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4일 금요일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불이’ 시인의 ‘메멘토 모리’

매사추세츠 보스턴과 케임브릿지 사이를 관통하는 알스톤 리버 사이드의 설경.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민음사, 1974)의 표제시, 고은(高銀):1933 - >


간의 삶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역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의 장군들이 원정에서 개선하여 화려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일 때 노예를 시켜 큰소리로 외치게 한 데서 유래했다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의 의미는 말 그대로 "죽음을 기억하라”,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으로서 박수갈채를 받고 있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고 자신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또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는 시간의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바, 죽음이야말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근년의 고은 시인(사진 왼쪽)과 1974년 민음사에서 펴낸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
전북 군산 출신의 시인 고은<高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은 일찍이 삶과 죽음이라는 게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군산중학교에서 4학년까지 수학한 후 1952년 19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詩作)을 했던 특이한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들 중에는 불교 냄새가 나는 것들이 많다. 그에게 명실상부한 시인의 명함을 쥐어준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의(文義)마을에 가서’도 그 중 하나다. 인적이 끊긴 채 눈만 내리는 문의 마을의 풍광을 불교 수행자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적멸(寂滅), 열반(涅槃)의 세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적(靜寂)과 무념(無念), 작중의 화자 역시 그런 적멸 속에서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며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불교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로 일컬어지는 열반은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함으로써 최고의 정신적 평안함에 놓이는 상태,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이므로 적정(寂靜)을 덧붙여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도 하는데, 열반적정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와 함께 불교 근본교의인 ‘사법인(四法印)’에 속한다. 

불가에서의 해탈은 번뇌를 전제로 한다. 이른 바 불이(不二)다. 고은이 눈에 덮이는 문의 마을의 적막 속에서 죽음을 봤지만 그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본 게 아니라 삶과 연결 지어 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 또한 불이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이라는 구절도 삶도 죽음과 만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그것들이 별개의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의 깨달음을 강조하기 위해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이라고 재차 덧붙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다보면 시적 감흥보다는 깨달음이 먼저 와 닿는 것도 삶과 죽음이 불이라는 불교 교리의 뼈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는 물음은 시구가 아니라 불가의 선문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은은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이를 지향했던 것 같다. 1960년 첫 시집으로 ‘피안감성(彼岸感性)’을 펴낸 데서 보듯 불교의 깨달음으로 시작의 토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유신독재 및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부터는 사회참여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개인적 깨달음이 사회적 깨달음으로 확대됐다고나 할까, 고은 시의 껍데기만 본 사람들은 1986년부터 발표하여 2009년 최종 탈고한 총 30권 4001편 짜리 연작시집 ‘만인보(萬人譜)’와 비슷한 시기 완성된 대서사시 ‘백두산’을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민족의 큰 시인’이라고 추켜세우지만 고은 시의 알맹이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사람들은 ‘문의 마을에서의 개인적 깨달음’이 ‘독재치하에서의 사회적 깨달음’으로 이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토를 달지 않으리라 믿는다. 고은 자신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는 듯이 최근 들어서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과 같은 깨달음의 시로 회귀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은 ‘불이’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우울한 사람들의 동병상련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선집’(산호장, 1955), 박인환(朴寅煥:1926~1956)>

