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8일 금요일

Her Kind - 먼 훗날에도 기억될 ‘그런 여자’


Her Kind (그런 여자) 

I have gone out, a possessed witch, 
난 밖으로 나돌았지요, 홀린 마녀, 
haunting the black air, braver at night; 
검은 공중에 출몰하고, 밤에 더 용감하지요; 
dreaming evil, I have done my hitch 
악마를 꿈꾸면서, 갈고리를 걸어왔지요(기웃거렸지요) 
over the plain houses, light by light: 
평범한 집들 위에, 불빛 하나하나마다; 
lonely thing, twelve-fingered, out of mind. 
외로운 물건, 손가락이 열두 개, 제 정신이 아닌 
A woman like that is not a woman, quite. 
그런 여자는 여자가 아니겠지요, 확실히. 
I have been her kind. 
난 그런 여자랍니다. 

I have found the warm caves in the woods, 
난 숲 속에서 따뜻한 동굴들을 찾았어요 
filled them with skillets, carvings, shelves, 
프라이팬들과 큰 포크들과 선반들로 가득 차 있더군요 
closets, silks, innumerable goods; 
작은 방들, 비단들,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 
fixed the suppers for the worms and the elves: 
벌레들과 요정들을 위해 저녁상을 차려줬지요 
whining, rearranging the disaligned. 
흐느껴 울면서, 흐트러진 것들을 다시 정돈했지요 
A woman like that is misunderstood. 
그런 여자는 이해받지 못하지요 
I have been her kind. 
나는 그런 여자랍니다. 

I have ridden in your cart, driver, 
나는 당신의 수레에 탔어요, 마부, 
waved my nude arms at villages going by, 
내 벌거벗은 팔을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흔들었지요 
learning the last bright routes, survivor 
마지막 환한 길을 배웠지요, 생존자 
where your flames still bite my thigh 
당신의 불꽃들은 아직도 내 허벅지를 물어뜯고 
and my ribs crack where your wheels wind. 
당신의 바퀴들이 구를 때 내 갈비뼈는 부서져요 
A woman like that is not ashamed to die. 
그런 여자는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I have been her kind. 
나는 그런 여자랍니다. 

                                   <앤 섹스턴(Anne Sexton); 1928년~1974년> 

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이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쓴 건 1879년의 일이었다. ‘인형의 집’에서 변호사의 아내 노라는 남편의 억압과 비겁한 모습에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온다. 요즘 같으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되었겠지만 모든 아내들이 남편에게 종속돼 있던 당시 아내가 스스로의 삶을 찾아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파격적이어서 무대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페미니즘(féminisme)’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한 것은 1837년 프랑스의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 이전부터 “여성의 권리 신장이 모든 사회 진보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말 그대로 ‘공상적’ 주장으로 그치고 말았다. 또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公理主義)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하나의 성이 타 성에게 법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이는 인류 발전에 크나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책까지 썼지만 21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여 ‘지적 동지’로 삼았던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Harriet Taylor) 같은 여성을 위한 개혁론이었고, 하원의원이 된 후 1869년 영국 의회 안에서는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좋은 생각일 뿐’이라는 호응밖에 받지 못했다. 

여성들의 권리 신장이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여성 권리신장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이었다. 전장으로 차출된 남성들의 빈 자리를 채우고 공산주의 혁명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참전국들은 여성을 가정 밖으로 끌어내고 러시아 혁명 정부는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완전히 동등한 정치권을 주는 한편 사회생활을 권장했지만 여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성에 의한 시대적 변화였을 따름이었다. 여성들에게는 가장 불행한 전쟁과 혁명이 여성 권리신장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미국서도 1920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줬으나, 여학생의 대학입학을 허가한 것은 하버드가 1943년이었고 예일은 1969년인데서 보듯, 가사노동이나 자녀 양육 등등 보이지 않는 장벽이 겹겹이 놓여 있다는 것은 미국 남성들 또한 부인하지 않는다. 아직도 여자가 결혼하면 대부분 남성의 성(姓)을 따라간다. 

앤 섹스턴 시선집, 2000년
하우턴 미플린 하코트
여권신장 운동이 거세게 일던 1900년대 중반 활동했던 시인 앤 섹스턴(Anne Sexton, 혼전 이름은 Anne Gray Harvey)이야말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여성이었다. 1백년 쯤 전 또는 1백년 후 쯤 태어났더라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 1928년 당시만 해도 매우 보수적이었던 메사추세츠 뉴턴에서 태어나 19세 때 알프레드 멀러 섹스턴(Alfred Muller Sexton) 2세와 결혼한 그녀는 26세 때 출산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걸린 뒤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 시도까지 한다. 그녀가 시작에 몰두하게 된 동기도 여성으로 태어나 겪는 불안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였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시의 소재나 주제 또한 여성으로서의 고뇌와 차별과 경험이었다. 월경, 낙태, 마약 중독 등등 당시로서는 여성의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던 것들을 직설화법으로 시작에 반영함으로써 술주정뱅이 대학교수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 및 섹스턴의 지음(知音)이었던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쓰(Sylvia Plath) 등과 함께 미국 시단에서는 ‘자기 고백 시인(confessional poets)’으로 불리기도 한다. 1966년 시선집 ‘살거나 죽거나(Live or Die)’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나 46세가 되던 해인 1974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 해 10월 4일 출판업자와 출판을 상의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낡은 모피코트를 입고 보드카를 끼얹은 후 차고에 들어가 차 엔진에서 배출되는 일산화탄소를 흡입함으로써 자살했다고 전한다. 

