도연명이 농사나 지어먹고 살기 위해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 뒷부분에 나오는 “농부가 내게 봄이 왔음을 알리니(農人告余以春及)”라는 대목에서 보듯 도연명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 바, ‘심위형역’이 싫어 몸과 마음을 전원에 파묻은 채 자연(自然)을 즐긴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결어(結語)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연을 ‘이제 다 끝났구나(已矣乎)’라는 탄식으로 시작하여 ‘변하는 대로 그럭저럭 살다가 죽으면 그만(聊乘化以歸盡)/ 대저 천명이라는 것을 즐겼거늘 다시 어찌 의심하리(樂夫天命復奚疑)’로 끝낸 것도 그 같은 심정을 잘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 ‘심위형역’을 끝내고 자연으로 귀의했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위에서 ‘이하생략’된 나머지 부분을 써 둔다. 

歸去來兮(귀거래혜) 
請息交以絶遊(청식교이절유)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或命巾車(혹명건차) 或棹孤舟(혹도고주)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已矣乎(이의호)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Song of Myself 제1편 - ‘너’를 위한 ‘나 자신의 예찬’

저 싱싱한 풀잎 속의 원자들이 내 몸 속에도 있다면? 내가 곧 자연이라는 휘트먼의 통찰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합일이 느껴진다.

Song of Myself  I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나는 나 자신을 축하한다, 또 노래한다
내가 그러하듯 당신도 그러하겠지
내게 있는 모든 원자 당신도 있을  테니까.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나는 빈둥거리면서 나의 영혼을 불러내지                                                                          
여름풀의 뾰쪽한 끝을 편하게 바라볼 때도 몸을 구부리고 빈둥거리지 

My tongue, every atom of my blood, form'd from this soil,  
              this air,                                                               
Born here of parents born here from parents the same, and   
             their parents the same,                                        
I, now thirty-seven years old in perfect health begin, 
Hoping to cease not till death.                                        
나의 혀, 내 피 속의 모든 원자, 이 흙과  이 공기에서 생겨나왔지
여기 부모에게 태어났고 부모도 마찬가지, 부모의 부모도 마찬가지
나, 이제 37세, 더할 나위 없는 건강이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기를 바라네

Creeds and schools in abeyance,                                   
Retiring back a while sufficed at what they are, but never  
             forgotten,                                                         
I harbor for good or bad, I permit to speak at every hazard, 
Nature without check with original energy.                        
신념과 배움은 잠시 미정인 상태
그럭저럭 충분하다고 여겨 잠시 접어두지만  결코 까먹지는 않아
나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품어주리, 모든  위험을 말해도 괜찮을 거야
원기 거스르지 않고 타고난 대로 살리라

                                                                <1855년 ‘Leaves of Grass’, Walt Whitman; 1819년–1892년> 

스가 범람해서 그런지 ‘성(性)’하면 ‘sex’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원래 ‘性’은 섹스보다도 훨씬 더 상위의 개념이었다. 한자 ‘性’은 마음 심(心)과 날 생(生)이 합쳐진 것으로서 태어날 때의 마음 즉 개개인의 타고난 특질을 말한다.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심어준다고 해서 ‘천성(天性)’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자연과의 합일을 역설했던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는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이를 길게 이어주면 걱정할 것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이를 자르면 슬퍼할 것(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이라고 말하면서 천성대로 살라고 충고했었다. 천성대로 사는 게 가장 바르고 진실하다는 것이었다. 천성은 인간 개개인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자연계 전체로 확대된다. 아니 자연(自然) 그 자체다. ‘자연’의 본래 의미 또한 풀이나 물 따위가 아니라 ‘천성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19세기 미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가장 미국적인 시인’이자 ‘자유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야말로 천성(天性)의 시인이었다. 1819년 지금은 도시화되었지만 당시엔 숲과 밭밖에 없던 뉴욕 롱아일랜드의 헌팅턴 웨스트 힐즈에서 가난한 농부의 9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휘트먼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11세 때 학교를 때려치우고 돈을 벌어야할 정도로 불우했으나, 변호사 사무실 심부름꾼과 인쇄 견습공 등으로 전전하면서도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기존의 방법론이나 틀을 깨는 자유분방함을 보였다. 성경의 운율로 미국 특유의 서사시를 쓰고자 했던 그가 주인공으로 특출한 영웅을 내세웠던 종전의 서사시들과는 달리 보통사람들을 내세웠던 것도 그런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휘트먼의 자유분방한 시 쓰기는 미국 자유시의 토대가 됐고 미국적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게 후세의 평가다. 

