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귀천(歸天) - 이 서럽고 슬픈 세상 용서하기

철 이른 롱아일랜드 존즈 비치에서 한 노인이 일광욕을 하면서 갈매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지난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세상을 용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1979년 '주막에서', 천상병; 1930-1993> 

실의 고통과 고뇌를 잊고 싶어 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중의 하나가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다. 육체만 죽을 뿐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인데, 한자문화권의 정신(精神)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사람은 정기신(精氣神) 즉 육신(肉身)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靈)의 생명력인 신(神)이 기(氣)에 의해 결합되어 생명을 이루고 있는 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의 운행이 정지되어 정(精)과 신(神)이 분리되는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더라도 정(精)은 백(魄, 얼)이 되어 땅으로 흩어지고 신(神)은 혼(魂, 넉)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종교라는 것들 또한 영혼불멸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시집 '주막에서'와 생전의 천상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라고 선언했던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년-1993년)도 영혼불멸을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천상병은 일찍이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재학 중 당시 담임교사였던 시인 김춘수(金春洙)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돼 등단했으나, 1955년 서울대 상대 중퇴 후 먹고 살기 위해 1964년 김현옥 당시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일하기도 했는데, 1967년 박정희 독재정권이 조작한 ‘동백림 사건’ 때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푼돈을 얻어 쓴 게 간첩 공작금으로 몰려 극심한 전기 고문과 함께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육신과 정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1970년엔 고문 후유증과 과도한 음주에 따른 영양실조까지 겹쳐 무연고 행려병자로 전락한 끝에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행방불명이 되자 지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오해하여 그 이전에 쓴 시 몇몇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펴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천상병이었기에 말년에 천주교에 귀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거니와, 작품의 대부분이 현세의 고통과 고뇌를 잊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된 것도 매우 당연해 보이고, ‘하늘로 돌아간다’ 즉 ‘죽음’을 의미하는 ‘귀천(歸天)’이 그의 대표작이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79년 민음사에서 펴낸 천상병의 첫 시집 ‘주막에서’에 실린 ‘귀천(歸天)’은 시상의 전개나 주제가 그의 유고(?) 시집 ‘새’에 실렸던 동명 작품 ‘새’의 속편(續篇)이라고 할 만하다. 지상에서 울던 새가 하늘로 날아간 격이다. 다음은 1959년 5월 ‘사상계’에 발표했던 ‘새’의 전문.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1959년의 ‘새’가 20년이 지나 1979년의 ‘나’로 바뀌었을 뿐, 영혼의 불멸을 믿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듬어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노을 빛’의 달관(達觀)으로 바뀌면서, 살아 있을 적의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본다. 그 20년의 세월 사이 ‘동백림 사건’과 ‘무연고 행려병자’ 등등의 고통과 고뇌를 겪으면서 그런 고통과 고뇌를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으로 승화하기까지 천상병이 곱씹었던 이승에서의 서러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오기도 한다. 자신의 육신을 짓밟고 영혼을 억눌렀던 이 세상을 너그러이 용서한 천상병, 그의 영혼은 자신이 생전에 노래했던 것처럼 하늘로 돌아갔겠지만 그의 시 ‘귀천’은 이승에 남아 읽히고 또 읽혀질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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