섹스턴이 1960년에 발표한 ‘Her Kind(그런 여자)’도 자기 고백들 중의 하나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용모의 아가씨 앤 그레이 하비가 ‘모범적인 가정주부’ 앤 섹스턴으로 살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처녀 적에는 ‘뭔가에 홀린 마녀(a possessed witch)’가 되어 꿈꾸며 살려고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제 정신이 아닌(out of mind)’ 여자가 아닌 여자(A woman like that is not a woman) 취급을 받았고, 결혼을 하면 ‘숲 속의 따뜻한 동굴들(the warm caves in the woods)’ 같은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벌레들과 요정들(the worms and the elves)’ 같은 남편과 자식들 저녁밥상이나 차리고 집안 청소나 하며 흐느껴 우는 게 고작이었고, 나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끄는 마차의 마부(driver)가 되어 동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민소매 팔뚝을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남편의 종속물로 전락한 나머지 자아를 상실하는 위기를 맞아 ‘생존자(survivor)’가 되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화형(火刑)을 당하는 마녀처럼 허벅지를 물어뜯기고 갈비뼈가 바스러지는 고통뿐이어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여자(A woman like that is not ashamed to die)가 돼버렸다는 고백이 처절하다. 이미 그 때 자신의 자살을 예견한 것이어서, 1974년 자살을 감행하기까지 십 수 년 동안 섹스턴이 얼마나 큰 고통과 고뇌에 시달렸는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다. 

섹스턴의 시상(詩想)이나 사상(思想)을 더듬어보면 지독한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 치고 섹스턴을 모르는 사람 없지만 섹스턴은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시인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그 만큼 그녀의 시재(詩才)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리라. 시라는 게 인간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인간의 정서 중 가장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게 고뇌와 고통이라면, 여성 권익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대에 여성의 고뇌와 고통을 정교한 시작으로 형상화한 섹스턴이야말로 시대를 대변했던 시인이 아닌가 싶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먼 훗날에도 섹스턴의 시가 끊임없이 읽혀지면서 시대를 뒤돌아보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 섹스턴 또한 ‘그런 여자(her kind)’로 기억될 것 같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송별(送別) - 그대와 내가 구름으로 다시 만나려니


送別 (송별)

下馬飮君酒 (하마음군주)   말에서 내려 그대와 술을 마시네 
問君何所之 (문군하소지)   그대에게 어느 곳으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君言不得意 (군언부득의)   그대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歸臥南山陲 (귀와남산수)   남산 언저리로 돌아가 숨어서 살려고 한다네 
但去莫復問 (단거막복문)   그렇다면 가시게나, 더 묻지 않겠네 
白雲無盡時 (백운무진시)   흰 구름 다하는 때가 없으려니(언제나 흰 구름 속이려니) 

                                           <왕유(王維); 699년-759년> 

람이 사는 게 삶이지만, 삶이 반복되면서 사람 또한 그 삶 속에 있게 되는 바, 그걸 전통(傳統)이나 관습(慣習)이라고 한다. 비유(比喩)나 상징(象徵)도 문화권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비둘기 만해도 그렇다. 여호와가 대홍수로 인간세상을 심판할 때 홍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노아에게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어다줬다는 기독교 성경 속 이야기를 진실로 믿는 서양 사람들은 비둘기를 보면 평화나 희망을 떠올리지만 살이 쪄서 잽싸게 날지 못하는 비둘기를 활로 쏴서 잡아먹고 사는 적도 부근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은 비둘기를 보면 군침을 흘린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구름도 동서양 사람들의 눈에 다르게 비쳐진다. 한자 구름 운(雲)은 하늘[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의 비 우(雨) 아래 수증기가 퍼지는 모양의 운(云)을 붙인 것으로서 매우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반면 영어 ‘cloud’의 뿌리를 파보면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신의 궁둥이를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궁둥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loutos’가 딸려 나온다. 자연 속에서의 장수를 최고의 덕으로 간주하는 도교 사상의 영향으로 한자문화권 사람들은 구름을 선계(仙界)의 상징으로 인식한 반면 정신세계의 뿌리가 그리스 신화 속에 닿아 있는 서양 사람들은 구름을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신의 궁둥이쯤으로 간주하여 좋지 않게 여겨왔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실제로 에드거 앨런 포우가 그의 명작 ‘아나벨 리(Annabel Lee)’에서 “한 떼의 구름에서 나온 바람이 나의 아름다운 아나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었다(A wind blew out of a cloud, chilling/ My beautiful Annabel Lee;)”고 자신(?)있게 쓴 것도 그 같은 문화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한자문화권에서 구름이 선계의 상징으로 굳어진 것은 도교(道敎)의 신선사상(神仙思想)에 힘입은 바 크다. 신선사상의 핵심은 도를 닦아 신선이 됨으로써 불로장생하는 것, 구름이 해․산․물․돌․소나무․불로초․거북․학․사슴 등과 함께 인간의 불로장생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지는 십장생도(十長生圖)에 등장하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도교는 후한(後漢, 서기 25년-220년) 말기 믿거나 말거나 전설 속의 인물 장도릉(張道陵)을 개조로 출현한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천사도(天師道)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기실은 그 이전부터 민간에서 유행해오다가 당(唐)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당시 자의반 타의반 벼슬살이와는 거리를 두고 자연 속에서 시문 짓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이백(李白) 등 많은 문인들이 도교에 심취했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왕유 시선, 1984년, 삼련서점
몇 번의 좌절을 경험한 후 인간세상을 멀리하면서 자연 속에서 산수를 벗 삼았던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 왕유(王維; 699년-759년)의 시나 그림 속에 구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당시의 사회상과 전통과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어머니가 열렬한 불교 신자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었던 왕유는 불교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자(字)까지 마힐(摩詰)이라고 했으나,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반란군의 포로가 돼 부역을 했다가 나중에 그것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하는 등의 우여곡절과 함께 속세에 환멸을 느낀 후, 망천(輞川; 지금의 허난성)에 별장을 짓고 시와 그림을 즐겼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에 심취하여 속세를 멀리했던 왕유를 가리켜 ‘시불(詩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왕유의 작품을 보면 유불선(儒佛仙)이 고루 나타나는 바, 유가(儒家)의 법도를 지키면서도 불교의 공(空)을 노래하는 한편 선경(仙境)을 동경했었고, 산수를 소재로 한 그림에도 특출한 재주를 보여 훗날 문인화의 원조격인 남송화(南宋畵)의 시조(始祖)로서 추앙을 받는다. 북송의 문장가 소식(蘇軾)은 “왕유의 시를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왕유가 개척한 문인산수화가 담백한 농담(濃淡)과 절제된 여백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정갈하게 가라앉혀주듯이 왕유의 시 또한 독자들에게 부담 없는 여운을 준다. 왕유의 시 가운데에는 송별(送別)을 읊은 것들이 유난히 많지만, 대부분 정한(情恨)에 휩싸이지 않고 담백한 여운을 주는 바, 그 또한 유불선에서 체득한 절제(節制)와 각오(覺悟)와 달관(達觀)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위에 예시한 송별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하다. 벗과 이별주를 마시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남산 언저리로 가서 숨어 살겠다고 하기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보내겠다는 것이다. 거기 슬픔이나 아픔, 미련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 구름 속에 묻혀 살겠다는 사람을 물어물어 다시 찾아가봤자 구름 속만 헤맬 것이라는 달관만 남아 긴 여운을 준다. 왕유의 또 다른 송별시 ‘산중상송파(山中相送罷)’도 그렇다. 

