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일 목요일

견회(遣懷) -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비오는 찰스 리버 사이드에서 강물에 침잠하는 돌덩이들. 흡사 낙백하여 술에 침잠하는 남자들을 보는 듯하다

遣懷(견회)


落魄江湖載酒行(낙백강호재주행)   낙백하여 술이나 싣고 강호를 떠돌다 

楚腰纖細掌中輕(초요섬세장중경)   초나라 미인의 허리 손아귀 안에 가볍네 

十年一覺揚州夢(십년일각양주몽)   십년 양주의 꿈 한번 깨고 보니 

贏得青樓薄倖名(영득청루박행명)   얻은 건 청루에서도 깔보는 이름뿐  <杜牧; 803년∼852년>


설적이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더 많이 말한다. 1921년 경 레코드 음반으로 출시된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희망가’도 그 점을 잘 말해준다. 가사만 보면 ‘희망가’가 아니라 ‘절망가’다.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니/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1910년경 일본서 여학생 12명이 강을 건너다가 사망한 후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영국의 찬송가 곡조에 일본인들이 노랫말을 붙여 만들어졌다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른 이들 또한 내일이 없는 술집 작부들이나 낙백(落魄)한 지식인들이었다. 

‘낙백’이라는 게 뭔가? 동양에서는 인간의 생명력을 육적(肉的)인 것과 영적(靈的)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관념이 있었고, 이때 육적인 생명력을 정(精)이라고 하고 영적인 생명력을 신(神)이라고 했는데, 살아 있을 때는 ‘정’과 ‘신’이 기(氣)에 의해 하나로 합쳐져 있지만 죽으면 기가 흩어지면서 ‘정’과 ‘신’이 따로 따로 분리되는 바, 사람의 몸속에서 빠져나간 육의 생명력을 백(魄)이라고 했고 영의 생명력을 혼(魂)이라고 했다. 또 육의 생명력은 ‘백’은 땅에서 얻어지는 물과 음식에서 활력을 얻고 죽은 후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의 생명력인 ‘혼’은 하늘에서 나오는 대기의 호흡에서 활력을 얻고 죽은 후 하늘로 돌아간다고도 했다. ‘몹시 놀라고 당황하여 혼이 날고 백이 흩어지고’라는 의미의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낙백’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궁한 형편에 처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는 것도 육의 생명력이 취하고자 하는 땅 위의 명예나 권력이나 호사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낙백’은 육체적인 불만족, 그런 육체를 달래는 데는 술과 섹스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은 자고이래의 한량들이 앞 다퉈 증언하리라. 알콜을 섭취하게 되면 뇌와 척수로 구성된 중추신경계의 활동이 억제되어 고뇌와 고통의 감도 또한 무뎌진다는 것은 경험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거니와 섹스가 스트레스를 감소시켜주고 자신감을 향상시켜주는 등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현대의학도 인정하는 바, 낙백한 사람들이 술과 여자를 찾는 것이야말로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영적인 각성, 술과 여자로 육적인 배고픔은 면한다고 하더라도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침몰해 있을 수는 없다는 영적인 배고픔은 어찌 달랠 것인가? 

두목 초상화
강직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정치적 포부 또한 컸으나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신세 또한 불우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회한을 시문(詩文)으로 달랬던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도 한 때는 주색에 푹 빠져 지냈었다. 두목의 가문은 할아버지 두우(杜佑)가 ‘통전(通典)’의 저자로서 이름을 떨친 재상이었고 종형 두종(杜悰)이 헌종 황제의 딸 기양공주에게 장가를 든 덕에 나중에 재상 자리에 오르는 등 명문 중의 명문이었으나 두목은 실명한 동생과 동생의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포부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신당서(新唐書) 두목전을 보면 “동생 의(顗)의 병으로 관직을 버리다”라고 기술돼 있다. 

당나라 당시의 양주(揚州)는 멀리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까지 상인들이 몰려오고 가까이는 인도와 곤륜노(崑崙奴)라고 불린 동남아 사람들 그리고 일본인들과 신라인들이 몰려와 붐비던 동아시아 최대의 환락가였다. 그곳에서 두목은 신라 출신의 거상 장보고(張保皐)를 듣고 자신의 문집 ‘번천문집(樊川文集)’에 기록해두기도 했었다. 양주는 동아시아 최대의 환락가였던 만큼 각지에서 몰려온 미녀들도 그 만큼 많았을 터, ‘초요(楚腰)’는 미인이 많았던 초(楚)나라의 영왕이 가는 허리의 미인을 좋아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고 ‘장중경(掌中輕)’은 한나라 성제 때 가희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조비연(趙飛燕)의 몸 가볍기가 손바닥위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는 고사서 나온 말, 그런 미녀들을 끼고 알딸딸하게 취해 자신의 낙백을 달랬던 두목이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동생 의가 죽고 나서 다시 관직에 나선 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형 두종이 요직을 두루 꿰찰 때마다 시샘과 부러움이 겹쳤을 것이고, 그 때마다 “나도 한번 해보자”고 입술을 깨물면서, 양주에서 허송한 10년 세월을 아까워했기에 그런 시를 지은 후 보낼 견(遣) 품을 회(懷) 견회(遣懷)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닌가 싶다. ‘견회’는 ‘한때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을 풀어 보내다’라는 의미다. 

사나이로 태어나 낙백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랴. 낙백한 나머지 주색잡기에 빠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그래봤자 남는 건 술집 계집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박행(薄倖)한 이름 뿐, 아무개는 팁도 안 주더라, 안주 하나 더 시켰다고 눈을 부릅뜨더라, 요새는 돈 떨어져 긋고 마신다더라...등등 자신의 이름이 그런 천박한 입들의 안주꺼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초라함이란! 영적인 배고픔은 그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기분 잡쳐서 한 잔 세상 꼴 보기 싫어서 한 잔 이 술집 저 색시집이나 전전하는 영혼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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