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춘야희우(春夜喜雨) - 봄비에 젖는 자기연민


매사추세츠 보스톤의 찰스 리버 사이드에 봄비가  내려 활짝 핀 벚꽃을 촉촉하게 적셨다. 봄비에 촉촉하게 젖은 벚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봄이 만개하면 오죽 좋으련만.

春夜喜雨(춘야희우)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을 맞아 내리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밤에 잠입하여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만물을 세세하게 적시면서도 소리가 없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에는 비탈길과 구름이 함께 어두운데

江船火獨明(강선화독명) 강에는 배에서 밝힌 불 홀로 환하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동틀 녘 붉게 젖은 곳 바라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꽃들이 금관성에 만발하였네    <두보; 712년-770년>


기저기서 꽃망울 팍팍 퍽퍽 터지는 소리 들려온다. 신문 독자란이나 칼럼에도 '춘(春)' '새싹'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이....' '그 추웠던 겨울이 가고...' '훈풍' 등등 봄과 관련된 단어들이 제철을 만났다는 듯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지하철 입구 자투리 공원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봄볕 즐기면서 구구구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향해 빵 쪼가리 던져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얼굴에도 윤기가 돈다. 가벼운 발걸음, 부산한 움직임, 부쩍 증가한 소음....태양 주위를 돌면서 자전하는 지구의 축이 약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년 이 때쯤이면 더 많은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이토록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세상의 변화라는 게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간사한 변화로 인한 흥분을 가라앉혀줄 봄비[春雨]라도 촉촉하게 내리면 금상첨화이리라! 

한자 '春'은 풀 초(艸)와 태양 일(日) 그리고 싹(철)이 땅(一)을 뚫고 나오는 형상의 둔(屯)자가 합쳐진 것으로서 풀밭에 태양이 비쳐지는 가운데 싹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그렸다. 영어 'spring' 또한 어원이 '뛰다' '솟다'라는 의미의 고대 노르웨이어 'springa'로서 봄에는 새싹이 솟고 사람들의 몸놀림이 가벼워진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인의 '봄'은 꽤나 자기중심적이고 감성적이다. '봄'은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본다'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 '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닌 객체를 인식하는 것인 바, 봤는데도 인식되지 않을 경우 김소월이 '산유화'에서 읊었듯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비아(非我)의 변화에 그치고 만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는 겨울처럼 암울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꽃피고 새가 우는 봄이 또 오면 세상에 대한 괴리감과 함께 더욱 더 극심한 자기 연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 비 우(雨)는 하늘[一에]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형적인 상형문자로서, 농사로 먹고 살았던 농경문화권에서의 비는 초목을 생장시키는 매우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이자 절기 변화의 전령사, 봄에는 만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감우(甘雨)가 내리고 여름에는 구름[雲]이 천둥[雷]과 번개[電]를 동반한 임우[霖]가 내리고 가을에는 이슬[露서]과 서리[霜]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雪]이 내린다. 그런 우(雨)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는 게 농경문화권 사람들의 습성이었던 바, 비가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겠다. 반면 영어 'rain'은 농경문화권 사람들이 우러러 마지않았던 하늘[一는]과는 무관하게 'water falling in drops condensed from vapor in the atmosphere(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축되어 떨어지는 물)'로서 국지적 기상변화의 일종으로 인식된다. 'rain'의 뿌리는 '비'를 뜻하는 고대 고지 게르만어 'regan'으로서 12세기 이전에도 쓰임새가 보이지만 문학적 소재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로서 농경문화권의 인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후세에 그려진 두보 초상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春夜喜雨(춘야희우)'는 봄날의 자기 연민을 봄비에 촉촉하게 적시면서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전화를 피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떠돌다가 50세 무렵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전원생활을 할 때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로서 금관성(錦官城)은 청두의 옛 이름, 흔히 "희망이 생동하는 봄날 밤비가 내리는 정경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건 껍데기만 봤을 뿐 알맹이는 못 본 것, 두보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만물을 생육하는 봄비에 적셔 위로받고자 했다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 된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의 들길과 구름과 어두움은 암울한 현실, 강물 위의 배가 홀로 밝힌 불은 간절한 희망, 꽃이 만발한 금관성의 안이 아니라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면서 지은 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희우(喜雨)'는 단순히 '기쁜[喜] 비'가 아니라 '슬프고 서러워서 팍팍해진 자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좋은[好] 비'로 해석해야 한다. 첫 구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의 첫 머리를 '喜雨(기쁜 비)' 대신 '좋은 비(好雨)'로 시작한 것도 그런 암시 중의 하나, '시절'은 '봄'을 뜻하기도 하나 '간난을 극복하고 생동하고픈 두보의 불우한 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비이므로 기쁠 희(喜) 대신 좋을 호(好)를 쓴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대기 중의 습기가 많아지면 비가 오는 것은 당연지사이건만 불우한 처지의 자신을 연민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 마련, 그걸 누가 감히 비웃으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실패한 사람들이 두보의 시에 푹 젖어드는 것 또한 감정이입의 탓이 아닌가?! 기쁘고 슬픈 건 계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세상에는 봄이 와서 꽃들이 만발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가슴 속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봄비가 소리 없이 내려줬으면 좋겠다.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단독자(單獨者)의 천형(天刑)

아직은 철이 일러 텅 빈 롱아일랜드 존스 비치의 샤워 기둥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 한 마리.  홀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 외로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1991년, 류시화; 1958년- >


요일 오후 할일 없이 텅 빈 맨해튼 거리를 걷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심정적으로는 저 멀리,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의 텅 빈 하늘을 바라본다. 지난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지기 전 그것들이 다정히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쌍둥이라서 고독하지 않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던 게 생각 나 쓴 웃음을 짓는다. 외로운 사람들이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하다못해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짝을 지어주었건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이야...역시 고독이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독은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꺼이 감내할 수밖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몸과 영혼을 다 바쳐 사랑했던 여인 레기네 올젠과 헤어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기쁨과 감사로써 나의 독자라고 부르는 그 오직 한사람인 사람이여-. 자신의 강화집(講話集) 서문에 떨리는 손으로 그 구절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나갈 정도로 사랑했던 여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여인, 왜 키에르케고르는 올젠과 헤어졌을까? 삶이란 “돌발적인 비약과 질적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불안의 심연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것”이라고 규정했던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불안도 비례해서 증대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듯하다. 올젠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불안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아닌가?!

키에르케고르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인간은 ‘단독자’(der Einzelne), 철학적으로 조명하자면 단독자란 대중이나 다수 집단 등과 상반된 개념이지만 사적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당신과 나 사귐을 전제로 하는 바, 인간은 누구나 홀로 있으면서 홀로 있지 않기를 원한다는 이율배반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올젠 하나만을 죽도록 사랑했듯이 올젠 역시 자기만을 이해하고 자기만을 죽도록 사랑하기를 바랐을 터, 무변광대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두개의 고독(孤獨)이 서로 포옹하는 극적인 사랑 속에는 뭔가 영원성(永遠性)이 있다고 파악했으나, 그 영원성이란 게 연애가 끝남과 동시에 소멸해버리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망함이란! 그 허망함을 맞닥뜨리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불안했고,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던 게 아닌가 싶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표지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 류시화가 1991년에 펴낸 첫 번째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 실린 동명의 작품에서도 천형을 겪는 단독자의 아픔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 시에서의 ‘나’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까지도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흔드는 이’에게서 찾지만 언젠가는 그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절대고독(絶對孤獨),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는 그걸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류시화의 단독자는 그게 사랑이고 삶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류시화가 명상에 심취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고 읊은 것도 그런 절대고독을 운명적인 것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보인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한 것인지 그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진다는 관찰에 동의한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제목 자체가 한편의 정갈한 시, 나머지는 감성과 사유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사족에 불과하다는 느낌도 들고.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보스톤 알스톤의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캠브릿지의 하버드 기숙사 단지를 연결하는 다리. 하버드 재학 중에 만난 연인들이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졸업기념으로 난간의 벽돌을 떼어가기도 한다. 먼 훗날 다시 찾은 이 다리 위에서 '미라보 다리'를 읊조릴는지도 모르겠다.



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른다 
Et nos amours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Faut-il qu'il m'en souvienne                                 나는 기억해야만 하나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                   괴로움 뒤에는 늘 기쁨이 따랐다는 것을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Les mains dans les mains restons face à face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Tandis que sous                                                 그 동안 저 아래서는 
Le pont de nos bras passe                                  우리가 팔짱 끼고 걷는 다리 아래서는 
Des é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매우 느린 물결이 영원의 눈길을 보낸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멀어져간다. 
L'amour s'en va                                                  사랑은 멀어져간다 
Comme la vie est lente                                        삶은 왜 이다지도 느린가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                       희망은 또 왜 이다지도 강렬한가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Ni temps passé                                                  가버린 시간도 
Ni les amours reviennent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1912, Guillaume Apollinaire; 1880년-1918년>

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모든 게 다 흘러간다. 하다못해 노래도 흘러간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작달막하고 예쁘장한 체구에 코맹맹이 음색으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혜은이가 1979년에 불러 크게 히트했던 ‘제3한강교’(길옥윤 작사․작곡)도 어느 덧 왕년의 뽕짝이 돼버리고 말았다. 제3한강교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유사시 서울시민 피난과 경부고속도로를 위해 건설한 한강 위의 3번째 다리, 그러나 본래 목적(?)과는 달리 ‘강남 부동산 투기 다리’ 또는 ‘강남 유흥가 가는 다리’가 돼버렸고, ‘제3한강교’ 또한 당초에는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으나 독재정권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불허하여 그 부분을 뺀 채 검열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제 그 노래를 만든 길옥윤도 저 세상으로 갔고, 평생 늙을 것 같지 않던 혜은이도 초로의 아줌마가 돼버렸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데서 보듯 사람들을 옥죄던 박정희 독재정권도 아픈 역사가 돼버렸다. 싫든 좋든 모두 다 제3한강교 밑의 한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는 점에서 무상함을 금할 수 없다. 