람은 왜 우울(憂鬱)해질까? 의학과 과학이 별로 발전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동서양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했던 것 같다. 근심 우(憂)는 원래 머리 혈(頁)과 마음 심(心)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뒤져서 올 치(夂)가 합쳐진 것으로서 머릿속의 어떤 생각이 마음을 짓눌러 뒤처지는 것을 말한다. ‘우울’을 뜻하는 영어 ‘depression’의 뿌리도 ‘내리 누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primere’다. 그러나 심장도 바꿔치기 하는 요즘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마음의 감기'로도 불리는 우울증에 관해 아직도 ‘당사자의 정신적 의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학자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 발생하는 생리학적·해부학적 문제로서 부정적인 감정은 그런 변화에 따른 결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세로토닌(serotonin)과 멜라토닌(melatonin), 도파민(dopamine),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등 신경과 관련된 여러 가지 호르몬이 우울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뇌를 순환하면서 신경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신경대사물질 세로토닌은 데 감정 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바, 이 물질이 부족하면 감정이 불안정해서 근심·걱정이 많아지고 충동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2배 정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월경 주기를 전후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등 여성 호르몬의 불균형이 뇌를 자극하여 세로토닌 분비에 변화를 야기하는 바, 세로토닌의 농도가 조금만 변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 등 여러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생리 전 불쾌 기분 장애, 산후 우울증, 폐경기 우울증 등등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1941년 4월 3일 울프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1면에 게재한 뉴욕타임스
소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픈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1882~ 1941)도 꽤나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데 이어 190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두 번째 정신 이상증세를 보이면서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선천적으로 정신병(精神病, mental disease)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한 데 이어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한 후에는 ‘항해(1915)’ ‘밤과 낮(1919)’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올랜드(1928)’ 등등을 발표하면서 필명을 떨쳤고 1906년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 중심가 대영박물관 근처의 블룸즈버리(Bloomsbury)에서 소설가 E. M. 포스터, 전기작가 리턴 스트레이치,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버네서 벨과 던컨 그랜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등과 어울리면서 당대의 지성을 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부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등으로 인한 충격을 채 극복하기도 전에 세상에 대한 환멸과 불안과 고독이 그녀의 정신을 짓밟아 눌렀고 평생 우울증과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1941년 3월 28일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우즈 강(River Ouse)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고 만다. 

지금도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한 여류지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래서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가 1962년 브로드웨이 무대 위에서 초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류 지성의 고뇌를 떠올렸지만 기실 그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당초 극중에 1933년 개봉되어 히트 친 디즈니 영화 ‘아기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의 노래 ‘누가 크고 못된 늑대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를 차용하려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자 다른 노래에 ‘the Big Bad Wolf’와 어감이 비슷한 ‘Virginia Woolf’를 넣어 가사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몰랐던 많은 관객들이 ‘Virginia Woolf’라는 이름에 끌려 표를 샀다고 전해지는데, 그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자 1966년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 주연의 동명 영화를 만들어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했다. 우울한 여류지성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계인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이용(?)당한 데 대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생전의 박인환 시인(왼쪽)과 1955년에 펴낸 '박인환 시선집'
우울한 사람은 우울한 사람이 더 잘 이해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사회의 우울한 지성들이 버지니아 울프를 벗 삼았던 것도 그런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항상 우울하여 최면·진정·항경련(抗痙攣) 작용이 있는 페노바르비탈(phenobarbital)에 의존했다는 시인 박인환(朴寅煥:1926~1956)도 버지니아 울프를 꽤나 좋아하여 그녀의 작품을 탐독했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인 ‘목마(木馬)와 숙녀(淑女)’를 읽다보면 그가 버지니아 울프를 짝사랑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작품에서의 키워드들 중의 하나는 목마, 목마는 세상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어른들이 아니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의 놀이도구, 버지니아 울프 같이 여리고 순수한 영혼은 생의 우울과 고독과 허탈감을 수용하지 못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고 말았을 거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작품 중간의 ‘……등대(燈臺)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에 발표한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 )’에서 따온 듯,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자문(自問)에서는 자신 또한 목마를 타고 떠난 버지니아 울프의 뒤를 따라갈 거라는 우울한 예고가 감지된다. 실제로 박인환은 이 시를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페노바르비탈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삶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가? 사람이 우울해져서 삶이 우울하게 느껴지는 건가? 버지니아 울프와 박인환이 환생하여 정신과 의사들과 논쟁을 벌인다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우울증이 버지니아 울프를 잡고 박인환을 잡고 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잡고 있지만 동서고금의 애송시 들에서 우울을 걷어내면 맹숭맹숭하기 짝이 없는바 우울증 또한 삶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 또한 우울할 때 읽어야 제 맛이 나지 않던가?!

2017년 2월 14일 화요일

고한행(苦寒行) - 대장부 큰 뜻을 이루려면

산시성과 산둥성을 가르는 태항산맥. 


