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0일 월요일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서글픈 시대의 서글픈 이립(而立)

시위가 끝난 뒤의 현장. 온갖 구호는 사라지고 쓰레기만 남았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인 최영미의 절규가 가슴에 와닿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94년 창착과비평사, 최영미; 1961년- >


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인간(人間)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는 관계(關係)의 묶음인 바, ‘오불관언’은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적인 삶을 추구하고자할 때 튀어나오는 말들 중의 하나다. 한자 빗장 관(關)은 영역과 영역의 경계인 문(門) 아래서 실[絲]을 북[丱]에 꿰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서, 영역과 영역이나 이것과 저것의 연결과 닫힘 또는 얽힘을 뜻한다. 사회생활을 관계맺음의 연속으로 파악하여 관계를 유난히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 사람들은 ‘매우 끈끈하여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톄꽌시(鐵關係)’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인과율(因果律)을 주요 교리로 삼는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인(因)인 동시에 과(果)로 파악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바, ‘나’ 또한 인과에 따라 변하고 또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걸 속세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인간은 삶은 관계 속에 있다’가 된다. 

인간사회에서 ‘자립(自立)’한다는 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독자적으로 관계 맺기와 관계 끊기에 나선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실제로 한자 설 립(立)은 다 큰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양의 큰 대(大)가 땅 위[一]에 서 있는 형상으로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선다는 의미다. 그게 쉽지는 않다. 한자문화권의 성현으로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공자(孔子) 또한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뒀고, 서른에 섰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고 고백했었다. 태어나서 글을 깨우기까지 15년, 배워서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정립하기까지 또 15년, 평균수명이 60세에 훨씬 못 미쳤던 당시 30년이라면 꽤나 길고 긴 세월이었던 바, 이 세상에서 홀로 서기가 쉽지 않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석가가 서른 살이 다 되어 출가하고, 서양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뿌리박혀 있는 예수 또한 비로소 서른이 되어서야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싶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1961년- )가 1994년에 발표한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또한 관계 속에서의 고뇌로 읽혀진다. 그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시 속의 몇몇 단어들에 얽매여 “대학시절 치기로 운동권을 기웃거렸던 시인이 30세가 되어 홀로 서기를 시도한 것”이라느니 “운동권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운동권으로부터 협박전화도 받았다더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신포도를 보면 침을 흘리는 따위의 습관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을 뿐,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의 고뇌를 읊은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관계 맺음이 알파요 오메가인 이 세상에서 ‘상관(相關)’과 ‘오불관언(吾不關焉)’ 사이에 홀로 선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서글픈 것인지를 모르면 그 시에 대한 감상은 수박 겉핥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사전적으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 즐기는 일”이라고 정의되는 ‘잔치’는 관계 맺음의 대표적 산물이거니와, 그런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고집한다는 건 소위 왕따의 지름길인 바,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토로는 ‘상관없다’ ‘상관있다’를 따지는 게 아니라 관계에 얽매여 ‘분위기’에 휩쓸리던 ‘나’의 자각과 자기 독립 선언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관계 속에서는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고쳐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가 잔치가 끝나고 홀로 남았을 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토로하는 모습에서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간파했던 ‘군중 속의 고독’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고독하다. ‘상관’과 ‘오불관언’의 사이 또한 고독이라는 실로 연결돼 있는 지도 모른다. 외롭지 않으려고 운동권 ‘동지’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더 큰 외로움을 느끼고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를 써서 자신을 이해하는 독자를 구하고 나섰지만, 그 독자들마저 ‘운동권과의 결별’이니 ‘인간으로서의 성숙’ 등등만을 읽었을 때, 최영미가 느낀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 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다. 외롭지 않으려고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동떨어져갈 때 도리어 더 큰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인간의 딜레마, 인간은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차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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