山中相送罷 (산중상송파)   산에서 서로를 보내고 나서 
日暮掩柴扉 (일모엄시비)   해 저물어 사립문을 닫네 
春草明年綠 (춘초명년녹)   봄풀이야 내년에도 푸르겠지만 
王孫歸不歸 (왕손귀불귀)   떠나간 그대 다시 오려나 안 오려나 

어디로 가느냐고 다시 묻지 않겠다는 것이나 벗과 헤어지고 나서 해가 저물자 사립문을 닫는 것이야말로 절제의 극치,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면 또 한 폭의 차분한 분위기의 문인화(文人畵)가 되지 않을까?!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시인은 모름지기 - 시(詩)와 선전․선동, 시인(詩人)과 혁명가


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김남주(金南柱); 1946년-1994년> 

(詩)란 무엇인가? 한자 ‘詩’는 말씀 언(言)에 관청 또는 절을 뜻하던 사(寺)가 합쳐진 것, ‘寺’는 손 우(又)와 마디 촌(寸)이 합쳐진 것으로서 본디 ‘모시다’라는 의미였던 바, 말 그대로 풀이하면 ‘말로 모시다’라는 의미이고 말로 모실 때에는 뜻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서경 (書經)의 순전(舜典)에도 “시는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늘인 것(歌永言)”이라고 정의돼 있다. 주(周)나라 때부터 전해 오던 시가(詩歌) 331편을 선별하여 ‘시경(詩經)’을 편찬한 공자(孔子)는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했다. ‘사무사’는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말한다. 영어권의 생각은 좀 다르다. ‘poem’의 뿌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poiein’, 여기서의 ‘창조’는 영원불변의 신의 세계인 이데아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수용하여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詩人)은 어떤 사람인가? 물론 ‘시를 쓰는 사람’을 일컫지만 시를 쓴다고 해서 다 시인 은 아니다. 시작(詩作)을 업(業)으로 삼아야 하고 쓴 시가 일반인들이 쓰는 시의 평균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는 묵시적 인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를 직업적으로 쓰다 보면 나름대로의 특성이 생기는 바, 그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시를 만드는 기술만을 강조한다면 ‘시인’이 아니라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을 ‘도공’이라고 불렀듯이 ‘시 만드는 기술자’ 즉 ‘시공(詩工)’이라고 불렸을 테니까. 그런 시인의 특성을 감안하여 시인에 대해 정의를 내린 사람들 중의 하나가 플라톤(Platon)이다. 플라톤은 영원불변의 이데아를 모방하는 테크네(techne, 기술)를 이미 자연에 재현되어 있는 것을 모방하는 ‘획득적인 테크네’와 자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테크네’로 나눈 후(이데아의 그림자), 재차 ‘생산적인 테크네’를 실물의 생산과 이미지의 생산으로 구분하고는(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 시는 일차 모방된 것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 즉 ‘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그렇듯 시는 사람들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물론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자극하여 연민 따위나 불러일으키므로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 바 ‘시인추방론(詩人追放論)’이다. 그러나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가 ‘사무사(思無邪’를 주장했듯이, 시에는 사악함이 없는 뜻만 담겨야 한다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었고 그런 시를 쓰는 시인 또한 사악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바, 시를 잘 짓는 사람을 관리를 뽑았던 것도 그런 발상 때문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김남주 첫 시집 '진혼가'
1994년 연구사
플라톤의 생각대로라면 시인은 감정을 충동질하여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바, 정치적 견해에 따라 폭군을 미화하는 서사시들이 난무하고 시가 선전․선동에 자주 이용됐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반면 공자의 생각대로라면 시인은 사악함이 없는 뜻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인 바, 자고이래 시인들이 폭군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섰던 것도 그런 신념의 표출이라고 하겠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주로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시를 썼던 전라남도 해남 출신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년-1994년)는 공자의 시론(詩論)을 신봉하면서도 플라톤의 시론을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아니 그 양자 사이에서 무척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첫 작품 ‘진혼가(鎭魂歌)’에서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고 독자들의 감성을 뒤흔들어 선동(?)한 데 이어 ‘시인이란 모름지기’라는 작품에서는 “불의한 권력이나 위선적인 권위에 머리를 숙이지 말고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이란 것들’에서는 “밤중에/ 홀랑 꾀벗고 마누라와 그것을 하다가 열렬하게 하다가/ 문득 사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나/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가 그것을 수첩에 적어놨더니/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하니까/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버린다."”고 시인으로서의 자괴와 고민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었다는 듯이 ‘시’나 ‘시인’에 대해 유달리 많은 시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김남주는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일견 ‘창작과 비평사’라는 문예전문지를 통해 등단했으므로 ‘시인’임에는 틀림없겠지만, 1977년 해남농민회 결성에 참여하는가 하면 1979년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는 등 평생 독재타도와 민중운동에 앞장섰던 바, 사상적으로는 혁명가라는 딱지가 더 어울려 보인다. 김남주의 편에 서는 사람들은 “김남주에게 있어서 시는 이 땅의 독재와 싸우는 무기였고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일상에 안주하여 부정과 불의를 눈감으려는 소시민적 태도에 가해진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시인과 혁명가를 겸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겠지만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판단하는 독재나 부정과 불의의 기준이 뭐냐? 일방의 정치적 견해라고도 볼 수 있는 김남주의 판단이 꼭 옳으냐?”고 반문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라는 것 또한 시간(시대)과 공간(상황)과 인간(시대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김남주가 시인이냐 혁명가냐 따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우문인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이 시인이라고 여기면 시인이고 혁명가라고 여기면 혁명가일 뿐, 김남주의 시가 공산당이나 독재자들의 생경한 구호보다는 감동적이어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지는 바, 아이러니컬하게도 김남주의 또 다른 작품 ‘시인이여’의 첫 연이 우문에 대한 현답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김남주는 “암흑의/ 시대의/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침묵일까/ 관망일까/ 도피일까/ 밑 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라고 자문하고는 ‘첫 닭의 울음소리’나 ‘전투에의 나팔소리’나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라고 반신반의했었다. 혹여 그 ‘반신반의’야말로 시인으로서의 운명적인 고뇌가 아닌지?!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Brahma - 나에게도 ‘신성(神性)’이 있다