흐른다? 흐름이 뭔가? 흐를 류(流)는 물 수(水)에 양수가 터져 아기의 머리가 나오는 모양을 그린 류(㐬)가 붙은 것으로서 본래는 ‘아이가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다’라는 의미였다고 하는 바, 인간이 본성적으로 ‘흐름’에 친숙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또 ‘흐름’은 중단 없는 영속성(永續性)을 뜻하는 바, 세월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든지 인생을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부평초(浮萍草)에 비유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거니와, 영원히 흐르는 세월의 강물 위에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것을 ‘유전(流轉)’이라고도 했다. 

기욤 아폴리네르
인생유전(人生流轉), 그 흐름을 누구라서 거역할 수 있으랴.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했으나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귀화하여 성장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또한 인생은 유전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짧은 생애 동안 마음 내키는 대로 좌충우돌 살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버지 없이 자라서 그런지 반항적이었고, 젊었을 적엔 포르노 소설을 써서 밥벌이를 했는가 하면(물론 본인은 부인했지만) 명화 ‘모나리자’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후 1917년 기존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한 채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한 부조리극 ‘티레지아의 유방(Les mamelles de Tirésias)을 발표하여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한때 루브르 박물관을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미라보 다리’는 아폴리네르가 27세 때 사랑하던 여인과 이별한 후 현실과 추억 속의 갈등이 교차되는 가운데 옛 사랑을 잊지 못하여 쓴 시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단순한 사랑과 이별의 시는 아니다. 사랑과 이별은 곁가지일 뿐 끊임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내쳐진 한 영혼의 절규가 줄기다. 어떤 불문학자는 첫 번째 연 후반부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를 “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라고 번역했으나 그보다는 “나는 기억해야 하나/ 괴로움 뒤에는 늘 기쁨이 따랐다는 것을”이 옳다. “사랑은 저 멀리 흘러가는데...예전에도 그랬듯이 이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 기쁨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하느냐”는 절규인 것이다. 세 번째 연 후반부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도 마찬가지다. 흔히 “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서생들의 넋두리, “삶은 왜 이다지도 느린가/ 희망은 또 왜 이다지도 강렬한가”라고 감정을 푹 집어넣어 격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멀어져 가는데....이 고통스런 삶의 시간은 왜 이리도 늦게 가는지 그리고 그녀가 돌아설 지도 몰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등등의 희망은 왜 이다지도 강렬한지 모르겠다는 한탄 통탄을 빼놓으면 이 작품은 앙꼬 없는 찐빵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미라보 다리’를 감상할 때는 아폴리네르가 성질 급하고 정열적인 사람들 많은 이탈리아에서 출생했고 기존의 가치와 권위를 깡그리 부인하는 초현실주의자였다는 점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흐름’ 속의 ‘머물음’에 주목해야 한다. 단언컨대 ‘미라보 다리’의 주제는 사랑의 상실과 이별의 아픔이 아니라 그런 상실과 아픔을 세월의 흐름 속에 던져버릴 때의 처절한 체념(諦念)이다. 그것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오기로 절규하면서 수용하는 옹골진 체념, 각 연 말미에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라는 후렴구를 붙여놓은 것도 그런 옹골진 체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게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처럼 흘러가도 자신만큼은 머물겠다던 아폴리네르마저 이제는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무상하기는 하지만.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맨발 - 생(生)의 간난(艱難), 그 슬픈 수오지심(羞惡之心)


뉴욕 로우어 맨해튼 중심부 메디슨 스퀘어 파크에서 한 일용직 노동자가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 오늘도 일감을 찾지 못하고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가리라.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2004년, 창작과 비평, 문태준; 1970년- >

람이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게 삶, ‘사람’ ‘살림살이’ ‘삶’은 모두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됐다.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것을 ‘가난’이라고 한다. '가난'의 어원은 어려울 간(艱) 어려울 난(難) '어렵다'는 의미가 중첩된 한자어 '간난(艱難)', 동음생략으로 앞쪽의 'ㄴ'이 떨어져 나가 가난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집 가(家) 어려울 난(難) '가난'(家難)과 연관이 있다고 우기지만 '家難'은 '집안의 재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난의 동의어로 쓰이는 '빈곤'(貧困)을 들여다보면 가난의 실체가 보인다. 가난할 빈(貧)은 돈(貝)을 쓸 곳은 많은데 아무리 나눠도(分) 여의치 않은 형편을 일컫고, 괴로울 곤(困)은 나무(木)가 울타리(口)에 막혀 답답한 형상, 돈이 없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는 의미다. 영어 'poor'와 'poverty'의 뿌리 역시 '적다' '모자라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auper'다.

누군가 ‘가난은 불편한 것일지언정 수치(羞恥)는 아니다’라고 말했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간이란 게 영(靈)과 육(肉)의 복합체이고, 영은 형이상학적 양식을 먹고 사는 반면 육은 형이하학적 양식을 먹고 산다고 가정하면, 육의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영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바, 그게 지나치면 영과 육이 따로 돌아가면서 감정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 수치(羞恥)라는 말 또한 그 점을 암시해준다. 바칠 수(羞)는 그 옛날 제사 때 희생으로 쓰던 양(羊)과 소[丑]를 합쳐놓은 것이고, 부끄러워할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것으로서 신 또는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 마음으로 바친 양이나 소가 모자라는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제사 때 바친 양이나 소가 육적・물질적인 것이라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영적・정신적인 것으로서 그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수오지심(羞惡之心) 의지단(義之端), 일찍이 맹자가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옳음(義)의 단(端)이라고 역설했던 것도 영과 육의 교호작용을 간파했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항산이 있어야 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有恒産 有恒心)”고 주장했던 그는 “수오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라고 단정하기도 했었다.

시(詩)라는 것 또한 수오지심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육의 행위로 인해 영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승화하여 평정을 얻고자 하는 시도로서, 삶의 간난(艱難)이 시의 소재로 각광받는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이거니와, 소재와 주제의 공통분모가 커질수록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 같다. 1970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한 후 1994년‘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젊은 시인’ 문태준도 그런 시인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육적인 가난을 영적인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문태준 개인의 성장사가 그런 재주를 배양시켰는지 모르겠으나 이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시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음을 본다.

어물전 개조개를 소재로 한 ‘맨발’은 그 중 백미(白眉)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가난의 상징인 움막, 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는 모습을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인 것에 비유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가난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영혼을 정화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부처의 제자처럼 삼가고 또 삼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는 대목은 너무 진지하여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개조개는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을 거라는 동병상련에는 부처도 감동할 것 같다.

문태준은 지난 2005년 도서출판 ‘작가’가 시인・문학평론가 등 문인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5 오늘의 시’ 설문조사에서 그의 또 다른 수작 ‘가재미’가 ‘가장 좋은 시’로 꼽히면서 그 자신 또한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됐었다. ‘가재미’는 임종을 앞둔 ‘그녀’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고통을 그린 것으로서, 훗날 문태준은 ‘그녀’에 대해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했던, 살붙이나 다름없던 큰 어머니’라고 밝힌 바 있는데,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는 대목에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토록 섬세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역시 육(肉)의 간난을 영(靈)의 감동으로 승화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슬픔은 육적인 간난을 영적으로 정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 같은 것, 시인들이 슬픔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게 삶의 진액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올해 나이 40에 지나지 않는 문태준은 “젊은이답지 않게 참으로 진지한 시를 쓰고 있다”는 칭찬을 들어 마땅할 것 같다. 이 땅 위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고 영혼의 갈증을 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건필을 빈다.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인생, 그 아쉬운 다기망양


맨해튼과 퀸즈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 리버 사이드 공원의 갈림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임의 끝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인생의 갈림길에서의 선택 또한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The Road Not Taken (가지 않은 길)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그 중 하나를 택하기로 하고는, 오랫동안 서서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한 길을 가능한 한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그 길이 굽어서 꺾여 내려간 데까지,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그리곤 그 길 못지않게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더 낫다고 여길만한 이유도 있었겠지요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그 길은 더 풀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적었으니까요.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그 길을 다니다보면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 길 또한 다른 길과 다름없을 것이지만.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그 날 아침 똑같이 뻗어있던 그 두 갈래 길에는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아, 나는 또 다른 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뒀었죠!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어떤 길이 어떤 길로 이어질 지도 모르기에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도 말이죠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난 한숨을 쉬며 털어놓을 겁니다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먼 먼 훗날 어디선가 말이에요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나는 사람들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고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그로 인해 모든 게 달라졌다고.

                                                                    <1916년, Robert Lee Frost; 1874년∼1963년>

기망양(多岐亡羊),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어버렸다?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양자(楊子)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이웃이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하여 동네방네 뒤지면서 호들갑을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갈림길이 너무 많아 양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탄식해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디 학문뿐이랴. 단언컨대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어느 길로 가야 행복의 양을 찾을 수 있을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 왜? 한번 물레방아를 돌린 물은 다시는 그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한 사람은 다시는 그 갈림길로 되돌아올 수 없으니까. 고집을 부려 문과대에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 주장대로 법대나 의대에 지원했더라면?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으로 이민 오지 않았더라면?....참으로 바보 같은 가정(假定) 화법이지만 그런 가정법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어쩌랴. 인생에는 연습이 없고 장기나 바둑처럼 한수 물리지도 못하는 것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따라 오늘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결과론에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로버트 프로스트
로버트 L.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가 1916년에 발표한 ‘The Road Not Taken(가지 않은 길)’도 그런 결과론에 따른 아쉬움과 회한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프로스트는 ‘풀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적은 길’를 선택했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걸으면 그 만큼 실패할 확률이 작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이 덜 다니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 한숨은 왜 내쉬나? 프로스트 평론가들은 그걸 ‘시적(詩的) 아이러니’라고 포장하지만 기실은 어느 길을 선택했더라도 먼 훗날 한숨을 내쉬기는 마찬가지라는 프로스트의 의뭉한 재치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실제로 프로스트는 1925년 한 편지에서 “그 ‘한숨(a sigh)'은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한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익살”이라고 밝혔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는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한다는 것을 프로스트는 절감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한숨덩어리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현대 미국 시인 중 가장 순수하고 목가적이고 고전적인 시인”으로 꼽히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불행하고 외롭고 슬픈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1살 때 세상을 떴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의 어머니 또한 유방암을 앓다가 1900년에 심장병으로 죽었으며, 누이동생 지니를 그의 손으로 정신병원에 보내야만 했다. 또 여섯 자녀 중 큰 아들 엘리어트는 8세 때 콜레라로 사망, 셋째 아들 캐롤은 38세 때 자살, 다섯째 딸 마조리는 29세 때 출산 후 부작용으로 사망, 여섯째 딸 엘리너 베티나는 낳은 후 3일만에 사망...여섯 자녀 중 유일하게 이런 저런 중병을 앓지 않았던 둘째딸 레슬리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넷째 딸 얼마만 프로스트보다 늦게 죽었다.