시집 '풀잎'에 실린 새뮤얼 할리어의 휘트먼 초상(왼쪽)과 만년의 휘트먼.
1855년에 출간된 휘트먼의 첫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은 그 자체로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이전 시인들의 작품들이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명상에서 나온 감흥을 주로 읊은 것들이었던 반면 휘트먼의 ‘풀잎’에 실린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을 노래했다. 첫 시집 출판 때부터 미국 초월주의의 선구자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도움과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가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에 심취해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나, 휘트먼이 전원(田園) 출신이고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자유분방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시풍(詩風)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풀잎’의 첫머리에 실린 총 52편의 연작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도 당시로서는 뻔뻔하고 시건방지게 여겨지던 자기 자신의 예찬인데다가 곳곳에 외설적 표현들까지 섞여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 속의 인간을 찬미한 수작”이라는 등 하나 둘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가장 미국적인 시’라는 칭찬을 듣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축하하고 노래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시건방져 보이지만 “내가 나 자신의 천성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본주의의 출발점”이라는 휘트먼의 통찰이 그 시건방짐을 압도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는 바, 두 번째 행 “내가 짐짓 그러하는 것을 당신도 짐짓 그러하겠지(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에서 보듯 ‘나’와 ‘너’ 공존을 추구하고 있거니와, 결국 ‘나 자신의 노래’는 ‘너를 위한 노래’가 된다. 휘트먼의 시가 미국적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후세의 평가도 거기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시에서 또 주목해야할 단어는 세 번째 행의 ‘원자(atom)’다. ‘atom’은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이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미 기원전 5세기 경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사용한 바 있지만,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사용되는 원자의 개념은 영국의 화학자․물리학자 존 돌턴(John Dalton)이 1803년의 한 연설을 통해 발표한 원자가설(原子假說)에서 출발한다. 휘트먼이 그 ‘atom’을 시어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야말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의 혀, 내 피 속의 모든 원자가 이 흙과 공기에서 형성됐다(My tongue, every atom of my blood, form'd from this soil, this air)’는 과학적 관찰이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연계의 원자가 ‘나’나 ‘당신’에게도 있고 또 그게 나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 등등으로부터 한없이 전수돼온 것이라는 휘트먼의 통찰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합일(合一)’이 아닌가?! 맨 마지막 행을 ‘Nature’로 시작한 것도 ‘나’와 ‘당신’→‘부모’→‘자연’이 ‘atom’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휘트먼에게 있어서 ‘나’는 곧 ‘자연’이었던 바,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품는 ‘나’의 행위까지 자연의 한 현상으로 파악한 ‘Song of Myself’는 ‘Song of Yourself’이고 또 ‘Song of Nature’였던 것이다.

2013년 5월 20일 월요일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서글픈 시대의 서글픈 이립(而立)

시위가 끝난 뒤의 현장. 온갖 구호는 사라지고 쓰레기만 남았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인 최영미의 절규가 가슴에 와닿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94년 창착과비평사, 최영미; 1961년- >


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인간(人間)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는 관계(關係)의 묶음인 바, ‘오불관언’은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적인 삶을 추구하고자할 때 튀어나오는 말들 중의 하나다. 한자 빗장 관(關)은 영역과 영역의 경계인 문(門) 아래서 실[絲]을 북[丱]에 꿰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서, 영역과 영역이나 이것과 저것의 연결과 닫힘 또는 얽힘을 뜻한다. 사회생활을 관계맺음의 연속으로 파악하여 관계를 유난히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 사람들은 ‘매우 끈끈하여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톄꽌시(鐵關係)’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인과율(因果律)을 주요 교리로 삼는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인(因)인 동시에 과(果)로 파악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바, ‘나’ 또한 인과에 따라 변하고 또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걸 속세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인간은 삶은 관계 속에 있다’가 된다. 