苦寒行(고한행)


北上太行山 (북상태행산) 북으로 태항산에 오른다
艱哉何巍巍 (간재하외외) 참 어렵도다, 어찌 이리도 높고 험한가
羊腸阪詰屈 (양장판힐굴) 구절양장 골짜기 구불구불
車輪為之摧 (차륜위지최) 수레바퀴도 안 굴러가는구나
樹木何蕭瑟 (수목하소슬) 수목들은 어찌 이리도 쓸쓸한지
北風聲正悲 (북풍성정비) 북풍 소리가 실로 구슬프구나
熊羆對我蹲 (웅비대아준) 큰 곰은 나를 보고 웅쿠리고
虎豹夾路啼 (호표협로제) 호랑이는 좁은 길에서 울부짖네
溪谷少人民 (계곡소인민) 골짜기엔 사람이 드문데
雪落何霏霏 (설락하비비) 눈은 어찌 이리도 펄펄 날리는지
延頸長嘆息 (연경장탄식) 목을 늘이면 긴 탄식이 나오는데
遠行多所懷 (원행다소회) 멀고 먼 길 소회가 많네
我心何怫郁 (아심하불욱) 내 마음 어찌 이리도 울적한지
思欲一東歸 (사욕일동귀) 마음은 오로지 동으로 가고 싶구나
水深橋梁絕 (수심교량절) 물은 깊은데 다리는 끊어져
中路正徘徊 (중로정배회) 길 가운데서 오락가락하네 
迷惑失舊路 (미혹실구로) 미혹하여 지나온 길을 잃어버렸는데
薄暮無宿棲 (박모무숙서) 날은 저물어 묵을 곳이 없구나
行行日已遠 (행행일이원) 걷고 또 걷는데 해는 이미 기울고
人馬同時飢 (인마동시기) 사람과 말이 모두 배가 고프구나
擔囊行取薪 (담낭행취신) 보따리를 진 채 다니면서 땔나무를 줍고
斧冰持作糜 (부빙지작미) 도끼로 얼음 쪼개어 죽을 끓이네
悲彼東山詩 (비피동산시) 슬픈 저 동산의 시가
悠悠令我哀 (유유령아애) 걱정 또 걱정으로 나를 슬프게 만드네

                                                <조조(曹操; 155년-220년>


람이 뜻을 세우면 ‘고행(苦行)’을 각오해야 한다. ‘고행’은 불교용어로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 산스크리트어 ‘tapas’을 의역(意譯)한 것으로서, ‘tapas’의 원래 의미는 ‘열기’ 또는 ‘열정’이었다. 힌두교 경전 베다가 말하는 고행은 ‘육체의 금욕’과 함께 이루어지며, 고행의 실천은 해탈(解脫)을 위해 신체를 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바, 단식이나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는 요가 등의 수행과 결합했다. 그게 힌두교나 불교 밖으로도 전파되어 일반적으로는 뭔가 하고자 하는 열기와 열정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행을 아무나 하나? 아무리 큰 뜻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칠 때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고통과 고뇌를 겪어야 하나?”라는 한탄이 터져 나올 때가 많다. 그런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가슴 속에 품었던 ‘열기’가 식어버리는 것은 물론 극심한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신의 아들’ 예수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sabachthani?;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는 이야기가 마가복음 15장 34절에 전한다. 또 지금의 고행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도 고행을 중단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하루에 삼씨 한 알과 보리 한 알만을 먹는 등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행을 실천했던 석가모니 또한 그런 극심한 자기학대 고행이 해탈에 이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제자들에게 고행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조의 초상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환관의 후손으로 태어나 적수공권으로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함으로써 훗날의 위(魏)나라 건국의 토대를 구축했던 당대의 영웅 조조(曹操; 155년-220년)도 고행으로 인한 극심한 고뇌에 시달렸던 것 같다. 주변으로부터 간웅(奸雄) 또는 효웅(梟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물론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암살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칼을 쥐고 자면서 ‘몽중살인(夢中殺人)’까지 해야 했던 그는 군웅들이 한 황실 재건을 외치며 덤벼들 때마다 홀로 맞서서 물리쳐야 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袁紹)를 격파한 직후인 건안 11년(서기 206년) 원소를 구하기 위해 거병한 원소의 생질 고간(高幹)을 격파하기 위해 출병했을 때 썼다는 ‘고한행(苦寒行)’을 보면 조조의 고뇌와 번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고독감,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태항산 골짜기에서 겪는 추위와 배고픔....오죽하면 “我心何怫郁(내 마음 어찌 이리도 울적한지) 思欲一東歸(마음은 오로지 동으로 가고 싶구나)”하고 말머리를 돌리고 싶어 했을까? 그러나 말머리를 돌리면 그 즉시 자신의 웅대한 포부도 끝장, 조조는 이를 악물고 태항산을 넘어 고간군을 격파했다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는 전한다. 동쪽으로는 화북평야와 서쪽으로는 산서고원 사이에 위치한 태항산맥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400km에 걸쳐 뻗어 있고 평균 해발은 1,500m에서 2,000m 정도, 산세가 험해 요즘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도 불린다. 산시성(山西省)이나 산둥성(山東省)이라는 지명은 이 태항산의 서쪽과 동쪽에 있다고 해서 생겨났다.