생활도 그리 유복했던 편이 아니었다.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사망 후 생활고로 인해 동부 뉴잉글랜드로 전 가족이 이주하여 할아버지가 사준 농장을 일궈야 했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보조, 신문배달, 전구(電球) 공장 등지에서 품을 팔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트머쓰대에 들어갔으나 두 달 만에 때려치운 것도 가정형편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무 살 때인 1894년 ‘뉴욕 인디펜던트’지에 처녀작 ‘나의 나비; 어떤 애가’를 기고하여 원고료로 15달러를 받았을 때 너무 기뻐서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엘리너 미리엄 화이트에게 청혼했지만 엘리너가 “우선 대학 졸업장부터 따고 나서 결혼 이야기를 하자”고 조건부 딱지를 놨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결국 프로스트는 하버드에서 2년 공부한 후에야 결혼에 성공한다). 프로스트가 유달리 전원에 집착하고 또 시작에 몰두한 것도 그런 불행한 가족사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많다. 그런 프로스트였기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볼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그 ‘한숨덩어리’를 시로 다듬으려고 애썼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The Road Not Taken’같은 명시가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길이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런 갈래 길에서는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먼 훗날 한숨을 내쉬는 게 인지상정이며, 그런 인지상정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아름답고 순수한 감성이라는 프로스트의 따뜻한 격려를 상기하면서 ‘The Road Not Taken’을 다시 읽어보라. 현실이 고단할수록 지금껏 걸어온 길을 돌이켜볼 때마다 아쉬움과 후회의 안개가 짙게 깔리겠지만 먼 훗날 다시 돌이켜볼 때는 가도 가도 삭막하기만 한 이 세상의 여로에서는 그 또한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2013년 4월 22일 월요일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 ‘막다른 골목’ 질주하는 현대인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오감도(烏瞰圖)  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1934년 '조선중앙일보', 이상; 1910년-1937년>


안(不安)에 최초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불안 철학’(Philosophy of anxiety)의 기반을 닦았던 독일 철학자 M.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인간은 세계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원초적인 공포 때문에 늘 불안을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지만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에 휘말려 잠시 잊고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었다. 또 절망적인 자기상실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일컬었던 S .A. 키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는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이라는 질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며 “불안의 교화(敎化)를 받아 신앙으로 귀의(歸依)할 수 있고 화해에 의해 비로소 평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었다.

젊은 날의 시인 이상
불안을 공기처럼 들이마시고 사는 오늘, 시인 이상(李箱)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너무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쳐 중단했다는 ‘오감도’(烏瞰圖)를 다시 읽어보면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든다. 천재 시인 이상의 작품이 그 만큼 시대를 앞서 갔다는 증거이리라. 제1호시를 놓고 당시 우리나라의 도(道)가 13도였으므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한다느니,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느니, ‘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를 상징한다는 등등 별별 해석들이 나돌고 있지만 기실은 쓰인 그대로 시인 자신이 ‘까마귀(불안한 관찰자의 모습)’가 되어 ‘13인의 아이(현대인)’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1의 아해’부터 ‘제13의아해’가 모두 무섭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시인의 관찰이 암호문 같은 숫자와 단어의 조합을 알기 쉽게 풀이해준다. 현대인은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하며,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도로를 질주하지만, 결국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막 다른 골목’은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질주’는 급변하는 삶의 속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모는 것 같은 심리를 잘 그렸다.

‘오감도’를 영역하여 뉴욕타임스에 연재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국경제가 금융위기로 인한 불황에서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가운데 불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바,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는커녕 동병상련의 감상문들이 쇄도할 것 같다.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어떤 길을, 왜 가야하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질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실제로 엊그제 한 시사주간지는 “불안장애는 가장 흔한 정신병의 일종이지만 미국인 대부분이 이를 병으로 자각하지 않고 치료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의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도 했었다. 미국 내 불안장애 환자가 1천9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치료를 받은 사람이 25%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뿐 자기 자신을 치유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76년 전 식민지 조선의 한 천재시인이 간파했던 것처럼 모두들 ‘무섭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무서운 아해’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그렇다면 선택은 별로 없어 보인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든지, 종교에 귀의하든지, 사랑을 하든지, 그래도 불안하면 죽음을 수용하는 수밖에. 물론 그 때는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2013년 4월 21일 일요일

조춘기왕한양(早春寄王漢陽) - 봄이면 기다려지는 '미인'

찰스 강변에 만발한 벚꽃, 봄은 왔건만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아 술 한잔 같이할 '미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早春寄王漢陽(조춘기왕한양)


聞道春還未相識(문도춘환미상식)   봄이 돌아왔다고 들었으나 아직은 낯을 맞댄 적이 없어
走傍寒梅訪消息(주방한매방소식)   한매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본다
昨夜東風入武陽(작야동풍입무양)   陽一昌) 어젯밤 동풍이 무양(武陽)에 불어들더니
陌頭楊柳黃金色(맥두양류황금색)   길모퉁이 버드나무 황금색
碧水浩浩雲茫茫(벽수호호운망망)   푸른 물 넓디넓고 구름은 아득
美人不來空斷腸(미인불래공단장)   아름다운 사람 오지 않아 애간장만 태우네
預拂青山一片石(예불청산일편석)   일찌감치 청산의 바위 한 자락 쓸어놓았으니
與君連日醉壺觴(여군련일취호상)   그대와 연일 술독에 빠져 보세나.      <이백; 701년-762년>

4월도 어느 덧 하순, 아파트 정원 나뭇가지 끝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싹들이 돋아나오고 플러싱 메도우 파크 호수 언저리에도 초록빛이 감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연한 봄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의 여한미진(餘寒未盡)이라고나 할까, 기상대에서는 한낮의 최고 기온이 56°F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하고 있지만 창문을 열 때마다 밀려들어오는 바람의 한기가 만만치 않다. 매해 그랬듯이 올해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가 보다. 실업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데서 보듯 불황의 먹구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데다가 날이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그런지 퀸즈 블러바드 건너 편 버스 정류장 표지판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여전히 칙칙하고 무거워 보인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이른 봄 왕한양에 부치다(早春寄王漢陽)’라는 시를 쓴 것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봄이 돌아왔다고 들었으나 아직은 낯을 서로 맞댄 적이 없어서/ 한매(寒梅)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본다....무슨 소식을 물어봤나? 봄이 어디쯤 왔느냐고? 천만에. “어젯밤 동풍이 무창에 불어들더니/길모퉁이 버드나무는 황금색/ 푸른 물 넓디넓고 구름은 아득한데...”라고 읊은 데서 보듯 봄이 왔다는 건 이백 자신 또한 잘 알고 있었던 바, 이백이 기다린 건 봄이 아니라 ‘아름다운 그 사람’이었다는 데 주목해야할 듯싶다. 사람이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건 매해 반복되는 계절이 아니라 ‘만나면 즐겁고 반가운 그 사람’이라는 고독한 관찰이 또렷하게 읽혀진다.

그런데 그 ‘미인’이 누군가? 왕한양? 한시 깨나 읽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해석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작품으로만 보면 ‘美人’은 왕한양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지만, 봄이 왔는데도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해 한매에게 달려가 소식을 물어보고 싶다고 너스레를 떤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왕한양은 술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이백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다리는 ‘미인’은 아니었을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천자가 뱃놀이에 불러도 응하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주중(酒中)의 선(仙)’이라고 칭했던 이백이고 보면,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미인’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걸 만고지수(萬古之愁)로 삭히면서 살았기에 술친구 하지장(賀知章)이 ‘적선인(謫仙人)’이라는 별호를 붙여줬던 게 아닌가 싶다.

이백도 없고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실 왕한양도 없는 뉴욕의 봄은 어디까지 왔나? 아파트 앞 정원에 만개한 목련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보고 싶다. 누가 보더라도 봄은 이미 왔지만 ‘미인’이 오지 않았기에 봄이 왔는데도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2013년 4월 19일 금요일

어부사(漁父辭) -버림받은 자의 자학

롱아일랜드 존스 비치에 방치된 울타리. 여름 피서철이 끝나면 직장을 잃거나 이혼한 사람들이 자주 찾으면서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린다는 것을 깨닫는 곳이기도 하다.

漁父辭(어부사)

屈原旣放(굴원기방) 
굴원이 이윽고 쫓겨나

游於江潭 行吟澤畔(유어강담 행음택반)
강과 물가에서 노닐며 연못 둔덕에서 시나 읊조리고 다니는데

顔色樵悴 形容枯槁(안색초췌 형용고고)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이 수척하였다.