인간사회에서 ‘자립(自立)’한다는 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독자적으로 관계 맺기와 관계 끊기에 나선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실제로 한자 설 립(立)은 다 큰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양의 큰 대(大)가 땅 위[一]에 서 있는 형상으로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선다는 의미다. 그게 쉽지는 않다. 한자문화권의 성현으로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공자(孔子) 또한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뒀고, 서른에 섰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고 고백했었다. 태어나서 글을 깨우기까지 15년, 배워서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정립하기까지 또 15년, 평균수명이 60세에 훨씬 못 미쳤던 당시 30년이라면 꽤나 길고 긴 세월이었던 바, 이 세상에서 홀로 서기가 쉽지 않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석가가 서른 살이 다 되어 출가하고, 서양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뿌리박혀 있는 예수 또한 비로소 서른이 되어서야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싶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1961년- )가 1994년에 발표한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또한 관계 속에서의 고뇌로 읽혀진다. 그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시 속의 몇몇 단어들에 얽매여 “대학시절 치기로 운동권을 기웃거렸던 시인이 30세가 되어 홀로 서기를 시도한 것”이라느니 “운동권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운동권으로부터 협박전화도 받았다더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신포도를 보면 침을 흘리는 따위의 습관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을 뿐,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의 고뇌를 읊은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관계 맺음이 알파요 오메가인 이 세상에서 ‘상관(相關)’과 ‘오불관언(吾不關焉)’ 사이에 홀로 선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서글픈 것인지를 모르면 그 시에 대한 감상은 수박 겉핥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사전적으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 즐기는 일”이라고 정의되는 ‘잔치’는 관계 맺음의 대표적 산물이거니와, 그런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고집한다는 건 소위 왕따의 지름길인 바,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토로는 ‘상관없다’ ‘상관있다’를 따지는 게 아니라 관계에 얽매여 ‘분위기’에 휩쓸리던 ‘나’의 자각과 자기 독립 선언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관계 속에서는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고쳐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가 잔치가 끝나고 홀로 남았을 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토로하는 모습에서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간파했던 ‘군중 속의 고독’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고독하다. ‘상관’과 ‘오불관언’의 사이 또한 고독이라는 실로 연결돼 있는 지도 모른다. 외롭지 않으려고 운동권 ‘동지’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더 큰 외로움을 느끼고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를 써서 자신을 이해하는 독자를 구하고 나섰지만, 그 독자들마저 ‘운동권과의 결별’이니 ‘인간으로서의 성숙’ 등등만을 읽었을 때, 최영미가 느낀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 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다. 외롭지 않으려고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동떨어져갈 때 도리어 더 큰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인간의 딜레마, 인간은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차 절감한다. 

2013년 5월 17일 금요일

서시(序詩) - 순수한 영혼의 순수한 부끄러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세상이 혼탁해져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그의 부끄러움이 그리워진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시’, 尹東柱; 1917년-1945년>


찍이 맹자(孟子)는 군자(君子)의 삼락(三樂)을 말하면서 두 번째 즐거움으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을 꼽았었다. 그런데 왜 하늘에 부끄러운 것은 ‘괴(愧)’이고 사람에 부끄러운 것은 ‘작(怍)’인가? 둘 다 마음 심(心)이 붙어 있으므로 부끄러움이라는 게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마음 심(心)에 령(靈)의 일종으로서 무시무시한 탈을 쓴 형상의 귀신 귀(鬼)가 붙은 ‘괴(愧)’는 영혼으로 느껴 오래오래 남는 부끄러움인 반면, 마음 심(心)에 ‘잠깐’ 또는 ‘잠시’의 의미로도 쓰이는 잠깐 사(乍)가 붙은 부끄러워할 작(怍)은 인간사회의 특정한 상황 또는 일로 인해 느끼는 한시적 부끄러움이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수신(修身)을 사회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맹자이기에 ‘괴(愧)나 직(怍)을 느끼지 않는 것을 군자의 두 번째 즐거움으로 꼽았음직도 하다. 