Brahma (브라흐마) 

If the red slayer think he slays,             피에 굶주린 살인자가 살인한다고 생각하거나, 
Or if the slain think he is slain,              혹은 살해당하는 자가 살해당한다고 생각하면, 
They know not well the subtle ways     그들은 미묘한 방법들을 잘 모르는 것, 
I keep, and pass, and turn again.         내가 존속하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그 오묘한 법을. 

Far or forgot to me is near;                   내게는 먼 또는 잊혀진 것이 가까운 것; 
Shadow and sunlight are the same;       그림자와 햇빛은 동일한 것; 
The vanished gods to me appear;         사라진 신들이 내게 나타나고; 
And one to me are shame and fame.     내게는 수치심과 명성이 하나. 

They reckon ill who leave me out;         그들이 나를 내팽개친다면, 잘못 생각한 것; 
When me they fly, I am the wings;        그들이 내 위를 날아갈 때, 나는 날개; 
I am the doubter and the doubt,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자 의심, 
And I the hymn the Brahmin sings.        나는 브라흐민이 노래하는 찬송가. 

The strong gods pine for my abode,      강한 신들도 내 거처를 동경하고 
And pine in vain the sacred Seven;        헛되이 일곱 성인들도 그리워한다. 
But thou, meek lover of the good!         그러나 그대, 온순한 선 애호가여! 
Find me, and turn thy back on heaven.  나를 찾고, 천국에 등을 돌려라.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1882년> 

이 세상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자신이 경험하고 또 사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 인간의 한계(限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고이래의 숱한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도 그런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의 장자(莊子)가 ‘장자’의 첫 머리 소요유(逍遙遊)에서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북명(北冥)의 물고기 곤(鯤)이 등의 넓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붕(鵬)으로 변해 남명(南冥)으로 날아갈 때 파도가 삼천리나 솟구친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또 불가(佛家)에서 천인(天人)이 3년마다 한 번씩 내려와 천의(天衣) 자락으로 둘레가 40리나 되는 큰 바위를 스치고 올라가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반석겁(磐石劫)이라고 부르는 등 인간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무량수(無量數)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것도 인간의 상상으로도 이해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처녀가 애를 밴다든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믿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예수에게 귀의할 수 있다고 권면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근대국가로 발돋움 하던 미국의 전환기에 나타난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라는 것도 인간의 한계 극복 노력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신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신에게 떠맡기던 인간이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자립을 시도했고, 인간의 이성적 직관을 중시하는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 또는 인간의 감각으로 수용하여 축적된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노력해보았으나 그래도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았기에, 초월적 신성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초월적인 존재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게 초월주의였다. 자연이 초월적인 신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인간 또한 그 자연 및 신성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머슨 시선집,  2004년
하버드 대학출판부
초월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7대에 걸쳐서 성직(聖職)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1882년)에 의해 물꼬가 터졌다. 그 이전 개신교의 교리가 인간을 ‘죄인’으로만 몰아 세웠던 반면, 하버드 대학 신학부 출신 에머슨은 교인들의 영혼을 옥죄는 교회의 편협한 종교적 독단과 형식주의를 강력하게 비난했던 바, 1829년 개신교회 유니테리언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로 부임했으나 교회가 반발하여 1832년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835년 귀국한 에머슨은 산업혁명 후 급격히 확산된 물질문명을 혐오하여 자연 속에서 사색을 쌓아 시와 수필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철인(哲人)’이라는 칭송과 함께 당시의 미국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36년에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저술 <자연(Nature)>은 개인의 직관으로 얻어진 지식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인간도 신성의 일부이므로 양도할 수 없는 개인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여 미국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머슨의 초월주의는 인도 등 동양사상에 영향 받은바 크다는 게 중론, 그의 시 ‘브라흐마(Brahma)’도 그런 증거들 중의 하나다. ‘범천(梵天)’이라고 한역(漢譯)되는 ‘브라흐마’는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의 신, 낮에 43억 2천만년 동안 지속되는 우주를 창조하고 밤이 되어 잠이 들면 그 우주가 그의 몸으로 흡수되는데, 이 과정이 브라흐마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고 전한다. 기독교 출신의 에머슨이 기독교의 여호와 대신 힌두교의 ‘브라흐마’를 시의 소재로 삼은 것은 여호와나 브라흐마나 이름만 다르고 믿는 사람들만 다를 뿐 기실은 동일한 초월적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에머슨의 ‘브라흐마’는 여호와로 환치해도 무방할 뿐만 아니라, 종전의 기독교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피조물인 인간을 분리하여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반면 에머슨은 인간에게도 신성(神性)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본다. 