漁父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어부가 그를 보고 물어 말하기를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자비삼려대부여 하고지어사)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屈原 曰(굴원 왈)
굴원이 말하기를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취 아독성, 시이견방)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

漁父 曰(어부 왈)
어부가 말하기를

聖人 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성인 불응체어물 이능여세추이)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함께 변하여 따라 간다고 합니다.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세인개탁 하불굴기니 이양기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衆人皆醉 何不飽其糟而歠其醨(중인개취 하불포기조 이철기리)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거든 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何故深思高擧 自今放爲(하고심사고거 자금방위)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屈原 曰(굴원 왈)
굴원이 말하기를

吾聞之, 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오문지,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했소.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안능이신지찰찰 수물지문문자호)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녕부상류 장어강어지복중)
차라리 상강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
어찌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와 티끌을 뒤집어쓸 수 있겠소?

漁父 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어부 완이이소 고설이거 내가왈)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고 가면서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遂去不復與言(수거불복여언)
마침내 떠나가 다시 함께 이야기 하지 못했다.

                                                                    <굴원; 기원전 340년-기원전 278년>

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일찍이 공자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역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을 때 자신의 아량이 넓다거나 x폼을 잡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흘려들으면 아무도 없는 벌판에 홀로 서서 처절하게 울부짖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치명적인(?) 충고였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 사람들 틈에 끼어 살기 마련이고, 세상 사람들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잘 살고 있다는 반증, 거꾸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잘못됐다거나 세상이 잘못된 것인 바, 그럴 경우에 겪는 외롭고 쓸쓸함과 심적 갈등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다. 그래도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군자 할아버지’라고 할만 하지 않은가?! 

세상이 잘못된 건 가? 내가 잘못된 건가? 공자의 200년쯤 후배인 굴원(屈原) 또한 공자의 충고를 흘려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던 것 같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회왕의 좌도가 되어 내정과 외교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그 때문에 다른 신하들의 시샘과 미움을 받았고, 회왕이 객사한 후 장남 경양왕이 즉위하고 회왕을 객사하게 만든 막내 자란이 영윤이 되자 그를 비난하다가 대부의 참언으로 추방을 당해 동정호 근처를 방랑하다가 돌덩이를 껴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의 심정을 읊은 저 유명한 ‘이소(離騷)’를 마무리 지으면서 “모든 게 다 끝났도다. 나라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고도(古都)를 마음에 품으리오?(已矣哉 國無人莫我知兮 又何懷乎故都)”하고 절규했던 것을 보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충격과 고통이 꽤나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부사’ 속에서 세상살이에 대해 굴원과 논쟁을 벌이는 ‘어부’는 누군가? 흔히 “더러운 속세를 버린 은사(隱士)”쯤으로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굴원의 또 다른 자아(自我)로 보는 게 옳다. 굴원이 자기가 쓴 글에 자기를 ‘나’라고 하지 않고 ‘굴원’이라고 객관화한 것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져 살고 싶어 하는 자아’의 충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옳지만 세상이 글러먹어서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자아와 “더러운 세상에서 혼자 깨끗한 척 하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자아의 충돌을 그렸다는 말이다. 직장에서 모함을 받아 명퇴를 당했다거나 인종차별을 당해 목이 잘렸을 때 세상을 원망하다가도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 아닌가? 나야말로 실력이 없어서 그런 더러운 세상에서조차 밀려난 게 아니냐?”고 자학해본 사람들은 고개 끄덕이리라. 허구한 날 집구석에 틀어박혀 담배 연기 길게 내뿜을 때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더욱이 신세 처량하게 되자 친구들은 물론 처자식까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을 감지했을 때의 열등감과 쓸쓸함과 모멸감이란!...‘국무인막아지혜(國無人莫我知兮)’를 골백번 되뇌어도 모자란다는 것을 절감하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리는 것, 내가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를 버리는 것임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수신(修身)에 힘썼던 공자는 잘 알고 있었던 반면 쥐뿔도 없이 자존심만 강했던 굴원은 그걸 잘 알면서도 세상만 원망했기에 마음고생이 더 심했던 것 아닌가?!

타는 목마름으로 - 베낀 시와 가짜 민주주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다. 그 때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렸지만 지금도 독재세력들이 북한이 사주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5년, 김지하; 1941년- >


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다. 미국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었고 제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도 1787년 11월 13일 대륙회의 뉴욕주 대표 윌리엄 S. 스미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로 다시 생생해져야만 한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고 썼었다. 하긴 프랑스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웃기는 가정이지만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을 꼬드겨 제정 러시아의 신분제 사회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많은 인민이 압제자들이 돌리는 맷돌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 토를 달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의 애국자나 압제자의 피보다는 미국 등이 꽂아준 링거 주사를 더 많이 맞고 컸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선지 아직도 목이 탄다. 해방 후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왜 때리느냐고? 그건 내 자유지” 하고 킬킬거리던 사람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떠받들면서 독재의 콩고물을 나눠먹었고,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해괴한 ‘짝퉁 민주주의’로 국민을 윽박지르면서 지역 편중 개발 및 인사로 영구집권을 획책했었으며,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새싹이 겨우 기지개를 켰으나, 삽질 좋아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말라비틀어졌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실업자 청년의 온라인 게재 글까지 트집 잡는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명예훼손소송이니 뭐니 유형무형의 재갈을 물리고, 정권과 기득권층이 똘똘 뭉쳐 “우리가 하면 로맨스, 너희들이 하면 불륜”이라고 합창을 해대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건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트집이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 전 세계 각국의 인권과 자유를 감시하는 국제 엠네스티도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자 대량 기소, 전교조 교사 대량 파면, 천안함 사태 조사 결과 비판자 고발 등등을 예로 들면서 “정치참여와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었다. 

김지하(본명 김영일)가 ‘타는 목마름으로’를 쓴 것은 박정희 독재가 극에 달해 독기를 내뿜던 70년대 초,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지하가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투옥 10개월만인 1975년 2월에 풀려나 몰래몰래 퍼뜨렸던 것으로서, 김지하는 100% 자신의 창작임을 주장하겠지만 기실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시 ‘자유’의 프레임과 화법을 슬그머니 차용한 것이었다.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맞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앞장섰으며, 1942년 영국의 항공편대가 ‘자유’가 첫머리에 실린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지에 살포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나의 학습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의 ‘자유’의 앞과 끝 부분> 

어떤가? 옷만 바꿔 입었을 뿐 몸뚱이는 똑 같은 것 같지 않은가? 표절이라고 몰아붙이면 김지하가 두 눈을 치켜 뜨겠지만, 학창시절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했던 김지하가 프랑스 미학 서적을 뒤적이다가 엘뤼아르를 접했을 것이고, 거기서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류의 작품을 쓰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의 흉내 내기로 시작된 것을 패러디하듯 반독재 저항시가 자유주의 혁명의 본산인 프랑스의 시인 흉내 내기로 탄생한 것만 같아 쓴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반독재 저항시로 명성을 얻은 김지하는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주는 ‘로터스(LOTUS)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의(Poetry International)가 주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는 등 일약 ‘한국의 엘뤼아르’로 떠올랐었으나, 90년대 초 생명사상이 어쩌고저쩌고 노태우 독재 타도 시위학생들에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다가 졸지에 변절자로 몰렸었던 바, 과거 반독재 시위에 앞장서다가 지금은 여권에 몸을 담아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와 인권을 제약할 수도 있다”고 침 튀기는 데모꾼 출신 정치인들이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냐?”고 비실비실 웃고 있음을 본다. 지난 대선 때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공로(?)를 인정받았는지 요즘 여당 성향 매스컴에 얼굴을 자주 내밀고 있는 것을 보면 김지하의 머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까먹은 지 오래 됐는지도 모르겠다. 베낀 시와 가짜 민주주의의 생얼굴을 보는 것 같아 눈쌀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쨌거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목이 탄다? 그런 것 같다. 김대중 정권이 기득권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 의료보험 확대를 밀어붙인 덕분에 병원비 안 들이고 수명을 연장하게 된 달동네 노인네들까지 “빨갱이 김대중의 묘를 파헤치자”고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은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덜 마신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고, 박정희나 전두환․노태우 독재 때는 대통령 발뒤꿈치만 봐도 벌벌 떨던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개대중이 때려잡자’ ‘노개구리 잘 뒈졌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 자유고 뭐고 지연․학연으로 권력에 빌붙어 감투나 이권 부스러기 나눠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주주의라는 게 사치품인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부정권을 거치는 동안 유형무형의 혜택을 입은 특정지역 사람들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보면 타는 목을 축인답시고 콜라 잔뜩 들이키고나서 트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순수한 열정으로 독재자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여 '타는 목마름으로'를 낭송하던 김지하와 폭삭 늙어버린 후 민주주의고 뭐고 남들이 알아주고 대접해주기만을 바란다는 듯이 박정희 딸 박근혜를 공개지지한 후 매스컴에 얼굴을 들이내밀고 있는  김지하, 한국의 민주주의 나무가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마실 수 없다면 별 볼 일 없는 시인 나부랭이들의 반성이라도 실컷 마셔야 조금씩이나마 자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나 있을까?!