학창시절의 윤동주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오로지 인간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인들이 부끄러움에 주목하는 것도 그게 인간의 감정 중 가장 순수하고 겸손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또 시라는 게 인간의 순수 감정을 천착하는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인 자신의 순수함과 자신이 그려낼 수 있는 부끄러움의 깊이가 정비례하기에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순수한 자기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일제시대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1945년)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기 직전인 1941년11월 20일 경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인생진로를 고민하면서 쓴 것으로 추측되는 ‘서시(序詩)’가 그렇다. 그 시가 꽃잎 지는 것만 봐도 눈물 흘리는 여고생에서부터 인생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들에게까지 두루 읽히면서 감동을 주는 건 그 시절 윤동주의 영혼이 그 만큼 순수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거니와 그가 일본 유학 중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되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중 옥사한 것도 그런 순수한 성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서시’라는 제목은 윤동주 스스로 붙인 게 아니라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서문으로 이뤄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할 때 유고 시집에 수록된 작품 전체의 내용을 개괄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지만, 그게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해온 윤동주 시인의 삶을 개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을 쓸 당시 윤동주 스스로 붙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야 물론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렇다 치지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고백이 너무 섬세하여 가슴이 뭉클해지거니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하는 대목에선 순수한 영혼에게서만 감지되는 숭고함마저 진하게 묻어난다. 

기실 윤동주처럼 철저하게 자아를 성찰한 시인도 드문 것 같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자화상(自畵像)’도 그 점을 잘 뒷받침해준다. 다음은 ‘자화상’ 전문.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 속에 있는 ‘한 사나이’가 윤동주 자신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자신이 미워지고 가엾어져 도로 가서 들여다보는 행위야말로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반복을 의미하는 바, 그런 자신을 그리워하는 윤동주이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영혼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랄 때의 부끄러움이야말로 참으로 순수한 영혼의 순수한 부끄러움일 터, 시는 글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것임을 재차 실감한다.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 시공(時空) 속 아름다운 인생

잘 다듬어진 꽃들이 활짝 핀 봄날의 정원. 이백이 환생한다면 꽃들 사이를 거닐며 술잔을 기울였음직도 하다.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대저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나그네

而浮生若夢 爲歡 幾何(이부생약몽 위환 기하)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 얼마나 되나? 

古人 秉燭夜游 良有以事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사) 
옛사람들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노닌 것도 실로 까닭이 있었음이라 

況 陽春召我以煙景 大塊暇我以文章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랴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회도리지방원 서천륜지락사)
복사꽃 오얏꽃 아름다운 동산에 모여 형제들끼리 즐거운 일들을 말하는데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 獨慙康樂(군계준수 개위혜련 오인영가 독참강락) 
여러 아우들준수하기가 모두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만 강락후에 부끄러울 뿐이네. 

幽賞 未已 古談 轉淸(유상 미이 고담 전청) 
그윽한 감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옛 이야기는 갈수록 맑아지는데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
꽃으로 옥 자리 대신 깔고 술잔 날려 달을 취하게 하네 

不有佳作 何伸雅懷(불유가작 하신아회)
아름다운 작품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회포를 펴리오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여시불성 벌의금곡주수) 
만약 시를 이루지 못한다면 금곡(金谷)의 술잔 수만큼 벌주를 내리리라.      

                                                                                   <이백; 701년-762년> 

간(人間)의 삶이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시간(時間)의 x축과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간(空間)의 y축이 교차한 어딘가에 찍히는 한 점에 불과하다. ‘시간’이라는 말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시(時)를 토막 낸 것에 불과하거니와, ‘공간’ 역시 허공(虛空)의 특정부분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말 자체도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사람다운 삶을 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존재인 사람은 ‘간(間)’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바, 고대 중국인들이 시간-공간-인간의 삼간(三間)을 중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삼간’에서의 유한(有限)을 얼마나 유용하고 의미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시공(時空)’를 초월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이백 초상 스케치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출생과 사망 사이, ‘공간’은 그가 위치한 곳의 하늘과 땅 사이, ‘인간’은 그가 그의 시공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 또한 그 삼간(三間)을 꽤나 의식했던 듯하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도 그런 의식의 표출로 보인다. ‘춘야연도리원서’는 이백이 복사꽃과 오얏꽃 만발한 봄날의 정원에서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여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글, ‘천지’를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에 비유하고 ‘세월’은 그 여관에 묵어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 너무 기발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거니와, 밤에 촛불을 들고서라도 짧은 인생의 의미를 실컷 찾아보자는 너스레 깨달음이 너무 진지하여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려한 문장도 일품이지만 시재(詩才)가 뛰어나 강락후(康樂候)에 봉해졌던 남송(南宋) 시인 사혜련(謝惠連)이나 진(晋)의 거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 고사를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차용하여 흥취를 고조시키는 이백의 글 솜씨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진다. 

