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8일 화요일

꽃나무-주관과 객관 사이의 인지부조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 찰스 강변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톨릭 청년 2호, 1933.7, 이상(李箱: 1910~1937)>

간이 스트레스 및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속이면서 대체하는 양식을 ‘방어 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성격발달 수준이나 불안 정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킨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중 하나가 투사(投射, Projection)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나 갈등의 원인이 자신 내부에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치 자신 외부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선거인단 확보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유효 득표수에서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뒤진 것으로 나타나자 이민자나 민주당원들의 불법 투표 때문일 것이라고 우겼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보기는커녕 모든 게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음모를 꾸민 탓이라고 강변했던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 자신이 못 나서 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치인들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촛불집회니 태극기 집회니 이런 저런 데모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일종의 투사를 한 것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투사를 하는 사람들은 실체보다도 그 실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우선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다.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과 객관적 실체가 다르게 나타날 때 자기 정당화를 통해 양자 사이의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저런 의혹과 추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걸핏하면 ‘위대한 미국’ 또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탄핵에 이어 구속까지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어떠한 경우에도 사익·사심 추구가 없었다”는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것도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사람들이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려면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차이부터 다시 학습해야 한다는 것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주관은 감각하고 의식하고 사고하는 대상에 작용하는 것 즉 의식 그 자체를 말한다. 실천을 강조할 때에는 주체(主體)라고도 하는데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에 의하여 구성되고 주관에 좌우된다”고 여겨 주관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유물론자들은 “주관은 최고도로 조직된 물질 즉 뇌의 작용으로서 객관을 반영·모사(模寫)한다”고 폄하한다. 대상의 객관성과 배치되는 독선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를 '주관적'이라고 비난하는 풍조도 거기서 생겨났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반면 객관은 주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 즉 대상(對象)을 말한다.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작용으로써 만들어진 2차적(二次的)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물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인식 대상이나 실천 대상이 된다”고 반박한다.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종교인이나 자기 믿음이 강한 관념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으로 인식하려고 덤벼들지만 과학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미국사회나 한국사회나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것도 주관과 객관의 충돌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나의 주관을 객관이라고 믿으면서 너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든지, 자신의 주관과 객관적 실체가 불일치할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든지, 내가 수용하기 힘든 갈등이나 불안을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인 이상
서울 출신으로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하다가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한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라면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좀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요양하면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는 이상이야말로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몰라 일본식으로 '리상'이라고 불러 자신의 필명을 '이상'이라고 정했다는 설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거니와, 1934년 자신의 주관으로 쓴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의 객관적인 항의로 중단해야만 했으며, 자신은 결핵을 극복하기 위해 도쿄행을 결행하였으나 얼렁뚱땅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병사할 때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곰곰이 곱씹어봤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주관이 세상 사람들의 ‘주관적인 객관’에 의해 거부당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던 그의 의식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을 터, 시대를 잘못 타고난 시인의 마음고생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1933년 7월 <가톨릭 청년> 2호에 발표한 작품 ‘꽃나무’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로 보인다. 이 작품의 주제는 ‘꽃나무’가 상징하는 객관적 자아와 ‘나’가 대변하는 주관적 자아의 충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는 주관적 인식,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는 자신의 주관과는 차이를 보이는 현실의 객관적 인식, “나는막달아났소”는 그런 현실로부터의 도피,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는 인지부조화의 자각....소위 자의식(自意識)의 분열로 치닫고 있음을 본다. 자신의 주관과 객관의 사이의 고뇌를 콕 찍어내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당대의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그런 주관적인 자의식의 분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너도 나도 남 탓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읽고 또 읽어볼 만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2017년 4월 8일 토요일

여성에 관하여-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페미니즘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 최승자(1952년 ~ )>

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1893년)이 188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을 읽다보면 “도대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하느님은 어디서 자빠져 낮잠을 자고 있느냐”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노르망디 귀족의 딸 잔느는 줄리앙 자작과 결혼하지만 이내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난봉꾼이었던 줄리앙은 잔느의 몸종 로잘리를 건드려 아이를 낳게 하고도 모자라 백작 부인과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또 잔느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정숙한 여인의 귀감으로 여겼던 어머니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남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대해 더 없는 환멸을 느낀다. 외아들 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보지만 폴 마저 창녀와 함께 살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등 잔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모파상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생에 대한 배신감, 솟구치는 비애로 뒤범벅된 그런 작품을 쓴 데 대해 사람들은 “모파상이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던 데다가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주목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모파상이 여성의 일생을 남성의 시각으로만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의 불행조차 ‘남자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파상 자신은 여권의 시장을 위해 그런 작품을 썼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기실은 여자의 일생이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강조한 지독한 성 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일견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려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시각이나 사회적 편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모파상 살아생전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돋보기를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또한 페미니즘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883년 모파상이 한 잡지에 발표한 후 단행본으로 엮어진 게 일본에 소개될 때 ‘여자의 일생’이라고 번역됐고 그걸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베껴 한반도에 소개함으로써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 원제는 ‘Une vie’ 또는 ‘L'Humble Vérité’로서 ‘어떤 인생’ 또는 ‘비천한 진실’이었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비천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나온 후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최승자(1952년~ )에게 물어보면 “가깝고도 멀다”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다. 등단하자마자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던 최승자는 등단 초기 당시 한국사회의 흐름과 맞물려 페미니즘을 시작의 주제로 삼았었다. 지금도 한국문단에서는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라는 이름을 빠짐없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최승자의 페미니즘은 8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바,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즉 남성 우위 사회에 대한 반동적인 페미니즘을 내세울 때 최승자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여성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여성성을 확인하려고 시도했었다. 최승자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작품 ‘여성에 관하여’에도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죽음과 탄생, 죽음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卵子)의 종말, 탄생은 수정되어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태아, 여자의 몸이 삶과 죽음의 발원(發源)이라는 통찰로 여성성의 근원(根源)을 찾고 있음을 본다.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의 모태이자 삶과 죽음의 뿌리라는 것이다.

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최승자의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여성에 관하여’ 사이의 거리는? 역시 가깝고도 먼 것 같다. 남성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관찰했던 모파상은 인간의 삶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껴 자살을 시도한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893년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여성의 눈으로 여성성을 관찰했던 최승자 또한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려오면서 육체적으로는 집과 병원을 오가고 정신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지난 해 자신의 근황을 담은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건재(?)함을 알렸지만 페미니즘은 썰물처럼 빠져나고 그 빈자리를 생에 대한 관조로 채우고 있음을 본다. "나는 죽은 시계/세계가 노자 時 장자 分에 멈춰 있다/장자가 無라면 노자는 虛다/장자가 소설가라면 노자는 시인이다/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인다"('죽은 시계' 전문)라는 작품에서 보듯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페미니즘도 삶의 아픔과 슬픔과 고뇌도 초월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뚜렷이 감지된다. 

'여성' 최승자보다는 '시인' 최승자로 바라보고 싶다. 최승자 또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활동해왔지만 결국은 인간 아무개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그게 여자가 아닌 인간의 ‘비천한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