무등을 보며 - 가난한 가장이 가슴으로 쓴 시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 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54년 '현대공론', 서정주; 1915년-2000년>

장(家長)은 어떤 존재인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윤리가 굳건했던 시절에는 말 그대로 ‘집안[家]의 어른’이었으나 경제논리가 윤리를 지배하면서부터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소년소녀 가장’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직 당한 4,50대 가장들이 심신이 유약해진 나머지 종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가족 부양 부담감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얼마 전 부산에서는 후배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줬다가 떼인 30대 가장이 자신이 든 2억원짜리 생명보험을 타내 가족의 생계를 이을 목적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만년의 서정주 시인
전라북도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가 ‘무등을 보며’를 발표한 것은 한국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년 후쯤인 1954년 8월, 시나 문학 전문지가 아닌 시사종합지 ‘현대공론(現代公論)’ 지면을 통해서였다. 송운영․이강민 등이 설립한 현대공론사에서 펴낸 ‘현대공론’은 1953년 10월 25일 창간호를 찍으면서 거창하게 출발했으나 1955년 1월 1일 제13호를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던 바, 거기 실린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역시 문학적 가치보다는 원고료를 위한 기고였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그래서 시의 화법 또한 내면의 고백이나 관조가 아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로 흘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 이전 서정주가 추구해오던 시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제 또한 교훈적이어서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주류를 이루던 초기시의 특징에서 벗어나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다가선 서정주 문학의 제2기 대표작”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서정주가 그 이후 ‘신라초’(1961년), ‘동천’(1969년), ‘질마재 신화’(1975년) 등에서 줄기차게 추구했던 게 민족적 정조와 샤머니즘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단언컨대, ‘무등을 보며’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인이 부업(?) 삼아 쓴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싶다. 일제 시대에도 서정주는 시인으로서의 입지 강화와 그 놈의 알량한 원고료를 노려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항공일에’(1943년), ‘헌시(獻詩)’(1943년), '오장 마쓰이 송가'(1944년) 따위의 문학작품 아닌 친일작품들을 남발한 전과(?)가 있었다. 본인과 친지들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을 보며’는 매우 당당하게 서정주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학사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지만 일반 시 독자들의 ‘서정주 대표작’ 리스트에는 항상 상위에 오른다. 그 이유가 뭔가? 읽기에 쉬우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인의 특출한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시장통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슴으로 쓴 시라는 말이다. 실제로 ‘무등을 보며’를 발표할 때의 서정주는 전남 광주 조선대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대우가 형편없어 점심을 거를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그런 가난 속에서 시인은 청탁 받은 시 한편을 기술자처럼 써주고는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받아 막걸리 한 잔 걸쳤을 터, 그 때 바라보던 무등산의 갈맷빛 등성이가 눈이 부시게 푸르렀을 것이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주옥같은 시를 쓰는 것보다 천만 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물 마시고 배부른 척 하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그 얇은 입술을 다시 한번 지그시 깨물었을 ‘가난한 가장’ 서정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한 시인은 그렇게 두 아들을 잘 키워 장남 승해는 미국 변호사가 됐고 차남 윤 또한 미국 의사가 됐다.

시는 혓바닥을 놀리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가슴을 울려 토해내는 삶의 소리, ‘무등을 보며’가 서정주의 대표작 아닌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도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쓴 시이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우연인지 서정주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무등(無等)’을 말 그대로 풀면 ‘등급이 없다’는 의미,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가장들 사이에도 등급은 없다는 것을 까먹지 말자.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가장들이여, 그대들 또한 처자식의 눈에는 서정주 못지않은 ‘위대한 시인’으로 비쳐질지니,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면서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어보라.


The Arrow and The Song - 허무 속에서 의미 찾기

롱아일랜드 윗쪽 끝 오리엔트 포인트에서 발견한 썩은 고목 밑둥. 녹음을 짙푸르게 드리우던 한창 시절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The Arrow and The Song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허공중에 화살 하나를 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몰라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너무 빨리 날아갔기에 바라봐도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따라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허공중에 노래 한 숨 내쉬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그것도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몰라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날카롭고 매서운 눈을 가졌다 한들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어찌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잡을 수 있겠나?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한 참나무에서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그 화살을 찾았네, 그제도 부러지지 않은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그리고 그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한 친구의 가슴 속에서 다시 찾았네

                                                        <1845년,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년–1882년>

월 빠르기가 ‘쏜살’ 같다고 했던가?! 미적분 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듯이 무한대 분모 위에는 그 어느 것을 올려놓아도 제로, 무한 시공 속에서의 유한 인생 또한 제로로 수렴된다. 영웅호걸도 시정잡배도 죽음이라는 무한대 위에 서면 형체도 흔적도 없어지는 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장자(莊子) 잡편(雜篇)에서 자신을 설득하러 온 공자를 되레 꾸짖는 도척(盜跖)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는 80살, 밑으로 가면 60살, 그나마 병들고 문상하고 걱정거리로 괴로워하는 것을 빼고 나면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 4,5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한한 육체를 무궁한 천지간에 맡긴다는 것은 준마가 좁은 문틈을 획 달려 지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바, 그 지극히 짧은 시간에 욕심을 채워봤자 얼마나 채울 것이며 인의예지를 떠벌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물으면 대꾸할 말이 적절치 않다. 이른 바 허무(虛無)다. 그래서 장자는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면서 주어진 수명을 다하는 게 지고의 도(道라)고 역설했었지만 그런 도를 깨우쳤다고 한들 무변광대한 우주에서 티끌보다 못한 인생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마저도 결국엔 한강물에 돌 던지기이고 태평양에 오줌 누기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와 명예는 물론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복감까지도 따지고 보면 뜬 구름 같은 것, 삶은 그런 뜬 구름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 그게 부질없는 짓인 줄을 잘 알면서도 그 짓이라도 해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게 인생의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1807년 2월 27일 당시는 메사추세츠주의 일부였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모자람이나 불편함 없이 성장했으나 성년이 되어서는 사랑하는 누이를 결핵으로 잃고 두 번씩이나 상처(喪妻)하면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던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도 그런 딜레마를 곱씹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1845년에 발표한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 또한 허무 속에서의 의미 찾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1835년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토어러 포터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방황하다가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패니 애플톤과 재혼한 후 참으로 오랜만에 안정된 생활을 맛봤기에 그런 착실한(?)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 전편에 짙게 깔린 허무의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울지 않으련다”고 입술을 깨무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화살’인가? 화살은 어떤 목표를 맞추기 위해 활시위를 힘껏 당겨 날리는 것, 즉 인생의 목표 추구인데, 그걸 '허공중(into the air)'에 쐈다? 롱펠로우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화살’의 ‘빠름’처럼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세월의 화살’로 무엇을 맞춰 떨어뜨렸는지 진정 몰랐었다는 부끄러운 실토가 그 얼마나 뼈아픈지는 부귀와 명예를 좇다가 이빨 다 빠지고 두 눈 침침해지자 마지막 발악을 하듯 아스팔트 우파가 어쩌고저쩌고 이리 저리 몰려다니면서 만만한 정치인들에게 욕지거리나 퍼부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노인네들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또 왜 하필이면 ‘노래’인가? 롱펠로우는 노래는 음계와 장단에 따라 부른 게 아니라 가슴에서 ‘내쉬어진(breathe)'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song’의 뿌리는 고대영어 ‘sang’로서 음률뿐만 아니라 숨이 내쉬어져 만들어내는 소리는 물론 시나 넋두리까지 포함했던 바, 롱펠로우의 노래 또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가 괴로울 때나 자신의 가슴 속에서 내쉬어진 ‘삶의 소리’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화살’은 ‘인생의 목표 추구’, ‘노래’는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알게 모르게 내쉬어진 삶의 숨결, 죽기 전에 그 ‘화살’이 부러지지 않고 어느 굵직한 참나무 등걸에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노래’ 또한 어느 ‘친구(여기서는 항간의 친구가 아니라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순박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롱펠로우 자기만의 확신이 슬프고 안쓰럽기만 하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다고는 말하지 말자. 그럴 자신이 없다고 풀이 죽을 필요도 없다. 롱펠로우 또한 입으로는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고 노래 불렀었지만 그런 자기 확신이 못 미더웠던지 틈만 나면 자기 최면을 걸었으니까. 저 유명한 ‘인생찬가(A Psalm of Life)’의 첫머리를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슬픈 숫자들(사연 또는 곡조)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라고 읊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롱펠로우가 지금 환생한다고 해도 끝까지 침 튀기면서 우길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그래, 인생이 허무하다고 치자.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대? 짧은 인생, 아무리 허무하더라도 허무하지 않다고 우기고 보는 게 허무의 접시에 코 박고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Ich, der Überlebende - 지식인의 자학


퇴근 시간 맨해튼에서 퀸즈로 빠져나오는 전철 안 풍경. 저마다 상념에 사로 잡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서글픈 진실을 곱씹고 있는 건 아닌지.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Bertolt Brecht; 1898년-1956년>


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을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이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자원(먹이·생활공간 등)에 관해 공통의 요구를 가지는 생물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이라고 부드럽게 정의되지만 실상은 혹독하기만 하다. 한자 ‘생존(生存)’도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날 생(生)은 싹(ꟈ)이 땅 위(一)로 돋아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있을 존(存) 또한 싹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양의 재주 재(才)와 아들 자(子)가 합쳐진 것으로서, 새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그게 재주를 부려 살아남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생존투쟁’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진화론의 비조 찰스 R. 다윈, 그는 “환경조건에 따라 적응한 변이가 생존경쟁의 결과로서 보존되며, 생물이 서서히 변해가면서 새로운 종(種)이 만들어진다”는 자연선택설을 제창했었다. 모든 생물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윈의 생각은 인간사회로 재이입(再移入)되어 전쟁이나 인종·계급의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회진화론의 모태가 됐었고, 최근에도 영국 옥스퍼드대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유전자는 이기적이며 유전자의 이기성이야말로 개체 이기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스꽝스런 이야기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나 하다 못해 최근의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논란’이나 ‘영포 게이트’도 그런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고향만 개발하고 고향 선후배들만 등용하면서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도 생물학적 이기심의 발로로 보면 틀림이 없다. 

‘생물학적 이기심’은 타인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체면이나 인격 또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데 가장 큰 멍에다. 추하다. 그래서 일찍이 계몽주의 시대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바,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양(委讓)하여 평화적인 공동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했었으나, 법적인 강제보다는 양심과 도덕이 더 효과적이고 보기에도 좋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생물학적 이기심’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을 교양과 인격의 가늠자로 여기고 있음을 본다. 

20세기 서양 연극사를 대표하는 희곡작가이자 연출가로 손꼽히는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도 ‘생물학적 이기심’을 양심과 도덕률로 억제하려고 애썼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나치 독일에 반발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심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생물학적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지식인의 책무란 ‘나’ 아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었다. 1898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자본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나치 집단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비판하다가 무려 15여 년간이나 망명을 했었으며, 이윽고 나치 독일이 무너진 후 서(西) 베를린이 아닌 동(東) 베를린으로 귀환하여 자기의 작품들과 ‘서사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에 몰두했었다. 

