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아일랜드 북쪽 철망 사이로 바라다보이는 별장촌 풍경. 예나 지금이나 현실의 삶이 정신을 옭아매고 있다고 느껴질 때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라라. |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리라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무성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지만 어찌 한탄하고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랴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이미 지나간 일은 말해봤자 소용없는 것을 깨달았으매 앞으로 다가오는 일은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실로 잘못 들어선 길이 그리 멀어지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 잡으리라 각성한다
舟遙遙以輕颺 風飄飄而吹衣(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표표히 불어 옷자락을 날리네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미)
길 지나는 사람에게 앞으로 갈 길을 묻노라니 희미한 새벽빛이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載欣載奔(내첨형우 재흔재분)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집, 기쁜 마음 분주한 발걸음
僮僕歡迎 稚子候門(동복환영 치자후문)
반가이 맞이하는 어린 하인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어린 아들
三徑就荒 松菊猶存(삼경취황 송국유존)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 우거졌어도 소나무와 국화는 예전 그대로 남아 있네
携幼入室 有酒盈樽(휴유입실 유주영준)
어린 아들 손잡고 실내로 들어서니 술이 술통에 가득 차 있네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술병과 술잔 끌어당겨 자작하면서 뜰의 나뭇가지 지긋이 바라보니 미소가 머금어지는구나
倚南窗以寄傲 審容膝之易安(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남쪽 창에 제멋대로 기대니 몸이 편안해지는 자세를 찾게 되네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정취가 있고 문은 있으되 늘 닫혀 있네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책부노이류게 시교수이하관)
지팡이 짚고 다니다가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 들어 먼 곳 바라보네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구름은 무심하게 산꼭대기서 피어오르고 날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오네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데 우뚝 선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어 보네 ............(이하 생략)
<도잠(陶潛); 365년-427년>
마음이 육신을 움직이나? 육신이 마음을 움직이나? 대부분 마음 가는 대로 육신을 움직이고 싶어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 험난하고 치사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선 육신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좇는 경우가 더 많다. 그걸 ‘형역’(形役)이라고 한다. ‘걷다’라는 의미의 조금 걸을 척(彳)에 몽둥이 수(殳)가 붙은 ‘役’의 원래 의미는 ‘부리다’ ‘시키다’, ‘형역’은 부리는 대로 모양새를 만드는 것을 뜻하는데, ‘심위형역(心爲形役)’의 준말로서, 부림을 당하는 대로 마음의 모양새를 만드는 것 즉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삼는다는 의미다. 시쳇말로 말하자면 ‘마음고생’이다.
부모에게 재산 물려받은 것 없고 오락가락하는 권세 끄나풀 하나 못 쥐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선 ‘마음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이름은 잠(潛)이지만 연명(淵明)이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년-427년)도 먹고 살기 위해 꽤나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동진 초기 군벌 도간(陶侃)의 증손이라고는 하나 몰락한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았고, 시문이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리로만 전전하면서 중앙 정계엔 진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존심만 강해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내몽고출판사에서 펴낸 '도연명집'(왼쪽)과 후대에 그려진 도연명 초상 |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나온 것도 도연명의 마음고생 탓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도연명이 41세 때 팽택(彭澤) 현령 자리를 얻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던 중 의관을 정제하고 군(郡)의 독우(督郵; 순찰관)을 맞이하는 게 싫어서 “그까짓 오두미(五斗米; 급여)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고 사임한 후 ‘귀거래사’를 썼다는 이야기가 송서(宋書) 은일전(隱逸傳)에 전한다. 이후 심양의 전원에 파묻혀 은일(隱逸)의 선비로 처세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했으나 만년이 편안하지도 않았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불타 일가를 거느리고 심양 남쪽 근교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죽을 때까지 빈한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흔히 지금도 정부 고위관리들이 자리를 물러나면서 이임사 대신 ‘귀거래사’를 읊조리지만 도연명이 은둔이 좋아서 은둔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지레짐작이라는 핀잔을 들어 마땅하다. 까놓고 말하자면 대부분의 고위관리들이 정권이 바뀌거나 임면권자가 사표를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듯이, 도연명 또한 ‘심위형역(心爲形役)’을 견디다 못해 전원으로 돌아갔다는 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걸 도외시하면 ‘귀거래사’의 감동 또한 반감되고 만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원이 무성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田園將蕪胡不歸)”라는 구절을 들어 도연명이 농사나 지어먹고 살기 위해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 뒷부분에 나오는 “농부가 내게 봄이 왔음을 알리니(農人告余以春及)”라는 대목에서 보듯 도연명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 바, ‘심위형역’이 싫어 몸과 마음을 전원에 파묻은 채 자연(自然)을 즐긴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결어(結語)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연을 ‘이제 다 끝났구나(已矣乎)’라는 탄식으로 시작하여 ‘변하는 대로 그럭저럭 살다가 죽으면 그만(聊乘化以歸盡)/ 대저 천명이라는 것을 즐겼거늘 다시 어찌 의심하리(樂夫天命復奚疑)’로 끝낸 것도 그 같은 심정을 잘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 ‘심위형역’을 끝내고 자연으로 귀의했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위에서 ‘이하생략’된 나머지 부분을 써 둔다.
歸去來兮(귀거래혜)
請息交以絶遊(청식교이절유)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或命巾車(혹명건차) 或棹孤舟(혹도고주)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已矣乎(이의호)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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