‘춘야연도리원서’를 감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을 “옥자리 깔고 꽃 마주하고 앉아 술잔 날려 달빛에 취하다”라고 해석하지만 그건 시적(詩的) 감흥(感興)을 무시한 풀이라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그 구절 해석의 열쇠는 앞 구절의 ‘이(以)’와 뒷 구절의 ‘이(而)’, ‘以’는 ‘-로서’라는 의미이므로 ‘開瓊筵以坐花(개경련이좌화)’는 진짜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깔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키 작은 꽃’ 즉 ‘좌화(坐花)’를 ‘옥자리’ 삼아 깔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고, ‘飛羽觴而醉月(비우상이취월)’은 비(飛)와 취(醉)가 동사로 쓰이고 그 사이에 ‘그리고’라는 의미의 접속사 ‘而’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깃털 모양의 술잔[羽觴]을 날려 달을 취하게 하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시적 감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달을 취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입을 삐죽거리겠지만 “그렇다면 술잔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으면 뒤통수 긁적거릴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罰依金谷酒數(벌의금곡주수)’도 씹으면 씹을수록 인생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명구(名句)다. 진(晉)나라 때 형주자사를 지내면서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큰 부자가 됐다는 석숭(石崇)은 낙양 서쪽 골짜기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어놓고 호화로운 시회(詩會)을 베풀면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 그는 지금도 중국서 복(福)-녹(祿)-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고 있지만, 당대의 실력자 사마륜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후 애첩(愛妾) 녹주(綠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녹주의 미색을 탐하다가 거절당했던 사마륜의 측근 손수(孫秀)가 앙심을 품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도 한다. 인생무상, 생전에 1백여명의 처첩과 8백여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석숭이지만 죽은 후엔 ‘금곡원의 벌주’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 않느냐는 이백의 은근한 경고(?)에 누군들 시를 제대로 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되겠느냐고? ‘춘야연도리원서’를 한 번 읽으면 봄날의 흥청망청 야유회 정경이 떠오르지만 두 번 읽으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공간-인간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충고가 또렷하게 감지된다.

2013년 5월 15일 수요일

수선화(Daffodils) - 외로운 인생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보스톤 캠브릿지의 한 쇼핑몰 정원에 활짝 핀 수선화.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수선화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Daffodils(수선화) 


I wander'd lonely as a cloud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았습니다.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계곡들과 구릉들 위로 높이 떠다녔지요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그 때 문득 한 떼의 무리를 봤습니다 
A host, of golden daffodils;                         군대처럼 많은 황금빛 수선화를요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호숫가, 나무들 아래서,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미풍에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더군요 

Continuous as stars that shine                    빛나는 별들처럼 끊임없이 죽 이어져 있었지요 
And twinkle on the Milky Way,                    은하수 위에서처럼 반짝거렸죠, 
They stretch'd in never-ending line               끝없는 줄을 이루며 뻗어나가 있었습니다 
Along the margin of a bay :                         산 속 분지를 따라서 말입니다: 
Ten thousand saw I at a glance,                  한 눈에도 1만송이는 보였습니다, 
Tossing their heads in sprightly dance.        머리를 쳐들고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그것들 말고 다른 물결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glee:            환희의 물결로는 단연 돋보였습니다: 
A poet could not but be gay,                      그 어떤 시인도 즐거울 수밖에 없었죠, 
In such a jocund company:                        그런 명랑한 어울림 속에서는요: 
I gazed-and gazed- but little thought           나는 응시했지요-또 응시했습니다-그러나 별 생각 없었습니다 
What wealth the show to me had brought :  풍성한 그 쇼가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에 관해서는요 :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이따금, 긴 의자에 누워 있을 때면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허전하거나 시름에 잠길 때면,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그것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                    그건 혼자 있을 때의 더 없는 행복이지요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그러면 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수선화들과 함께 춤을 춥니다.
                                                       