‘Ich, der Überlebende’를 직역하자면 ‘나, 살아남은 자’, 그러나 한국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소개됐다. 역자(譯者)가 나름대로의 감상으로 의역한 것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의식(自意識)이 허락하지 않는 짓들을 서슴지 않은 자신을 벌주고 싶어 한 브레히트의 의도가 묵살(?)한 감이 없지 않아 아쉽다. ‘haßte’의 뿌리는 ‘증오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고지 게르만어 ‘haz’이고 ‘haz’는 ‘돌보다’ ‘염려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kēdos’와 같은 의미였던 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자의식이 허용하지 않는 행위를 했을 때 더 많이 자책한다는 의미가 읽혀지므로, 브레히트는 유독 그 단어를 골랐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한 자기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슬픔’이라고 해석하는 건 읽고 번역하는 사람의 자유겠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염려한 나머지 자신을 혹독하게 징치하고자 했던 브레히트의 ‘생물학적 이기심 극복’까지 도매금으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브레히트는 세상으로부터 ‘강한 자’로 인정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살아남다’ ‘생존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survive’의 뿌리는 ‘초(超)’ ‘-를 능가하는’을 뜻하는 접두사 ‘super-’에 ‘살다’라는 의미의 ‘vivere’가 붙은 라틴어 ‘supervivere’로서 한 때는 ‘재빠른’을 뜻하는 ‘quick’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던 바, 살아남기 위해서는 잽싸야 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단물이 빠진 껌은 가차 없이 내뱉고, 권력이 바뀌면 잽싸게 신발을 바꿔 신고, 남들보다 먼저 이득을 취해야 ‘강한 자’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브레히트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런 아픈 곳을 콕콕 찌르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돈 많이 벌고 큰 권세 휘두르는 사람일수록 자의식의 채찍을 아프게 맞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세상살이가 참 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정말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맨해튼 차이나 타운의 야채 과일 행상들 옆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세상을 알만큼 안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모른 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김소월(金素月) : 1902년-1934년>

록이 봄 바닷물결처럼 넘실댄다. 멀리 새털구름 유유자적 흐르는 창천(蒼天)이 눈부시다. 우중충한 아파트 거실에서 속옷차림으로 환하디 환한 바깥세상을 다시는 바라보지 말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었건만 오늘 유약하게도 그 다짐을 또 깨고 말았다. 대가를 치르리라. 술과 담배 그리고 고단위 마이신 알약 같은 자기최면으로 얼기설기 덮어놓았던 마음의 병이 또 도진다. 기억의 저편에서 자의식(自意識)이란 놈이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꼼지락거린다.

김소월
그래, 김소월이 있었다. 주옥같은 270여 시편을 발표하고 불과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김소월(金素月 : 1902-1934)의 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까까머리 시절에 처음 외웠었지만 소월이 왜 그런 시를 썼는지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던 ‘철없던 시절’을 지나,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삶에 자학의 메스를 들이댔을 때, 고락에 겨운 입술 사이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었다.

문학을 좋아하면서 처음 만난 게 김소월이었으나 그를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를 주업(主業)으로 삼지 않고 돈과 명예를 위해 애썼던 속물(?)이었다. 평론가들은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한(恨)을 민요조에 실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왠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조부의 광산 일을 돕기도 했던 소월은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기 위해 조부와 어머니를 졸라 땅을 처분하여 운영자금을 마련했으나 실패했었고, 이 때문에 인생에 대한 회의와 실의에 젖어 술을 마시는 빈도가 잦아지다가, 끝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술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소월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생활에 지쳤던 천재 시인이 예수처럼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것”으로 미화하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그런 미화와는 거리가 먼 아편 과다복용이었다. 죽기 전 날 아편으로 몽롱한 상태에서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싫지는 않았다. 진솔하고 수수하면서도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있었다. 김소월이 자신의 속물다움을 숨기기는커녕 시의 소재로 삼으면서, 자신의 정한(情恨)을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로 정화시키고 가다듬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까놓고 말하자면 그는 ‘인생 실패자’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스스로를 너그러이 용서하지도 못하고, 슬픔과 고뇌와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역설적이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라는 배출구를 통해 자신의 슬픔과 고독을 내보냈기에 더 쉽게 잘 읽혀지는지도 모르겠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먹고 살기 어려워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았던 시절에 김소월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김소월은 진짜 세상 모르고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나이에 비해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에 등장하는 두 개의 산 즉 ‘만수산(萬壽山)’과 ‘제석산(帝釋山)도 그 점을 암시한다. ‘만수산’은 개성 인근의 산으로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도 등장하는데, 이런들 어떠 하리 저런 들 어떠 하리 세상 돌아가는 대로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의 본향(本鄕)으로 간주되는 바, 김소월은 만수산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제석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의 산을 떠올리지만, 제석산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널려 있는 흔 하디 흔한 산 이름으로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 제석천(帝釋天) 신앙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제석산 붙는 불(진짜 불이 난 게 아니라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금잔디 따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은 인연과 윤회의 상징으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에 대한 거자필반(去者必返) 기원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반어법으로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듯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또한 반어적으로 “마구잡이로 뻔뻔하게 살면 잘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

‘인생 실패자’ 김소월의 시가 2010년 한여름 그랜드 센트럴 파크웨이와 퀸즈 블러바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다시 읽혀지는 이유를 생각하면 처량하고 한심하지만 그의 시가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늘엔 새털구름 떠가고, 플러싱 윌로우 파크 언저리의 포플라 나무들이 유치원생들처럼 손바닥을 반짝이는데, 파타임 캐셔 일을 나가는 아내가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 끓이는 커피 냄새가 고소하기만 한데, 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하는 구절이 이빨 사이에 낀 갈비 찌꺼기처럼 뇌리 사이에 끼어 빠지지 않나? 이민 온 이후 철저하게 생활인으로 변신한데 대한 부끄러움이 뭉게구름처럼 커진다. 고락에 겨운 입술로 순수를 말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김소월이 고맙다. 김소월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앞으로도 세상 모르고 살고 싶다.

안개 - 안개의 탓만은 아니다

퀸즈 포레스트 힐의 사거리. 비안개에 촉촉하게 젖은 불빛들이 '안개의 탓만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안개

1 .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 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름이 흐르는 욕망의 도시 뉴욕도 스무 살 처녀애처럼 귀엽게 눈을 흘길 때가 있나? 흐림, 비, 안개....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부끄러운 듯 안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서 있는 마천루들이 너무나 순진해 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들이 관능적으로 머리채를 흔들어댄다. 젖은 눈의 신호등은 애수로 반짝인다. 누군가를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날에 들려오는 음악은 이름도 모르는 샹송 가수의 모노톤이어야 한다. 가끔 묵직한 첼로 음이 바닥에 깔리면 더욱 좋고.

지금 살아 있다면 만 50세가 되었을 것이다.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던 기형도라는 시인이 생각난다. 서해안 간척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유랑하다가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했을 때 안개밖에 친구 삼을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기형도를 세상에 드러나게 한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안개’ 역시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 아들의 텅 빈 가슴을 채워주던 소하리의 안개였다.

소하리의 안개는 우울하면서도 새침했던 것 같다. 소설가 김승옥이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에서 등장인물들을 나른하고 축축한 몽환의 세계로 몰아넣던 안개도 아니었고, 입이 약간 삐뚤어져 더 섹시해보이던 가수 정훈희의 ‘안개’도 아니었으며, 바닷가나 들판에서 군대처럼 밀려오는 농무도 아니었다. 이른 새벽 공원에서 밤새 잠 못 이룬 마음 여린 산보자들의 슬픔과 고뇌를 감싸주는 아량도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아무 인연도 없다는 듯이 스쳐 지나가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아픈 속내를 알고는 차마 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런 안개였던 것 같다.

기형도는 안개 속에서 나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를 통해 이상한 이름 석자를 되뇌었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가 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범인은 안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었다. 설령 안개가 기형도의 목을 조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스물아홉 살 짜리 문학청년이 무엇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가 새벽녘 싸구려 극장에서 숨을 거둔 이유만큼은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누군가와 동무하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깔깔거려보고 싶었으나,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기보다는 자신이 그 누구를 알아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싶었으나, 그저 외로운 사람들끼리 마음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으나, 그런 기대감을 갖고 안개 속을 마냥 걸었지만 안개가 몰인정하게도 그 기대감들을 박살냈을 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새벽녘 사창가의 창녀들처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 끌어들이는 실랑이를 벌여 그를 지치게 하고는 그가 푹 고꾸라졌을 때 “모든 건 너의 개인적인 불행일 뿐, 나의 탓은 아니다”라고 희미하게 비웃었는지도 모르고.

맞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는 시인의 관찰에 동의한다. 오늘의 고뇌와 슬픔도 모두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만은 아니다.

가는 길 - 그립다는 말 안 해도 그립다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의 한 산책로. 길이 있어서 걷는 건지 걷고 싶어서 길을 만들어놓은 건지 헷갈리지만 길을 가다보면 가슴 속 한 구석에서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진다.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金素月) : 1902년-1934년>


소월이 대갈통의 피도 마르지 않았을 21세의 애송이 시절인 1923년 10월 ‘개벽(開闢)’ 40호에 발표한 ‘가는 길’은 우스꽝스럽게도 청춘남녀보다도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읽으면 더 찐하다. 일상의 톱니바퀴에서 빠져 나와 텅 빈 공원을 산책하면서 호수에 잠긴 낮달을 바라보면서 담배 연기 길게 내뿜으면 그리움에 풍덩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그리움의 호수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일수록 발을 헛디뎌 익사(?)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물어보나마나, 그런 ‘익사사고’를 ‘방황(彷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만 사랑할 사람이 없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갈 곳이 없으며, 말초신경을 다 만족시켜도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들, 친정으로 쫓겨났다가 되돌아와 문간에 서 있는 여편네같은 가을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지금 그들은 이제 긴 여행을 떠날 차비를 해야 한다. 세월의 강물에 그리움을 띄운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 고독하고 처절한 작업인지 뼈저리게 학습할 각오를 해야 한다.