시의 가장 큰 목적은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에머슨의 ‘브라흐마’는 ‘좋은 시’는 아니다. 혹평을 하자면 시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종교관을 시적 운율에 맞춰 풀어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에머슨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더 큰 대접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줄기차게 읽히면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시가 인간의 감성(感性)보다는 영성(靈性)을 파고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 바, 시가 그런 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혹평을 삼가야할 것 같다. 왜? 에머슨의 그런 시작(詩作)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등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후배 시인들의 작품은 에머슨 이전 시인들의 작품들 못지않게 많은 독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냈으니까.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신현곡(神絃曲) - ‘귀재절’이 귀신 부르는 노래



神絃曲 (신현곡) 

西山日沒東山昏 (서산일몰동산혼) 서산에 해 지고 동산에 어둠 깔리자 
旋風吹馬馬踏雲 (선풍취마마답운) 회오리바람 말에 불어 말이 구름마다 밟는다 
畵絃素管聲淺繁 (화현소관성천번) 그림 속 비파와 흰 피리 소리 얕게 깔리다가 뒤섞이고 
花裙綷綵步秋塵 (화군최채보추진) 꽃 치마 오색 비단 걸음 가을먼지 일으키네 
桂葉刷風桂墜子 (계엽쇄풍계추자) 계수나무 잎 바람으로 씻겨지자 나무 열매 떨어지고 
靑狸哭血寒狐死 (청리곡혈한호사) 푸른 털 살쾡이 울어 피 토하고 추운 여우 얼어죽네 
古壁彩虯金貼尾 (고벽채규금첩미) 낡은 벽에 그려진 용은 꼬리에 금박을 두르고 
雨工騎入秋潭水 (우공기입추담수) 비 만드는 신령 말을 타고 가을 못에 들어가는데 
百年老鴞成木魅 (백년노효성목매) 백년 늙은 부엉이 나무 도깨비 되니 
笑聲碧火巢中起 (소성벽화소중기) 웃음소리 푸른 불 둥지에서 일어나네 

                                              <이하(李賀); 790년~816년> 

람이 귀신(鬼神)에게 홀리면 ‘헛것’이 보인다고 했다. 그 ‘헛것’을 ‘환상(幻像)’이라고 한다. 환(幻)은 베를 짤 때 쓰는 북[予]이 굽은 막대기 끝에서 어지럽게 움직이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서 ‘헛보이다’ ‘미혹하다’ ‘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그러므로 귀신에 홀려 환상을 본다는 것은 귀신이 변한 게 눈에 보인다는 의미다. 

귀신이라는 게 뭔가? 영혼불멸을 믿었던 고대 중국인들은 사람은 정기신(精氣神) 즉 육신(肉身)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靈)의 생명력인 신(神)이 기(氣)에 의해 결합되어 생명을 이루고 있는 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의 운행이 정지되어 정(精)과 신(神)이 분리되는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더라도 정(精)은 백(魄, 얼)이 되어 땅으로 흩어지고 신(神)은 혼(魂, 넉)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 가운데는 사람의 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온 것도 포함하므로 그런 신이 변하여 나타날 때는 사람과 관계되는 것 즉 이승의 그 어떤 것으로 변하여 나타날 확률이 매우 크다는 게 한자 문화권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지금도 중국서는 제야(除夜)의 12시가 지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들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접신의식(接神儀式)을 행하는 바, 집집에서 부엌이나 곳간 등에 제물과 함께 해당 신의 화상(畵像)을 걸어놓고 분향하는데, 그 때 좋지 않은 신들일랑 깜짝 놀라서 집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폭죽을 터뜨리기도 한다. 인간의 혼이 변하여 신이 되기에 배가 고플까봐 음식을 차리기도 하고 폭죽을 터뜨리면 깜짝 놀랄 거라고 믿는 것이다. 

후대에 그려진 이하의 초상. 이하는 삶이 불우하고
병약했던 탓에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는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죽음, 귀신, 눈물, 곡성 등등 귀신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시어들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거니와 시상(詩想)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게 많았다. 그 만큼 죽음이나 귀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이겠지만, 기질이 매우 염세적인 탓도 컸던 것 같다. 운도 없었다. 몰락한 당 황실의 후예로 17세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시재를 인정받은 후 그의 권유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進)이 같은 음이므로 휘(諱)를 범하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얼토당토않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한유가 그런 비난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명문장 ‘휘변(諱辯)’을 써서 이하를 감싸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유는 ‘휘변’에서 “...父名晉肅(부명진숙, 아버지의 이름이 진숙이라 하여) 子不得擧進士(자불득거진사, 아들이 진사가 될 수 없다면) 若父名仁(약부명인, 만일 아버지의 이름이 ‘인(仁)’인 경우에는) 子不得爲人乎(자불득위인호, 아들은 사람이 될 수도 없단 말인가?)”라고 꾸짖었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봉례랑(奉禮郞)이라는 미관말직을 얻어 2년 남짓 지냈으나 그나마 건강이 좋지 않아 사직한 후 불우한 나날 속에서 염세적이고 몽환적인 시나 쓰면서 울분과 비애를 달래야만 했다. 