조조가 만난(萬難)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겠지만 대장부로서의 포부와 불굴의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주지하다시피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게 대패하고도 기가 꺾이기는커녕 군세를 정비하여 재기할 정도로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였다. 또 인재를 선발하고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한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평했었다. 시쳇말로 말하자면 그 만큼 통이 컸다는 이야기다. 근대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은 “조조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뒤에 올 시대를 개척한 영웅이며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이었다”며 자신의 마음 속 깊이 감복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토대를 닦은 모택동(毛澤東)은 “조조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조조를 공식적으로 복권시키기도 했다. 또 당대 최고 시인들 중의 하나로 꼽혔던 조조는 두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과 함께 ‘건안삼조(建安三曹)’로 불렸던 바, 그가 지은 시편들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 중 조조의 웅지를 담은 ‘구수수(龜雖壽)’를 참고로 적어둔다. 

神龜雖壽 (신구수수) 신령한 거북이가 비록 오래 산다고 해도
猶有竟時 (유유경시) 언젠가는 죽는 때가 있다.
謄蛇乘霧 (등사승무) 이무기가 안개를 탄다 해도
終爲土灰 (종위토회) 끝내는 흙먼지가 된다.
老驥伏櫪 (로기복력) 늙은 준마는 구유에 엎드려 있으나
志在千里 (지재천리) 뜻은 천리 먼 곳에 있다.
烈士暮年 (열사모년) 강하고 곧은 선비는 만년에 들어서도
壯心不已 (장심불이) 웅대한 포부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盈縮之期 (영축지기) 흥망성쇠의 때는 
不但在天 (불단재천) 하늘의 뜻에만 있지 않도다
養怡之福 (양이지복) 복 받은 기쁨을 키워 나가야 
可得永年 (가득영년) 영원함을 얻을 수 있네
幸甚至哉 (행심지재) 운이 다해 어려움이 닥쳐도
歌以詠志 (가이영지) 노래를 불러 뜻을 기리리라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 - 생명 아닌 생철학 예찬

땅거죽을 뚫고 나온 나무 뿌리.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행문사, 1947), 유치환(柳致環: 1908∼1967)>


명(生命)의 생(生)은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여린 싹의 모양을 그린 것이고 명(命)은 말하고 먹는 구멍 구(口)와 하여금 령(令)이 합쳐진 것, '생'은 이 땅 위에 나와 사는 것 또는 살아 있는 것이고 '명'은 말하고 먹는 것이 내리는 령(지시), 그러므로 생명은 이 땅 위에 나와 말하고 먹으면서 삶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뜻하는 영어 ‘life’의 어원도 생명과 비슷하지만 말맛이 약간 다르다. ‘life’는 ‘몸’ 또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는 고대 노르웨이어 ‘lif’로서 ‘살아 있는 존재’를 강조하는 느낌을 준다. 