방황할 때는 좋아하는 노래일수록 눈을 감고 들어야 한다. 가능한 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얼굴은 보지 않는 게 좋다. 그걸 무시했기에 2년 가까이 출퇴근길에 태우고 다니던 가수 주현미를 라과디아 공항 근처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차창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찬바람 쌩쌩 불던 어느 일요일 오후 소파 위에 누워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 나타난 그녀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흘러간 뽕짝을 진지하게 부르던 옛날의 주현미가 아니었다. 짙은 화장, 삶의 무게에 의해 축 쳐진 눈매, 바랜 음색, 입 큰 것 말고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까까머리 시절 사모하던 국어 선생님을 하얀 눈 조명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네 캬바레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씁쓸하게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애수(哀愁), 왜 술에 취해 알딸딸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브루클린 세탁소 김씨와 브롱스 야채가게 이씨가 플러싱 노래방에서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를 때마다 왜 두 눈을 지긋이 즈려 감는지 주현미는 알까 모를까? 몰랐으면 좋겠다.

김소월
김소월의 ‘가는 길’에서 노래한 그리움 또한 대상이 없는 것이었다. 허리케인 지나간 후 맑게 갠 하늘에서 길을 잃은 흰 구름의 방황 같은 것, 그걸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래서 튀어나온 게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리움은 말이나 표현에 선행하는 것, 인생을 ‘가는 길’에 비유할 때 그런 그리움은 필연적이라는 게 김소월의 관찰이었던 것 같다. 상투적이고 관념적인 ‘가마귀’를 등장시켜 ‘서산(西山)에 해진다’ 즉 ‘좋은 세월(시절)이 막을 내린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게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기실 마지막 연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또한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일대(같은 세대)에서도 새 사람이 옛 사람을 대신한다(長江後浪推前浪, 一代新人換舊人)’는 중국의 격언을 슬그머니 차용한 것으로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는 길’은 문학청년의 습작(習作)같은 것이라고 지나치지 않다. 김소월이 활동했던 시기가 한국 현대시의 발아기였고 그 시기에는 ‘상투적이고 관념적인 소재에의 의존’이나 이미지나 수사의 표절을 문제 삼는다는 게 쓸데없는 시비걸기(?)로 간주됐기에, ‘가는 길’ 또한 ‘한국의 명시’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 김소월이 인생 내리막길에 선 늙은이의 정서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앞만 보고 살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다봤을 때 후회의 징검돌들이 끝없이 놓여진 것을 확인하고는 긴 한숨 내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이라는 건 그 후회의 징검돌들을 건너올 때 놓치거나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miss’ 또한 본래는 ‘놓치다’ ‘잃어버리다’라는 의미다. 도대체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잃어버렸나? 먹고사느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르면서 사람의 눈빛만 봐도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대충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 앉은뱅이책상에다 촛불 켜놓고 시를 쓸 수 있을까? 누구를 죽도록 사랑하여 비 오는 장충단 공원 벤치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을까? 변두리 극장 귀퉁이 좌석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를 보고 눈물 흘릴 수 있을까?....고백컨대 이제는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런 ‘자신 없음’을 ‘그리움’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 꿋꿋하게 세우고 싶지만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변한다는 것도 이미 골백번도 더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나 꺾으며 먼 산 바라보던 도연명(陶淵明)도 “...머릿속에 먹물 든 남자는 늘 혼자 취해있고(一士長獨醉)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는 해가 다 가도록 깨어 있기에(一夫終年醒) 취하고 깨어 있음을 서로 비웃어(醒醉還相笑) 말을 해도 서로 맞지 않는다(發言各不領)...”고 긴 한숨 내쉬지 않았던가?! 병입고황(病入膏肓), 치료약도 없다. 그립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립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장진주(將進酒) - 관주(觀酒)들을 위한 권주가


將進酒(장진주)

琉璃鐘(유리종) : 유리잔
琥珀濃(호박농) : 호박빛 액체
小槽酒滴眞珠紅(소조주적진주홍) : 작은 술통의 술방울 진주처럼 붉네
烹龍炮鳳玉脂泣(팽룡포봉옥지읍) :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니, 옥 같은 기름 눈물 흘러내리고
羅屛繡幕圍香風(나병수막위향풍) : 수놓은 비단으로 병풍 치니, 향기로운 바람이 에워싸네
吹龍笛(취용적) : 용의 피리를 불고
擊鼉鼓(격타고) : 악어 가죽 북을 치니
皓齒歌(호치가) : 하얀 치아의 미인이 노래하고
細腰舞(세요무) : 가는 허리 미인은 춤을 추네
況是靑春日將暮(황시청춘일장모) : 하물며 이 청춘도 저물려하는데
桃花亂落如紅雨(도화난락여홍우) : 복사꽃도 붉은 비처럼 어지럽게 떨어지는구나
君終日酩酊醉(권군종일명정취) : 그대여 종일토록 흠뻑 취하여 보라
酒不到劉伶墳上土(주부도유령분상토) : 술이 유령(劉伶)의 무덤 흙 위엔 도달하지 못하였도다

                                                       <이하(李賀); 790년-816년>

구멍으로 술술 잘도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라고 명명했다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부어라 마셔라 나도 취하고 세상을 취하게 만들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시인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로 따지자면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수는 없는 ‘관주(觀酒)’로 승단(昇段)한 것 같다. 술 한 잔 마시면 잇몸이 붓고, 두 잔 마시면, 울적해지면서 고향 생각이 나고, 세 잔 마시면 그 다음 날 아침 머릿속과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정신력과 체력이 쇠퇴하여 몸이 술을 즐기는 게 아니라 술이 몸을 혹사시킨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이빨이 바닷가 오두막 사립문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한 이후 딱딱한 음식을 씹지 못해 씹지 않고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술을 너무 많이 즐긴 탓이리라. 자의반 타의반 술을 끊게 생겼다. 나이 50 중반에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나 술을 끊었다”고 침 튀기는 친구들의 알량하고도 서글픈 속사정을 이해하게 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인가?! 지난 연말 한국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모 한인 단체장으로부터 기사 잘 써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로 받은 조니워커 블루의 뚜껑을 차마 열지 못하고 침만 꿀꺽 이리 만지고 저리 살펴보고만 있음에 고참 관주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의 중장년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재수생 시절이었다. 명문대로 상징되는 제도권 진입을 거부당했다는 열등감과 모멸감을 삭히는 한편 “내가 취하면 세상도 취한다”고 굳게 신봉하여 세상 돌아가는 꼴이 못마땅할 때마다 술을 마셨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로 배운 게 술판 밖에 없어서 기분 좋아 한 잔 기분 나빠 한 잔, 시나브로 술을 친구로 삼게 됐던 것 같다. 시인묵객이나 한량으로 행세하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한자문화권의 전통의 격려(?)를 받으면서 부어라 마셔라 청춘을 술에 절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어깨에 짊어진 사회적 체면과 책임감을 내려놓을 때도 술기운을 빌렸던 듯하다. 술에 취해 한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들 틈에서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을 때나, 망가져서 긴장을 풀고 싶을 때나, 서먹서먹한 인간관계에 기름칠을 하고 싶을 때 마신 술을 돈으로 환산하면 집을 몇 채 장만하고도 남았을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 다정한 벗과 이제는 헤어져야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다. 섭섭하다 못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관주’에서 머무르는 수밖에. 더 이상 미련을 홀짝거리다가는 주도 18단계의 마지막 ‘열반주’로 승단할까봐 겁난다. 

이하 시선집, 1962년
한흔 출판사
염세적이고 몽환적이어서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도 관주(觀酒)에 머물렀던 것 같다. 몰락한 당 황실의 후예로 17세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시재를 인정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벼슬길까지 막혀 능가경(楞伽經)과 초사(楚辭)나 읽으면서 “이제 길이 이미 막혔거늘(祗今道已塞) 어찌 꼭 머리가 희어지기를 기다리랴(何必須白首)”고 탄식했던 그는 양보다는 질을 즐겼던 진정한 의미의 애주가였다. 술 그 자체보다도 술자리의 분위기에 취했다. 그에게는 음주가 곧 탐미(眈美)였던 것 같다. ‘유리종(琉璃鐘) 속의 호박농(琥珀濃)’을 요즘말로 풀면 최고급 크리스탈 술잔에 담긴 최고급 스카치위스키나 코냑, 종이컵에 싸구려 화학주를 마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바, ‘하얀 치아의 미인’과 ‘가는 허리 미인’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술 한 잔을 마셔도 깔끔하고 고상하게 마셨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랬다. 이하는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깔끔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했다. 20세 때 그의 재능을 인정한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추천을 받아 진사시험을 치르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사(進士)의 ‘진(進)’이 음이 같으므로 시험을 치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관습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성격 자체가 그러했다. 약관의 나이에 백발이 되어 별종(別種) 의식을 부풀린 탓도 있겠으나, 성격이 섬세하고 고아하여 시정의 탁류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는 “천제(天帝)가 백옥의 높은 누각을 세운 기념으로 시를 짓게 하려고 나를 부르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하를 기려 ‘이장길 소전(李長吉 小傳); 장길(長吉)은 이하의 자(字)’을 지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어느 날 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상제께서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하려 한다’고 쓰인 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죽었다”고 부풀리기도 했다. 그 이후 문인의 죽음을 “백옥루(白玉樓) 안의 사람이 된다”고 표현하게 됐다. 마지막 구절 "酒不到劉伶墳上土(주부도유령분상토)"는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서 술을 무척이나 즐겨 ‘주덕송(酒德頌 )’까지 지었던 서진(西晉)의 시인 유령(劉伶)의 고사를 상기시킨 것, 유령은 자신이 언제 술에 취해 죽을 지도 모른다며 외출할 때 항상 괭이를 들고 다녔는데, 정작 그의 묘에는 술이 부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죽으면 못 마시는 술, 살아 있을 적 실컷 마시라는 충고(?)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눈으로만 즐기게 된 이 세상의 모든 ‘관주’들에게 이하의 ‘장진주’를 권한다. 바라보고 만지작거릴 술이 없으면 지난 연말에 받은 조니워커 블루를 기꺼이 내어 주리라.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정을 함께 공유하면서.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산중문답(山中問答) - ‘비인간(非人間)’을 지향한 ‘인간(人間)’