이하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귀신을 벗 삼았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신현곡(神絃曲)’을 보면 흡사 귀신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마냥 음산하지만은 않다. 무섭거나 혐오스럽지도 않다. 비파와 피리 소리의 뒤섞임 속에서(청각적 이미지) 꽃무늬 비단치마의 펄럭이게 하고(시각적 이미지) 꼬리에 금박 두른 용까지 등장시킴으로써 현란하고도 역동적인 한 폭의 ‘귀신도(鬼神圖)’를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백년 늙은 부엉이 둥지 한가운데서 웃음소리 푸른 불이 치솟는다는 대목에서는 괴기한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이후 많은 시인들이 이하의 ‘신현곡’을 흉내 내 ‘귀신의 노래’를 지었지만 이하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자(字)가 장길(長吉)이어서 ‘이장길’이라고도 불리는 이하는 27세로 숨을 거두면서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백옥루에 상량문을 지으러 간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와 통찰(洞察)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서 삶과 죽음을 노래했다는 평가가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닌 듯싶다. 그가 그의 벗 진상에게 주는 시 ‘증진상(贈陳商)’에서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를 끌어당기네(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랴(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라고 읊었던 것도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들 꺼려하고 혐오하는 죽음과 귀신까지도 아름답게 미화하여 시의 소재로 끌어올린 이하야말로 말 그대로 ‘귀재절’이었던 것 같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어머니의 그륵 - 표준어를 부끄럽게 만든 사투리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2001년 ‘현대시학’, 정일근(鄭一根); 1958년-          > 

어(言語)를 뜻하는 영어 ‘language’의 뿌리는 ‘혀’를 뜻하는 라틴어 ‘lingua’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척한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개인적 발화(發話) 즉 ‘파롤(Parole)’과 그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발화행위를 가능케 하는 추상적 체계 즉 ‘랑그(Langue)’로 나누어 설명했었다.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체계나 규칙이 랑그라면 그게 입안에서 혀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파롤, 한자어 ‘언어(言語)’도 그런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자 말씀 언(言)은 혀 설(舌)이 변해 만들어진 것, 그걸 우리[吾]가 주고받으면 ‘어(語)’가 된다. 머릿속에 어떤 의미를 떠올린 후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만들어내는 음이 ‘言’이라면 그걸 너와 내가 같은 의미로 알아들을 때 비로소 ‘語’가 된다는 말이다. 또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말을 만들어내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한다면 그걸 사회적으로 인정하여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을 ‘언어의 사회성(社會性)’이라고 한다. 

사회성이 지역적 또는 계층적으로 한정된 언어를 ‘방언(方言, 사투리, dialect)’라고 한다. 'dialect'의 뿌리는 ‘담화’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diálektos’로서 특정한 무리가 자기네들만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어(隱語)나 아직은 사회적 언어체계를 습득하지 못해 간단한 음성체계로 의사를 전달하는 유아어(乳兒語)등과는 다르다. 그 방언이 개인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을 ‘idiolect(굳이 번역하자면 ‘개인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라도 혀가 짧은 사람과 긴 사람 또는 성격이 느긋한 사람과 급한 사람 등등 개인적 차이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는 바, ‘개인어’를 보면 그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이나 사회적 수준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들은 “어떤 언어는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언어 집단에 속한 개인어의 총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은 나라는 손바닥만 하지만 높은 산이 울타리처럼 막힌 데다 오랫동안 농경정착문화를 유지해온 탓에 사투리가 유난히 많다.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 말씨가 다르고 제주도 사람들의 말씨를 육지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만큼 외부와의 단절이 오래 지속됐다는 증거다. 사투리가 표준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지역감정’이라는 고질병이 말해주듯 지역 사람들이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사투리를 조탁(彫琢)하여 시어(詩語)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 또한 적지 않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서정주(徐廷柱)는 전라도 사투리를 토속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양념으로 사용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경상북도 경주 출신의 박목월(朴木月)은 아예 <경상도의 가랑잎>(1968년 민중서관)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많은 시인들이 토속적 분위기 또는 향수(鄕愁)를 손쉽게 환기하기 위해 사투리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효과는 미지수였던 것 같다. 박목월은 <경상도 가랑잎>에 실린 ‘사투리’라는 작품에서 “우리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런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고 읊었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 또한 그 시를 읽으면서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을까? 다른 지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사투리를 자신의 고향 특산물인 것처럼 애용하는 한국의 시인들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영어가 처음 유행하던 시절 한국어 대신 영어 몇 개 삽입해놓고는 영어 자체가 ‘모더니즘’인 것처럼 착각했던 사이비 모더니스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정일근의 첫 시집 '바다가 바라다....'
1987년, 창작과 비평사
사투리를 시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면 사투리 자체보다도 그 사투리에 담긴 인간 보편적 정서에 초점이 맞춰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점에 유의한다면 1958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를 나온 후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정일근(鄭一根; 1958년- )이야말로 시 속에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쓸 자격이 있어 보인다. 그의 대표작 ‘어머니의 그륵’을 읽노라면 시인들에게 ‘사투리 시어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시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깊이 보다 더 깊은 ‘어머니의 그륵’ 깊이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어머니의 ‘개인어’로 재인식하여 모정(母情)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정서를 넉넉하게 담아내는 시재(詩才)가 놀랍다. ‘어머니의 그륵’이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시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상위에 서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시인 각자가 떠올린 시상(詩想)을 시인 각자가 선택한 시어로 표현하는 게 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 또한 일종의 사투리이고 개인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상이 먼저이지 시어가 먼저는 아니라는 점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비슷비슷한 산물(産物)인데도 ‘특산물(特産物)’이랍시고 비싸게 팔아먹는 장사치처럼 사투리를 ‘특산물’로 애용해온 시인들이 정일근의 ‘어머니의 그륵’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 한 수 배웠으면 좋겠다.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Salutation(인사) - 휴머니즘 일깨우는 인사

              skchai ,Salutation,  2013 

Salutation(인사) 

