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4일 금요일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상린관계(相隣關係) 속의 두려움과 설렘

담을 넘어 나온 벚꽃나무 가지가 꽃을 활짝 피웠다.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 데 대한 기쁨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두려움도 엿보인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작가세계’ 봄호, 정끝별; 1964년- > 

률 규정에 의해 소유권이 제한되는 경우의 하나로서 ‘상린관계(相隣關係)’라는 게 있다. 서로 인접한 토지 소유자가 각자의 소유권을 억제하는 것에 따라 양자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분쟁을 해결하여 이웃간 토지 이용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상린관계에 의한 소유권 제한은 법률상 당연히 인정되는 바, 미리 약속해 둘 필요가 없는 점에서 문서에 의해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지역권(地役權) 등과는 다르다. 상린관계에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수지(樹枝)·목근(木根)의 제거권이다. 이웃 토지의 나뭇가지가 경계를 넘어 자기 토지로 들어왔다고 해서 이를 함부로 절단할 수는 없고, 그 소유자에 대하여 가지의 제거를 청구할 수 있는 바(민법 제240조 1항), 소유자가 청구에 의하지 아니하면 청구자가 가지를 제거할 수 있으며(2항), 수목의 뿌리가 경계를 넘은 때에는 임의로 제거할 수 있다(3항). 

나뭇가지에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있어서 관습과 법을 안다면 담을 함부로 넘을 수 있을까? 상린관계에 있는 담 저편의 토지 소유자가 제거를 요구하면 어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인 담을 넘어보고 싶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 반 설렘 반, 시인으로 타고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름 또한 매우 시적인 시인 정끝별도 ‘가지가 담을 넘을 때’를 쓸 때 그런 심정을 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는 것을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의 혼연일체 성원(?)에 힘입어서, 그리고 또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와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에 억지로 밀리다시피, 담은 넘은 가지에게 있어서 담은 도박이자 도반이었다고 말한 정끝별의 관찰에서 그런 심정이 진하게 읽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읽을 때의 감정의 진동 폭이 들쭉날쭉하기는커녕 잔잔하면서도 섬세하게 조율되는 것은 일부러 관찰자의 시점을 선택한 시인의 의도가 성공을 거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 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대학 강단에까지 서고 있는 정끝별의 시작(詩作)이 감성의 분출보다는 섬세한 관찰과 분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로도 보인다. ‘-을 것이다’라는 제3자의 추측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선한 느낌까지 준다. 

정끝별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  2005년 민음사
그러나 ‘가지가 담을 넘는 것’이 정끝별의 독창(獨創)은 아니다. 이미 기독교 구약성서 창세기에 49장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Joseph is a fruitful bough, even a fruitful bough by a well; whose branches run over the wall)’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사랑받으면서 넓은 식견으로 순결하게 살았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나 그런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다. 정끝별이 그 구절을 읽어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지가 담을 넘는다’는 표현이 독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바, 그게 주옥같은 이 작품의 티라면 티일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금단의 담’으로 등장했던 담이 마지막 연에 가서는 ‘도박’이자 ‘도반’으로 변하는 것도 독자를 머뭇거리게 한다. ‘도박’이야 그렇다고 치고, ‘도반’을 ‘도를 같이 닦는 벗’이라는 의미의 ‘道伴’으로 이해한다면 ‘담을 넘는’ 행위가 도를 깨우치는 범위로 한정되고 ‘칼자국’을 뜻하는 ‘刀瘢’으로 이해한다면 ‘신명 나는 일’이 아닌 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의 극적 효과가 무한 확대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시적 모호성(模糊性, ambiguity)을 증폭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자어를 병기하지 않은 것이라면 할말이 없지만. 

어쨌거나 ‘가지가 담을 넘을 때’는 상린관계의 당사자이면서도 관찰자인 듯한 입장에 서서 짐짓 태연하고 매끄러운 감정이입(感情移入)을 부추김으로써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자칫하면 튀기 쉽상인 시 속 감성의 흐름을 차분하고 섬세한 터치로 조율하는 것도 돋보이고. 정끝별의 시가 나름대로의 경지에 올랐음을 공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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