산중문답(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나에게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매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로워지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 꽃잎 물위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로세  

                                                      <이백(李白); 701년-762년>

람은 사회적 동물,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사람 인(人)은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문 문(門) 속에 해 일(日)을 넣은 사이 간(間)의 원형은 ‘日’ 대신 ‘月’이 들어 있는 틈 한(閒)이었으나 인간이 달보다는 해에 맞춰 활동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나서는 ‘間’으로 굳어졌던 바, ‘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나 그 사회의 구성원을 말한다. 이른 바 ‘삼간(三間)’의 하나다. 고대 중국인들은 광대무변한 우주 즉 하늘[天]과 땅[地] 사이를 공간(空間)이라고 했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시[時]의 영속을 출생이나 사망 등 특정한 사건과 사건 사이로 토막 내 기억하는 것을 시간(時間)이라고 했으며, 그 공간과 시간에서 태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것을 인간(人間)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유기적 관계보다는 개체적 존재를 강조하는 ‘인(人)’과는 말맛이 확연히 다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산다는 게 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욕망 추구다. 속세(俗世)의 속(俗)자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俗’은 사람 인(人)에 곡식 곡(穀)의 간자체인 골 곡(谷)이 붙은 것이고, ‘谷’은 아가리를 크게 벌린 골짜기의 형상을 그린 것인 바, 먹고사는 문제로 아옹다옹하면서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덤벼드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찰이 읽혀진다. 영어로 말하자면 ‘interest’다. ‘interest’의 뿌리는 ‘사이’를 뜻하는 접두사 ‘inter_’에 ‘놓이다’ ‘존재하다’라는 의미의 ‘esse’가 붙은 ‘interesse’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돈이나 명예 또는 권력 등의 관심사를 말한다.

이백 초상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대해 혹자는 도연명(陶淵明 ;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세상살이의 핵심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못 본 척 했던 이백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백이 도연명의 3,4백년 후배(?)여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속세와는 확실하게 유리된 이상향(理想鄕)을 꿈꿨던 반면 이백은 ‘산중문답’에서 지저분한 인간사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극복하고자 애썼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알고도 안 하는 것과 몰라서 안 하는 것은 천지차이, 흔히 이백을 ‘시선(詩仙)’이라고 하여 일부러 인간사를 멀리한 산중의 도사쯤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 이백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겪는 갈등과 고뇌를 천형처럼 수용하려 했던 ‘人間’이었다.  

인간이라는 말이 한정하고 있듯이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 이백 또한 그걸 절감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산중(山中)’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는 ‘인간(人間)’의 상대적 개념, 거기에 인간세상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인 문(問)과 답(答)을 대비시킨 것이야말로 모순이라면 모순, 창녀에게 순결이 무어냐고 묻는 장난기가 도를 넘어 자조와 자학으로 치닫고 있음을 본다. 먹고사는 욕망을 추구할 하등의 필요나 당위가 없는 산중에서 사는 이유를 묻는 덜 떨어진 놈에게 진지하게 답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더니 마음이 절로 한가로워지더라는 지독한 경멸이 바로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다. 7언절구의 경우 1,2,4구에 운(韻)을 맞추는 바, ‘산중문답’의 경우 첫째 구의 ‘산(山)’과 둘째 구의 ‘한(閑)’, 넷째 구의 ‘간(間)’이 운을 이루고 있는데, ‘산’이 이상향이라면 ‘한’은 그걸 추구하는 심정적 태도를 말하고 ‘간’은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현실 인식, 그걸 복숭아 꽃잎이 물위에 떠 흘러가듯 자연스레 꿰맞춘 천재성과 치밀함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낙천적이고 호방했던 이백에게 있어서 별천지(別天地)는 인간과 무관한 선경(仙境)이 아니라 ‘비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人間’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고뇌를 벗어나는 지름길은 ‘非人間’, 그걸 추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술을 좋아했던 것도 알콜 중독자들처럼 술 그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맨 정신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여이동소만고수(與爾同消萬古愁)! 저 유명한 ‘장진주(將進酒)’의 끝을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을 삭여보리라”고 맺은 것도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시름을 술로써나마 달래보자는 게 아니었던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면서도 ‘비인간’을 지향했던 이백이야말로 진짜 휴머니스트였는지도 모른다. 

강촌(江村) - '쉰세대' 남자의 고독과 체념

매사추세츠 보스톤과 캠브릿지 사이를 흐르는 찰스 리버 풍경.  나이 들어 강가에서 살면 왠지 쓸쓸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촌(江村)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가 마을을 안고 흐르니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 강촌의 일마다 그윽하구나

自去自來堂上燕 (자거자래당상연)    절로 가고 절로 오는 건 집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驅 (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운 건 물 가운데의 갈매기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마누라는 종이에 장기판이나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병이 많아 바라는 바 약물(藥物) 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보잘 것 없는 몸이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두보; 712년-770년>

자(男子)의 남(男)은 그 옛날 생산의 원천이었던 밭 전(田) 아래 힘 력(力)이 붙은 것, ‘생산성’을 상징한다. 남자가 그걸 상실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요즘 인생 내리막길에 접어든 ‘쉰세대’ 남자들이 명퇴다 뭐다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세상 경쟁에서 밀려나 낙오자가 됐을 때 극심한 충격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데 대한 당혹감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당혹감을 곱씹어야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서럽건만 이빨은 사립문처럼 흔들흔들, 노안이 돼버린 두 눈은 신문지의 활자 따위에도 조롱을 당하는데, 아랫배는 주책없이 불룩 튀어나오고...그럴 때마다 온몸을 감싸는 건 무기력감과 고독감 뿐, 남자는 갑자기 자신이 부쩍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두보 초상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49세 때 성도(成都)에서 처자식과 함께 초당을 짓고 모처럼 만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760년 어느 여름날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7언율시(七言律詩) ‘강촌(江村)’도 그런 ‘쉰세대’ 남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후대 사람들은 두보를 ‘시성(詩聖)’이라고 추앙하고 있지만 당대의 두보는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었다. 남편이나 가장으로서의 생활력은 시쳇말로 젬병이었다. 30대 중반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이러 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에게 부(賦)를 바쳤으나 아무런 감투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던 참 무능한 가장이었다. 755년 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봉상(鳳翔, 장안의 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간 덕분에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으나 얼마 후 쥐뿔도 없이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옷을 벗는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주(華州)의 지방관리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진주(秦州)의 천수시(天水市)와 동곡(同谷)의 성현(成縣)을 거쳐 사천의 성도에 정착한다.

성도는 사천성(四川省)의 성도(省都)로서 삼국시대에는 유비가 이곳에서 촉한(蜀漢)을 세웠고 안록산의 난 때 현종이 피란하여 남경(南京)이라 일컫던 곳, 논밭이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여 없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먹고살기에는 불편함이 없는 곳이어서 두보는 이듬 해 봄 성도 교외의 완화계(浣花溪) 언저리에 완화초당(浣花草堂, 물론 후대 사람들이 이름붙인 것)을 짓고 살았다.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던지 이 때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썼고 친구 엄무의 추천으로 절도사 참모로 출사하여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보가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촌’은 세상 풍파 겪을 만큼 겪은 두보가 자신이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지은 작품, 흔히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한 작품”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천만의 말씀, 인간의 ‘절대고독’이 진하게 묻어난다. 총 8구가 두 구씩 대구를 이루는 수-함-경-미(首頷頸尾) 4개연의 점층과 고조가 백미다. 청강(淸江)의 흐름은 세월의 흐름, “긴 여름 강촌의 일마다 그윽하다”는 건 흘러간 그 옛날의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의미, 그런 감상의 멍석 위에서 시인은 물질적 욕망 추구로 인해 고독해지는 인간의 삶을 한탄한다. 높일 상(尙) 아래 흙 토(土)가 붙은 집 당(堂)은 생계의 둥지,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친지들의 발길이 끊어진 자신의 집에 절로 찾아오고 가는 것은 ‘집 위의 제비’ 뿐이고 자신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 속의 갈매기’들만 서로 친하고 가깝다는 관찰이 쓸쓸하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 여자가 갱년기 지나고 나면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겁이 없어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늙은 아내는 세상사를 장기판 위의 놀음쯤으로 여기고, 기운이 팔팔하여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아들은 ‘곧은 바늘을 두드려 굽은 낚시를 만들고’(무엇이든지 억지로 밀어붙이고), 그런 마누라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신은 몸도 병들고 마음도 지친 나머지 약물(藥物)이나 구하고 있다는 고백이 너무나 처절하다.

자신을 미구(微軀) 즉 ‘하찮은 몸’이라고 표현하는 두보의 자학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런 ‘하찮은 몸’이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약(藥)은 풀 초(艹) 아래 즐길 락(樂)이 붙은 것, 웃기는 이야기지만 두보가 구하고자 하는 ‘약물’이라는 것 또한 육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나 소염제가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누그러뜨려주는 술이나 담배 따위의 ‘하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위스키 홀짝이면서 담배 연기 길게 내뿜어본 실업자 아저씨들만큼은 진심(?)으로 공감하리라 믿는다. 생산력을 상실한 나머지 마누라와 자식의 눈에게까지 ‘하찮은 존재’로 비쳐질 때 남자는 스스로 하찮아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