O generation of the thoroughly smug                오 진짜 점잖은 족속 
and thoroughly uncomfortable,                        그래서 진짜 불편할 거야, 
I have seen fishermen picnicking in the sun,      어부들이 햇볕 아래 소풍하는 걸 봐왔네, 
I have seen them with untidy families,              그들이 지저분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봐왔네, 
I have seen their smiles full of teeth                  이빨을 완전히 드러내고 웃는 걸 봐왔네 
and heard ungainly laughter.                            품위 없는 웃음소리도 들어왔지. 
And I am happier than you are,                       그래서 난 당신들보다 행복해,
And they were happier than I am;                    그 사람들은 나보다도 행복했어; 
And the fish swim in the lake                           호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and do not even own clothing.                          옷조차도 입지 않네 

                                                                <1913년, Ezra Pound; 1885년-1972년> 

간사회의 계층구조를 피라미드에 비유한다면 자유와 행복은 꼭대기에 있을까? 밑바닥에 있을까? 20세기 초 모더니즘(modern) 시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는 밑바닥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향할수록 자신을 격식과 품위로 옭아매야 하지만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남의 눈치 안 보고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 행복감이 더 커진다는 관찰이었다. 그래서 쓴 게 ‘인사(Salutation)’라는 짤막한 시다. 여기서의 ‘Salutation’은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목례나 손 흔듦이 아니라 신사복에 중절모를 쓴 ‘진짜 점잖은 족속’이 중절모를 살짝 벗는 시늉을 하면서 표시가 날 듯 말 듯 목과 허리를 숙이는 인사, 그 인사를 제대로 하려면 두 발과 다리의 모양새뿐만 아니라 눈길을 주는 방향도 잘 잡아야 하는 등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지 않으면 익히기가 어려운 바, 더운 날에도 신사복에 하얀 와이셔츠 받쳐 입고 품위 있게 인사를 한다는 게 그 얼마나 불편하겠느냐는 것이다. 반면 피라미드 아래쪽에 위치하여 남의 시선을 의식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되레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부분이 있다. 품위 따지는 사람들은 위아래 이빨들을 활짝 드러낸 채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정작 그들이야말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이 아닌가?! 

젊은 시절의 에즈라 파운드
그렇다고 해서 파운드의 ‘Salutation’을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에 대한 단순한 빈정거림으로만 보면 안 된다.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을 꼭대기에 올려놓고 그 아래에 ‘지저분하고 교양 없는 어부 가족들’을 배치한 후 맨 아래 옷 조차도 없는 물고기들이 알몸 그대로 헤엄치게 만드는 피라미드 구축 의도를 간파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다. 파운드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의 미국은 민주주의 사회이기는 했지만 영국식 예의범절과 격식과 품위를 중시하는 소수의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이 다수의 ‘지저분하고 품위 없는 서민가족’을 깔보는 분위기가 역력했던 바, 파운드가 ‘Salutation’을 쓴 것은 그런 위선적인 분위기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으며, 자신이 평소 가슴에 품고 있었던 휴머니즘(Humanism)의 표출이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게 뭔가? 인간을 전통(傳統)과 관습(慣習)과 종교(宗敎) 등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답게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자는 주장 아닌가? 14~16세기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인식을 촉구하는 문예부흥(Renaissance)이 인간세상을 기독교의 신이 지배했던 중세의 종언을 고한 이래, 17~18세기 자연과 역사의 영역에서 인간의 합리적인 자율성을 추구했던 계몽주의가 18세기말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준 데 이어, 그게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실존주의를 거쳐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등으로 분화됐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에즈라 파운드가 주창했던 모더니즘 역시 휴머니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에서 휴머니즘이야말로 그의 시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Salutation’에서도 파운드는 ‘나(I)’와 ‘그리고(And)’를 강조한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고’로 연결되는 인간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바, ‘나’와 ‘인간사회’의 소통의 제스처인 ‘인사’를 통해 무엇이 더 인간적이고 인간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햇볕 아래서 소풍하는 어부 가족들을 ‘봐왔다(have seen)’고 쓴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인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And’ 다음에 ‘I am happier than you are’와 ‘they were happier than I am’의 단정적인 표현을 쓴 것은 나의 판단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며, 그런 판단에 대한 결언 및 증거로 덧붙인 ‘the fish swim in the lake/ and do not even own clothing’에서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나 미래시제가 아닌 진리나 보편적 사실의 무시제(無時制)를 사용한 것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파운드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구속하는 그 어떤 가식이나 격식을 거부하면서, 인간이 본성대로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사회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주시하면서,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시를 썼다. 파운드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모티프를 얻어 ‘현대판 신곡’을 목표로 썼다는 저 유명한 미완성 서사시(敍事詩) ‘칸토스(The Cantos)’의 첫 편의 첫머리 ‘And then went down to the ship’를 ‘그리고(And)’로 시작한 것도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이전’ 또는 ‘인류의 처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고 보면, 파운드의 시작(詩作)은 곧 휴머니즘의 천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정치경제사회 제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시작에 반영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반전활동을 벌이다가 반미(反美)로 몰려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시라는 게 어떤 형식으로든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고 보면 에즈라 파운드의 모더니즘 시 운동이나 사회참여 시작(詩作)에서 요즘의 시인들이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장진주(將進酒) - 누가 감히 ‘취생몽사’를 비웃으랴

롱아일랜드 윌리스턴 파크 소재 한 한국인의 술가게 쇼윈도우. 한국어로 "한국술, 소주, 백세주, 복분자 등등 판매합니다!"라고 써놓은 안내문이 정겹다. 고단한 이민살이 술을 벗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리라. 