인간의 삶을 이성으로만 따져서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philosophy of life)’이라는 것도 생겨났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등에 의해 토대가 다져진 생철학은 세상만사를 이성으로만 설명하는 합리주의 철학에 반발하여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했었다. 모든 철학의 화두가 ‘어떻게 사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만큼 서로 다른 철학이라고 해봤자 오십보백보이겠지만 합리주의 계열의 철학들이 지나치게 사변적(思辨的)이어서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등한시한 반면 생철학은 살아 쉼 쉬는 것들의 삶 자체를 직시했었다. 저 유명한 선언적 어록 "생을 생 그 자체로부터 이해한다(Das Leben aus ihm selber verstehen)"라는 말을 남긴 딜타이는 "생만이 모든 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 존재를 단지 표상(表象)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의욕(意欲)을 갖고 정감(情感)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인간 정신구조는 어떤 대상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표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으나, 그런 기초 위에는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의욕이 있으며, 그리고 그 의욕 위에는 가치를 평가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반도의 현대문학사에 ‘생명파’라는 명함을 뿌렸던 사람들이 정말 생명 그 자체를 고귀하게 여겼을까? 아니다. 생명파는 1936년에 발간된 시 동인지 ‘생명부락(生命部落)’에 참여했던 서정주(徐廷柱), 유치환(柳致環), 오장환(吳章煥), 함형수(咸亨洙), 김달진(金達鎭), 김상원(金相瑗), 김동리(金東里), 윤곤강(尹昆崗), 신석초(申石艸) 등등을 일컫지만 시인부락이 통권 2호로 종간된 데서 보듯 이렇다 할 실적도 없었고 그들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면 생명을 노래했다기보다는 생철학으로 포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이 주제가 아니라 소재였다는 말이다. 더욱이 ‘시인부락’ 1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던 서정주(徐廷柱)가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조선인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죽음을 찬미하는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를 발표하고 1980년대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전두환에게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바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생명파’라는 이름을 지워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폄훼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생명파’라는 이름을 잘못 붙여줬다는 말이다. 

청년시절의 유치환(사진 왼쪽)과 1955년 간행된 시집 '생명의 서' 재판본
후대 평론가들이 ‘시인부락’ 참여 시인들에게 ‘생명파’라는 명찰을 만들어 붙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유치환 (1908∼1967)의 작품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도 생철학의 주장을 운율로 풀어쓴 것 말고는 돋보이는 게 없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는 이성(나의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회의나 삶의 애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생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고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라는 대목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고독을 짧게 간추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생철학을 예찬하는 작품 전편이 생철학자들이 싫어했던 사변(思辨)으로 도배질되어 있는 점도 눈에 거슬린다. 유치환 또한 서정주와 마찬가지로 생명보다는 이념에 흔들려 해방 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 등을 지내면서 민족문학 운동에 앞장섰는가 하면 6·25 때에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순수(純粹)하다. 시의 본질 또한 순수한 감동을 추구하는 데 있는 바, 시를 읽을 때도 포장을 벗기고 순수한 알맹이를 봐야 한다. 붕어 성분이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풀빵을 붕어빵으로 부르는 항간의 관행을 문학에서도 통용시킨다면 붕어빵 독자가 웃는다.

2017년 2월 9일 목요일

청산(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 '~라고 전해라'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청산(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실천문학사, 1982), 양성우(梁性佑): 1943 ~ >


행가(流行歌)는 “특정 시기 대중의 인기를 얻어서 많은 사람이 듣고 부르는 노래”, 당대 대중의 감성을 반영한 것이기에 비슷비슷한 게 많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종종 표절시비가 벌어지곤 한다. 무명가수 이애란을 단번에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 ‘백세인생’도 가사가 일본의 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작자·연대 미상의 가담항설(街談巷說) ‘인생은 산과 고개가 많은 여행의 길-장수의 마음가짐(人生は 山坂多い旅の道-長寿の心得)’과 비슷하다는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애란의 노래는 김종완이라는 작곡가가 1995년 작곡한 것으로서, “20년 전 친구의 아버지가 50대에 돌아가시자 자식들이 애타게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고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가사를 썼다”고 전해지는데, 원래 제목은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말하리'였으나 몇 번의 편곡과 개사과정을 거쳐 2013년 '백세인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표절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은 “나이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라고 전해라'라고 읊는 프레임이 똑 같고 이유 역시 너무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눈을 흘겼었다. 

