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3일 목요일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음울한 현실 속의 노란 열망

함형수가 시작 활동을 했던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 거리 풍경.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 함형수(咸亨洙); 1914∼1946> 

합성(光合成)으로 생장 에너지를 생산하는 식물은 빛을 향해 굽는 굴광성(屈光性)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해바라기 꽃이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해바라기는 국화과(菊花科)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서, 줄기가 최대 4~8m까지 자라고 무려 1,000여개의 씨를 맺는 꽃 크기도 매우 커서 지름이 60cm를 넘기도 하는 바, 그 만큼 많은 햇빛을 필요로 하기에 늘 해를 향한다. ‘sunflower’, ‘해바라기’, ‘향일화(向日花)’, ‘향일규(向日葵)’ 등등의 이름이 붙은 것도 그와 무관치 않거니와 관련 전설도 많다. 예쁜 목소리와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물의 요정 크리티가 황금마차를 타고 다니는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반한 나머지 날마다 아폴론을 바라보면서 한번만이라도 눈길을 주기를 고대했지만, 아폴론은 매번 그대로 지나쳤고, 한 자리에 서서 아폴론만 바라보던 크리티의 다리는 뿌리가 되어 땅 속 깊숙이 박히고 몸은 녹색 줄기가 되고 귀여운 얼굴은 아폴론처럼 둥글고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고흐의 해바라기(188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해바라기가 유럽에 전해진 건 16세기 초, 당시 중남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던 스페인 탐험가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멕시코의 아즈테크족과 남아메리카 잉카족이 해바라기 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줄기와 뿌리를 약으로 쓰는 것을 보고 씨를 유럽으로 들여왔던 바, 기름 생산 등을 위한 경제작물로 각광을 받다가 차츰 관상용으로도 널리 퍼지게 됐다. 특히 단식 기간 중 해바라기 기름 식용이나 사용이 허용됐던 러시아 정교회 지역에서는 재배면적이 급격히 확산되어 우크라이나에선 국화(國花)로까지 선정됐고, 기독교도들은 일편단심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를 오로지 진리의 빛을 추구하는 영성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19세기 탐미주의자들은 해바라기의 강렬한 색조에 주목하여 그들의 상징물로 삼기도 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가 저 유명한 해바라기 시리즈를 작품화한 것도 그 즈음이었는데, 정신질환으로 자살을 감행하기 전 10년 동안 무려 9백여 점의 작품과 1100여 점의 습작을 미친 듯이 그렸던 고흐는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들의 색조가 자신의 우울증에 비례하여 어둡게 변해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1936년 서정주(徐廷柱)의 주도로 창간된 문예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에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을 발표했던 시인 함형수(咸亨洙; 1914∼1946)는 고흐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고흐에 관해 얼마나 알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관한 상세한 자료나 증언은 없으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시작에 매달리다가 세상을 뜬 그의 삶이 고흐의 삶과 닮았고, 그의 대표작으로 남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의 부제가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고 붙은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눈도 비슷하다. 가난과 고독과 질병 속에서 정열과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노란 해바라기에 집착했던 고흐나 자신의 무덤에 ‘차거운 비(碑)ㅅ돌’ 대신 ‘태양같이 화려하고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했던 함형수에게 있어서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만 볼 뿐 정작 가까이 다가가거나 품지는 못하는 해 바라기”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최근 들어 함형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1914년 한반도 맨 꼭대기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정신착란증으로 고생하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북한서 사망한 함형수가 한국 시단(詩壇)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1935년 동아일보에 ‘마음의 단편’을 발표하고 1936년 서정주 등과 함께 동인지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죽을 때까지 남긴 작품이 17편에 불과하고 그 나마 습작 수준이어서 나름대로의 시세계(詩世界)를 구축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품들 또한 뛰어난 시재(詩才)를 꽃 피우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더 많이 읽혀지고 있음을 본다. 대표작 ‘해바라기의 비명(碑銘)’도 미완성의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는 해바라기와 보리의 파종 시기가 달라 노란 해바라기 사이로 보리밭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까지 동시에 목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토착 정서의 배반을 시적 자유로 너그러이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적 자유의 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 이미지 조합을 위해 시 이해의 밑바탕인 토착 정서를 배반했다는 데서 오는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는 바, 왠지 잔손질을 끝내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이 읽혀진다. 

함형수가 시작(詩作)에 눈 떴던 1930년대는 한반도에 서구 모더니즘의 물결이 막 밀려오던 시절, 모더니즘에 심취한 시인들은 감상적인 언어의 구사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한 정확한 묘사와 공감각적 이미지 환기를 중시했던 바, 함형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에서도 이미지의 배합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차거운 비(碑)ㅅ돌’의 촉각(觸覺), ‘노오란 해바라기’의 시각(視覺),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의 청각(聽覺) 등을 자극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함형수의 뛰어난 테크닉은 또 다른 작품 ‘교상(橋上)의 소녀(少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못견디듯미풍(微風)에하느적거리든실버들가지. 
달콤한초조(焦燥)에떨며소녀(少女)는분홍(粉紅)빛양산(陽傘)을쉴새없이돌렸다 
그러나다리아래의흐르는물이그급(急)한소년(少年)의걸음보다도쉬지않는것을소녀(少女)는몰랐다           
 <‘교상(橋上)의 소녀(少女)’ 전문> 

‘미풍에 하느적거리는 실버들 가지’ ‘분홍빛 양산’ ‘다리 아래 흐르는 물’ 등 감각적 이미지의 나열로 구체적인 장면을 실감나게 연출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해바라기의 비명(碑銘)’과 꼭 닮았다. 함형수가 좀 더 오래 생존하여 시작(詩作)을 계속했다면 그런 이미지 환기 기법이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 과작(寡作)에도 불구하고 함형수의 시들이 주목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일 터, 그가 미완(未完)의 대기(大器)로 남은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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