                                    <1807년 ‘Poems, in Two Volumes’, William Wordsworth; 1770년-1850년> 

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애(自己愛)’ 또는 ‘자기도취(自己陶醉)’라고 번역되는 그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요정 에코(Echo)의 사랑을 거절한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서스(Narcissus 또는 Narkissos)가 그 벌로 어느 날 연못물에 비친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됐는데, 그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수선화(Narcissus)로 변했고, 거기에 착안한 정신분석학자들이 ‘자기애’ 또는 ‘자기도취’라는 의미로 ‘narcissism’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흔히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면 공주병에 걸린 아가씨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인격적 장애의 한 증상으로 간주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때때로 ‘나르시시즘’의 증상을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도 “인간은 유아기에는 본능이나 관심을 주로 자기 자신에게 쏟다가 성장하면서 그 본능이나 관심을 어머니나 누이 또는 이성으로 대상을 확대시켜 나가는데, 심각한 배신이나 결별로 그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면 유아기나 청소년기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형태로 되돌아가게 된다”고 주장했었다. 고독에 빠진 사람들이 극심한 자기연민 또는 자기도취에 쉽게 빠져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워즈워드 생가 스케치와 2012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워드워드 시집
맞다.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의 위안의 뿌리는 자기도취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는 일정 거리를 둔 시인들이나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 빠져드는 것도 그런 자기도취의 일종으로 보이거니와 1770년 잉글랜드 북서부의 아름다운 호수 마을 코커마우스(Cockermouth)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1778년 어머니가 죽고 법률가였던 아버지 또한 1783년에 세상을 떠나 매우 고독한 소년기를 보냈던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년)도 그런 기질이 다분했던 것 같다. 워즈워드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수선화(Daffodils)’에 대해서도, 많은 평론가들은 ‘자연과의 교감’이 어쩌고저쩌고 ‘영국 낭만주의 시의 꽃’이라느니 “영미(英美) 시문학사상 음악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칭찬을 늘어놓고 있지만, 시의 첫머리 “I wander'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에서 보듯 인생의 계곡들과 구릉들 위로 구름처럼 떠돌아야 했던 워즈워드의 생의 고독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 것 같아 눈이 흘겨지거니와, 워즈워드가 사는 게 공허하고 우울할 때마다(In vacant or in pensive mood) 언젠가 보았던 수선화들을 눈앞에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 되레 시의 감흥을 반감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워즈워드는 말년에 더햄과 옥스퍼드 대학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계관시인의 영예를 얻기도 했지만 평생 외로운 사람이었다. 스무 살 시절인 1790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기도 했고 프랑스 여자 아네트 발론(Annette Vallon)과 사랑에 빠져 1792년 딸을 출산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혼자 영국으로 돌아와 역시 시인이었던 한 살 아래 여동생 도로시 워즈워드(Dorothy Wordsworth)를 평생 동무삼아 살면서 시작에 몰두했었다. 1807년 출간된 ‘두 권 책속의 시들(Poems, in Two Volumes)에 실린 ‘Daffodils’ 또한 1802년 봄 도로시와 함께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수선화 군락지를 보고 1804년에서 1807년 사이 작품화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작품의 1,2,3 연은 과거 시제인 반면 마지막 4연은 현재 시제인 바, 과거의 즐거웠던 회상으로 현재의 공허함이나 우울한 기분을 달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시를 쓸 당시 또한 그리 명랑하고 기쁜 기분은 아니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구름이 되어 계곡과 구릉 위를 높이 떠다니면서 수선화의 군무(群舞)를 목격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시적 상상력의 산물, 많고 많은 꽃들 중에서 ‘narcissism’라는 말의 뿌리인 ‘수선화(Narcissus)’를 시의 소재로 택한 것도 묘한 우연(?)이고 보면, 워즈워드 역시 자기도취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2013년 5월 14일 화요일

향수(鄕愁) - 꿈에도 못 잊는 인간의 본향

지금은 도시로 변해버린 뉴욕 퀸즈 카운티의 1920년대 전원 풍경. 농가의 생김새만 다를 뿐 한국의 시골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7년, 정지용; 1902년-1950년> 