기실 '~라고 전해라'라는 어법의 원조가 ‘장수의 마음가짐’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관용적으로 사용돼온 어법들 중의 하나다. 대면하여 하찮은 말이나 얼굴 붉히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꺼렸던 조선의 양반들도 아랫것들을 사이에 두고 “∽라고 여쭤라”라는 소통하는 것을 품위 있다고 여겼었고, 그렇듯 매개자(媒介者)를 두고 대화하면 상대방과의 심정적인 거리감이 확보되어 불필요한 흥분을 제어하는 효과도 있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양새지만 매개자가 없을 경우에도 대화 당사자들끼리 “∽라고 여쭤라”라는 어법을 고수함으로써 말을 직접 주고받을 때 발생할지도 모를 감정의 동요를 예방하곤 했었다. 요즘 사람들도 직접 대면하기 싫을 때나 주고받는 말로 감정의 동요가 예상될 때 문자 메시지 등을 매개로 이용하는 것을 본다. 

양성우 시집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전라남도 함평 출신 시인 양성우 (梁性佑: 1943 ~ )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던 1977년 일본문예지 ‘세계(世界)’에 ‘노예수첩’을 발표하여 국가모독 및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됐을 때 썼다는 ‘청산(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이야말로 ‘~라고 전해라’는 관용 어법의 묘미를 한껏 살린 작품인 것 같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 및 문인 101인 선언에 참여했고 1975년 광주 YMCA에서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겨울 공화국’을 낭송했다가 광주 중앙여고 교사직에서 파면된 데 이어 ‘노예수첩’ 필화 사건으로 투옥까지 당했던 양성우의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절망과 한이 절절이 묻어난다. ‘~라고 전해라’는 어법으로 인해 더욱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래선지 1980년대 초 동명의 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의식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파됐고 최병선 등이 곡을 붙여 노래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청산’은 양성우가 꿈꿨던 이상향, 청산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품일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꽃이 만개한 대한민국일수도 있는 바, 그런 이상향을 보지 못하고 죽음의 큰 강을 건너야 하는 자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심정을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표출하고 있음을 본다.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는 말을 반복한 것도 그 만큼 절망과 체념을 반복했다는 토로로 읽혀진다. 

그러나 양성우는 ‘큰 강’을 완전히 건너지는 않은 채 시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 양천구 갑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1997년 11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대신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속된 말로 신발을 바꿔 신는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에 임명됐었다.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가던 시인이 정치를 하면서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어 노선을 바꿨는지 모르겠으나, 시인으로서의 신념과 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십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당대의 저항시인이 기득권 정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 양성우가 그 양성우 맞아?”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항시인 양성우가 정치인 양성우를 소리쳐 부를 때 '~라고 전해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2017년 2월 5일 일요일

정든 유곽에서 - 일부러 어렵게 쓴 시 쉽게 읽기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잡이 들었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1977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 이성복(李晟馥); 1952년- >


