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음주간모란 - 백화제방 호시절, 노인네의 시름

아파트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모란. 꽃 그늘 아래 벤치에 유우석이 앉았다가 갔는지 떨어진 꽃이파리들이 '춘수'의 편린들처럼 보인다.


飮酒看牡丹(음주간모란) 


今日花前飮(금일화전음) 오늘은 꽃 앞에서 술을 마신다 

甘心醉數杯(감심취수배) 여러 잔에 취해 마음도 알딸딸한데 

但愁花有語(단수화유어) 꽃이 하는 말이 시름에 겹네 

不爲老人開(불위노인개) 늙은이를 위해 핀 건 아니라고?!   <劉禹錫; 772년-842년> 


화제방(百花齊放), 아파트 정원의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야흐로 춘삼월 호시절, 그러나 시절이 좋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은 건 아닌 게 세상살이인 것을 어찌 하리.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경로당 단체관광에도 끼지 못하고, 오나가나 짐이 되어 멀리 있는 아들 딸네 집에 놀러가지도 못하고, 그저 노인 아파트 정원 벤치에 앉아 분수대 주변의 철딱서니 없는 수선화들이 까르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는 꼴이나 바라보는 노인네들에게 있어서 춘삼월 호시절(好時節)은 되레 서글픈 ‘오시절(惡時節)’일 수도 있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그 좋은 청춘 다 까먹고 이빨도 흔들흔들 두 눈은 침침한데...젊었을 적에는 자신이 꽃을 희롱했건만 늙어서는 꽃이 자신을 희롱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만 길게 내쉴 수밖에. 

9988234, 흔히 노인네들이 모이면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만에 4[死]하자”고 떠들어대지만 그 역시 말 그대로 소망일 뿐 속으로는 “건강에 관해 말하자면 40대에는 해가 바뀔 때마다 나빠지고, 50대에는 달이 바뀔 때마다 나빠지고, 60대에는 아침저녁으로 나빠지지만, 70대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더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자꾸만 곱씹는다. 늙으면 공연히 우울해지고 심통이 자주 폭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한국서 속칭 ‘아스팔트 우파’ 노인네들이 가스통 짊어지고 다니면서 악을 써대고, 교수 출신 김 아무개나 언론인 출신 조 아무개 등 그 때 그 시절 이름 날리던 ‘꼰대’들이 매우 자극적이고 삐딱한 발언을 하여 언론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자기중심적인 노인네들의 지저분한 탄로가(歎老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들 또한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몸이 늙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늙는 건 아니다. 노인들 또한 본능적인 욕구 충족을 추구한다. 실제로 한국의 한 단체는 “지난해 5~12월 사이 서울 · 인천 · 청주의 노인 성(性)상담실에서 실시한 50~70대 연령층 상담 853건을 분석한 결과 ‘성기능 저하’가 34%로 최다를 기록했다”고 발표했었다. 부부 간 성 갈등(27%), 이성교제(11%), 성충동(6%) 등도 젊은 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지하철·버스 등에서 성추행을 한 뒤 가책을 느끼고 상담을 해오거나, 가짜 비아그라를 구입했다가 피해를 본 뒤 하소연할 곳을 못 찾아 상담을 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종로 파고다 공원이나 관악산 등지서 ‘바카스 아줌마’들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성병에 걸린 노인들도 부지기수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 세상의 젊은 것들은 그런 ‘공공연한 비밀’을 노인네의 주책쯤으로 간주하여 조롱하고 비웃기에 노인들은 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상해고적'에서 펴낸 유우석 전집 표지
당나라 중기의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도 말년에 주책(?)이 좀 심했던 것 같다. 솔직담백한 성격 탓이었는지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처럼 ‘늙음’ 그 자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탄하기보다는 노인네들의 본능적 욕구충족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음주간모란(飮酒看牡丹)’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다. 여기서의 ‘꽃’은 진짜 꽃이 아니라 ‘해어화(解語花), 말을 할 줄 아는 꽃 즉 기생을 말한다. 좋은 시절을 맞아 기생을 불러 술 한 잔 알딸딸하게 걸치고 나서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수작을 걸어봤으나, 不爲老人開(불위노인개), 그 꽃 같은 기생이 “망측하게 주책 부리지 말고 술이나 마셔라, 난 노인네하고 연애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쌀쌀맞게 눈을 흘기더라는 이야기다. 유우석은 그걸 ‘수(愁)’라고 표현했다. 이른 바 춘수(春愁)다. ‘愁’는 가을 추(秋)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원래는 “모든 게 얼어붙는 겨울을 앞두고 무엇을 먹고 살아야할지 걱정하는 것”을 뜻했으나, 가을을 인생의 노년에 비유한다면 겨울은 죽음을 뜻하는 바,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들의 시름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음주간모란’은 젊은이들이 읽기엔 유머러스하겠지만 노인들이 읽기엔 씁쓸하고 처량하고 서글픈 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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