고 사는 게 힘들수록 향수(鄕愁)가 커지는 것은 인지상정, 한자 ‘鄕愁’도 그래서 생겨났다. 시골 향(鄕)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서 본래 의미는 ‘함께 밥을 먹다’, 그게 훗날 ‘마을’ ‘시골’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자 거기에 먹을 식(食)을 더해 ‘잔치’라는 의미로 썼다. 가을 추(秋)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시름 수(愁)도 마찬가지다. 가을 추(秋)는 벼 화(禾)에 불 화(火)가 붙은 것으로서 추수를 앞두고 곡식을 좀먹는 메뚜기들을 잡아 불태우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는 게 정설, 겨울을 날 양식이 모자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그린 것인 바, 농경문화권에서 밥을 같이 먹던 혈연․지연에 대한 그리움 또한 시름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걸 거꾸로 말하자면, 향수는 ‘너’와 ‘나’의 성분과 사상과 다름을 극복해주는 공통분모로써, 향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감성으로 돌아가는 것인 바, 인간애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했던 것도 ‘향수’를 통해 인간애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본향을 아담과 이브가 죄 짓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으로 설정해놨듯이, 시골출신이 도회지의 물질만능주의에 타락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고향에서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는 게 고달프고 외로울수록 향수가 더욱 증폭된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아예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자고 일어나면 논밭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요즘 고향 또한 예전의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보면 현대인의 고향은 자신의 가슴 속이나 꿈속에만 남아있는 실루엣 같은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대인은 모두 다 실향민(失鄕民),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년-1950년)도 ‘현대인이 상실한,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고향’을 주목했던 것 같다. 1903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이 ‘향수’를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인 1923년 경,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19년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므로 ‘향수’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유학 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 일본에 유학 갔던 대부분의 조선 젊은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정지용 또한 낯선 타관에서 나라를 빼앗긴 2등 국민으로서 서러움을 톡톡히 겪으면서 ‘향수’의 시상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부터, 1946년 건설출판사에서 펴낸 정지용 시집, 정지용, 스티크니
최남선(崔南善)이 한국 최초의 신체시로 일컬어지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을 발표한 게 1908년이고 주요한(朱耀翰)이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한 게 1919년, 그 이후 불과 4년만에 정지용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라든지 ‘금빛 게으른 울음’ 등의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해가며 지금의 어느 현대시에 비겨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혹자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에 접했을 구미 영시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머지 시상과 시적 기교를 습관적으로 차용(?)했을 거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향수’가 하버드대 출신으로서 30세 때 뇌종양으로 숨진 미국 시인 조셉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 1874∼1904)의 ‘추억(Mnemosyne)’를 모방 또는 번안했다는 글이 나돌기도 했었다. 실제로 ‘향수’와 ‘추억’은 구조와 시상의 전개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매 연마다 ‘the country I remember’(추억)과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향수)가 반복된 것도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고, ‘소’ ‘누이’ 등의 소재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지용이 스티크니의 것을 한국말로 살짝 고쳐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향수’가 ‘추억’을 베낀 것이라고 해도, ‘향수’의 문학적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될 듯싶다. ‘향수’와 ‘추억’의 프레임과 테크닉은 같을망정 ‘향수’는 조선인의 가슴 속에 따뜻하게 묻혀 있는 ‘고향’을 그린 것인 반면 ‘추억’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을 그렸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지용이 한국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런 사소한 시시비비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탓에 정지용은 누군가가 평했던 것처럼 “살아서는 불우한 시인이었고 죽어서는 사상적 금기 대상”이었지만,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많은 기라성 같은 후배 문인들을 등단시킴으로써 한국시단의 씨알을 굵게 만든 탁월한 문학가였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젊은 천재 시인 이상의 시를 실어 길을 터줬고, 1939년 ‘문장(文章)’ 편집인으로 있을 때는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 세칭 ‘청록파’를 등단시켰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화여전교수와 경향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었다. 그런 그가 한창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던 스무 살 시절에 서양시인의 시 하나 모방했다고 해서 손가락질한다면 그게 더 비문학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나 ‘사철 발 벗은 안해’를 두고 있는 사람들만큼은 정지용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고 믿는다. 왜? 한국인들의 ‘고향 인심’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