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1일 토요일

강설(江雪)- 눈 감고 눈을 세다

매사추세츠 보스턴 캠브릿지의 강변 공원 설경. 인적이 끊긴 공원에 부는 바람소리가 더욱 더 차게 느껴진다.


江雪(강설)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온 산에 새 날지 않고

萬徑人蹤滅 (만경인종멸) 모든 길엔 사람 발길 끊겼네

孤舟蓑笠翁 (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눈 내려 차가운 강에 홀로 낚시질 하네

                                                 <유종원(柳宗元); 773년-819년>

하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33 스트리트 쪽 출구, 블라우스 바람의 크리스틴과 턱수염이 노리끼리한 제임스, 그리고 까무잡잡한 얼굴의 이민자 하나가 춤추며 하강(下降)하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핀다. 하양은 동색(同色), 하나는 내려오고 또 다른 하나는 올라가고 있을 뿐, 담배연기는 지상(地上)에서 영원(永遠)으로, 눈송이들은 영원에서 지상으로,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타민 C 가루 냄새가 날 것 같은 크리스틴의 입, 버터를 바른 듯한 제임스의 입, 김치찌개 냄새가 남아있는 한국계 이민자의 입, 서로 다른 입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지만 2-3피트 허공에서 하나가 되어 사라지고 있고, 저 하늘 꼭대기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겠으나 따로 따로 내려오던 눈송이들도 지상에 안착하자마자 하나로 합쳐져 바람 부는 대로 길게 드러눕고 있지 않은가. 

그래, 맞다. 결국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왜 매번 잊어버리고 있을까. 팔짱을 낀 채 빨간 립스틱의 입술 사이로 담배를 가져가면서 이따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20대의 크리스틴과 터럭 끝에 눈을 달고 있는 40대의 제임스, 촌스럽게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민자 역시 눈을 바라보면서 하나로 합쳐진다. 멋쩍은 듯 빙그레 웃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회상(回想)의 언덕으로 달려가리라. 담배연기는 올라가고 눈발은 내려오듯이, 헬렌이나 제임스는 업스테이트 스키장이나 전나무 숲으로 달려가겠지만 이민자는 가난이 곰팡이 스는 시골집 건넛방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돌아가시기 전 해소병으로 고생하셨던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썩어서 물러터진 고구마를 만지작거린다. 

어느 해, 멀리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살얼음 언 듯한 겨울 하늘을 쪼개고 있을 때 그 쪼개진 하늘의 틈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불가승수(不可勝數),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선데이 서울> 가운데 페이지에 벌거벗고 서 있는 여배우도 더 이상 웃지 않았고, 표지에 찌개국물 자욱이 선명한 문예월간지 속의 활자들이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눈발을 세는 것밖에 따로 할 일이 없었다. 혼잡한 서울 생활, 현고학생(顯考學生) 할아버지 신위(神位), 사랑과 욕망, 고독과 번민 따위가 옆방 고구마 가마니에서 새어나오는 퀴퀴한 냄새와 뒤섞이면서 감각을 마비시킨 지 오래였다. 그랬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적막한 겨울 오후 눈송이들을 세는 것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머릿속을 텅 비운 채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볼 때면 각막은 으레 젖유리로 변하곤 했다. 몸 안의 의식 있는 것들이 세상을 내다보는 유일한 창(窓), 두 눈의 유리창에 잡다한 상념의 김이 서리는 것이었다. 

유종원 초상
당(唐)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년-819년)의 시 ‘강설(江雪)’을 외우고 다닌 것도 그 즈음이었으리라. 유종원은 당 고종(高宗) 때의 재상 유석(柳奭)의 후손으로서 33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상서예부원외랑이 됐으나, 환관들과 부패관리들이 나라 말아먹는 게 꼴 보기 싫어 정치개혁운동에 가담했다가 영주사마로 좌천된 후 다시는 중앙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4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했다. ‘강설’은 그가 낙백하여 울분을 곱씹던 시절 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울분은커녕 세상 원망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서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읽고나면 가슴 속에 처절한 체념이 쨍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단 스무 자의 한자에 담겨진 이 세상의 고독과 체념과 순응을 담은 유종원의 시재(詩才)가 부럽기도 했다. 그게 너무 절묘하고 멋있어서 옛사람들은 그림으로까지 그리면서 유종원이 느꼈던 감정의 한 쪼가리나마 공유하려고 애를 썼던 바, 그림을 ‘독조한강설도(獨釣寒江雪圖)’라고 했던가? 

이 작품에서 ‘천산(千山)’과 ‘만경(萬徑)’의 천(千)과 만(萬)은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모든’을 의미하는 바, 천에서 만으로의 점층(漸層)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가다가 고주(孤舟)의 홀로 독(獨)으로 점을 찍는 시적 테크닉이 일품, 천산과 만경을 헤매다가 늙어서는 추운 강물 위 홀로 외로운 배에서 낚시질이나 하는 것이 그저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게 낙백한 유종원의 깨달음이었나? 그런 깨달음이 큰 시인 유조원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낙백한 천만 장삼이사들의 공통적인 것이라면? 허공중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독조한강설도’가 그려지는 것도 천과 만의 인지상정이리라. 지금껏 그런 흔한 인지상정들을 나 혼자만의 느낌을 특별한 것으로 여겨온 치졸한 감성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독재자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단물 빨아먹는 사람들이 애국이 어쩌고 경제가 어쩌고 침 튀기는 게 꼴 보기 싫어 이민을 왔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는 게 팍팍하기는 오십보백보, 그래, 이 세상은 원래 한 폭의 ‘독조한강설도’인지도 몰라...그런 생각을 하면서 흩날리는 눈들을 바라보노라니 또 다른 눈들이 눈으로 들어온다. 저건 긴 머리 휘날리며 돌아서던 그녀의 젖은 두 눈, 이건 누렇게 퇴색한 할아버지의 두 눈, 번들거리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성난 아버지의 두 눈, 미스 리, 김 부장, 강 국장의 눈, 눈, 눈.... 그런데 참 희한하다. 그 모든 눈들이 허공중에 있을 땐 뜬 것처럼 보이지만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질 때면 스르르 눈을 감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바라보는 눈도 마찬가지다. 비록 초점을 잃었을망정 허공을 바라볼 때는 뜨고 있지만 아래로 내리깔 때는 어느 샌가 눈을 감게 된다. 그래서 문득 깨닫는다. 수천 개의 사연, 수만 개의 인연, 수억 개의 생각, 눈을 셀 때는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을. 저 흩날리는 눈들도 몇 천 피트 아니 몇 만 피트 상공에서 “지상에 내려가면 눈을 감자, 눈을 뜨고 있으면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솟구치는 슬픔으로 우리의 몸 전체가 녹아 없어질는지도 몰라”하며 서로 눈을 감자는 약속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그 때의 깨달음을 지키자. 어릴 땐 눈을 뜨고 눈을 셌었지만 앞으론 눈을 감고 눈을 세리라. 머릿속으로나마 ‘독조한강설도’를 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