세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국어사전에서 ‘난세’를 찾아보면 한자어 ‘亂世’를 병기해놓고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를 빼고 ‘살기 힘든 세상’을 말할 때는 ‘난세(難世)’가 더 적확하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亂世’와 ‘難世’를 섞어 쓴다. 한자 어려울 난(難)은 진흙 근(堇)에 꽁지 짧은 새 추(隹)가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진흙에 빠진 새는 헤쳐 나오기 힘들어서 ‘힘들다’ ‘어렵다’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반면 영어 ‘difficult’의 뿌리는 ‘쉬운’을 뜻하는 ‘facilis’ 앞에 부정(否定)을 뜻하는 접두사 ‘dis-’가 붙어 만들어진 라틴어 ‘difficilis’로서 ‘難’보다는 어렵지 않다. 미국인들은 ‘어렵다’라고 표현할 때 발음하기 어려운(?) ‘difficult’보다는 ‘hard’를 더 많이 사용하는데, ‘hard’의 뿌리는 ‘지나친’ ‘매우’ 등을 뜻하는 고대 고지독어 ‘harto’로서, 상식보다 지나치면 ‘어려워진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게 이 세상의 삶, 그 때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 땐 참 살기 힘들었다”고 이마에 주름살을 잡았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었고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었던 바, 당대(當代)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살기 힘든 세상’은 당대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왜?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니까. 또 난세일수록 ‘유곽(遊廓)’이 번창한다. 난세에 혼자 힘으로 벌어먹기 살기 어려운 여자들이 섹스를 팔고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매일 전투를 치러야 하는 남자들이 쌓이고 쌓이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섹스를 산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웅변한다.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가운데 전사한 남편과 오빠 대신 생계를 떠안은 여자들이 서울의 역전 언저리로 모여들어 거대한 유곽을 형성했다는 것을 나이 먹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안다. 청량리역 옆 588, 서울역 앞 양동, 용산역 앞 쪽방촌, 영등포역 골목 홍등가....티켓다방, 퇴폐 이발소, 안마시술소, 러브호텔....먹고살만해진 지금 성매매 특별법이 어쩌고저쩌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일 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곽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98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난세에는 시인들도 시를 어렵게 쓰는 것 같다. 시인들에게 있어서의 난세는 전쟁이나 사회적 갈등이나 가난 따위로 인한 난세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을 때가 난세, 경상북도 상주 출신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년- )이 서울대 불문과 재학시절 쓴 것으로 추측되는 ‘정든 유곽에서’를 보면 일부러 어렵게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넋두리 같기도 하다.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해 횡설수설 아무 이미지들이나 짜 맞추려는 이미지스트 같기도 하고. 당시 그의 난해시에 대해 평론가들은 “별종이어서 ‘관습 평단’의 기대를 무너뜨렸다”느니 “그에 대한 마땅한 비평적 척도가 없다”는 등 매우 난해한(?) 평으로 일관했지만, 아버지 세대 사람들이 “그 때는 참 살기 힘들었다”는 아버지 말을 쉽게 이해하듯이, 이성복 세대는 의외로 이성복의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10월 유신의 ‘유’자만 비난해도 붙잡아 가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에, 먹고살기 위해서는 죽는 것 말고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두 눈 번득이는 사람들이 즐비했던 난세(難世)에, 시인이 쓸 수 있는 것이라곤 난해한 ‘넋두리’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왜? 그 때엔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피차 서로 좋지 않았을 거니까. 그런 ‘넋두리’를 논리적으로 풀어 이름값을 하려고 덤벼들었던 당시의 평론가들이 되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지금까지 계명대 강단에 서온 덕분에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이성복의 근작시들이 예전과는 달리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난해시를 감상할 때 자구(字句) 하나하나 뜻을 새겨가며 읽으려고 덤벼드는 것은 암호문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 세상을 참 어렵게 산다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시에 관해서는 해석이 어려울수록 쉽게 접근해야 하고 해석이 쉬울수록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성복이 시를 일부러 어렵게 썼던 것은 세상만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흑백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구 하나하나가 아닌 시 전체의 이미지로 사회의 부조리를 까발리고, 굴종을 강요하는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기 위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예시하면서, 나름대로의 다양성을 모색하지 않았나 싶다. 이성복보다 50여년 먼저 태어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의 조선사회에서 숨쉴 구멍을 찾기 위해 난해시를 썼던 시인 이상(李箱)과도 닮았다. 이상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너무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쳐 중단했다는 ‘오감도’(烏瞰圖)를 다시 읽어보면 오늘 다시 읽어보면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들듯이 이성복의 시 또한 먼 훗날 다시 읽어보면 쉽게 읽힐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왜? 세상은 날이 갈수록 난세(難世)로 변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