將進酒(장진주)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에 이르러는 다시 오지 못 하는 것을 
又不見 (우불견)                            또 보지 못 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부잣집 맑은 거울 속 슬픈 흰 머리는 
朝如靑絲暮成雪 (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푸른 실 같던 게 저녁에 눈같이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인생 잘 풀릴 때 즐거움 다 누리고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 술잔 헛되이 달과 마주 하지 마시오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나의 재능 반드시 쓰임새 있으리니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복내)  천금이 흩어져 없어져도 다시 생겨날 것이오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낙)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하나니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요 
岑夫子 (잠부자)                            잠 선생 
丹丘生 (단구생)                            단구 선생 
將進酒 (장진주)                            술 올리니 
君莫停 (군막정)                            그대들은 거절하지 마시오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에게 노래 한 곡 불러주노니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그대들 나 위해 귀 좀 기울여주시오 
鐘鼓饌玉不足貴 (종고찬옥부족귀)  종고찬옥(진수성찬과 보배)일랑 귀히 여기지 않느니 
但愿長醉不愿醒 (단원장취불원성)  단 오래 취하여 깨지나 말기를 바라오 
古來聖賢皆寂寞 (고내성현개적막)  예부터 성현은 모두 다 잊혀지고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류기명)  술꾼만 이름을 남겼다는 걸 생각해보시오 
陳王昔時宴平樂 (진왕석시연평낙)  진왕은 그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 열었을 때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 말에 만량이나 하는 술 마음대로 즐겼다오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이 어찌 돈이 적다 하리오 
徑須沽取對君酌 (경수고취대군작)  얼른 술 사다가 그대들과 대작 하리다 
五花馬 (오화마)                            오색 갈기털 말 
千金裘 (천금구)                            천금짜리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미주(美酒)로 바꿔오겠소 
與爾同消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들과 함께 만고의 시름 삭여보리라 

                                                           <이백(李白); 701년-762년> 

가 감히 '취생몽사(醉生夢死)'를 비웃나? 송나라 때 주자학의 기틀을 잡은 학자 정호(程灝)는 “비록 높은 재주와 밝은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견문이 고착되면 술에 취한 듯 살고 꿈꾸듯 죽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雖高才明智 膠于見聞 醉生夢死 不自覺也)”고 말했다지만 난세에 학문을 배우고 견문을 넓혀봤자 써먹을 데가 없어 되레 괴롭기만 한 ‘고재명지(高才明智)’들은 어떻게 하나? 혼탁한 세상에 적응 못하는 자신이 못 나 보이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대계를 품은들 펼칠 기회가 없고, 가슴 속에 감동의 불을 지피는 시문을 써도 그걸 제대로 감상하는 지음(知音)이 없을 때 술이 친구이고 꿈속이 안식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옛날 왕조시대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한 문인들이 술과 산수를 벗 삼고 꿈을 도피처로 삼았던 것도 ‘취생몽사’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진짜 취생몽사했다기보다는 그런 자학(自虐)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억지로나마 시문에 몰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세에는 이름깨나 알려졌지만 당대에는 낙백(落魄)했던 시인치고 술 권하는 노래 즉 ‘장진주(將進酒)’나 음주를 예찬하는 작품을 남기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어떤 사람들은 되레 그들의 낙백과 취생몽사가 되레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다. 

이백 시선 1996년 삼련서점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취생몽사 또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고급관리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에게 ‘천상에서 지상으로 유배를 당한 선인’ 즉 ‘적선인(敵仙人)’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데서 보듯, 이백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었다. 혼탁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724년 43세의 나이에 겨우 한림봉공(翰林供奉)이 되었으나 이듬해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사서 사직해야만 했고, 이 곳 저 곳을 떠돌다가 56세가 되어 현종의 아들 영왕의 군대에 몸을 담았다가 반군으로 몰려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됐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사면을 받아 풀려난 후에는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762년 62세 때 당도(當塗) 현령이었던 족숙(族叔)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던 중 술병을 얻어 죽었다고 <구당서(舊唐書)>는 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백이 술에 취해 장강(長江)에 비친 달그림자를 건져 올리려다가 강물에 빠져죽었다는 믿거나말거나 전설로 그의 죽음을 포장하고 있지만, 술 마시면서 시문 짓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은 이백의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감히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겨는 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라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게 위대한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백은 겉으론 낙천적이고 호탕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염세적이고 여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 또한 수박 겉핥기로 읽으면 낭만적이고 화려하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그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울분과 탄식과 체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장진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天生我材必有用(하늘이 준 나의 재능 반드시 쓰임새 있으리니)’은 세상을 잘못 만나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펴 보이지 못하는 답답함의 표출이요, ‘千金散盡還復來(천금이 흩어져 없어져도 다시 생겨날 것이오)’는 술값조차도 궁색한 자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고, 맨 마지막 ‘與爾同消萬古愁(그대들과 함께 만고의 시름 삭여보리라)’는 자신의 시름을 ‘만고수(萬古愁)’에 비유할 정도로 불우한 신세를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술 사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술을 사마실 돈도 없기에, 값나가는 물건을 술과 바꿔서라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셔보겠다는 이백의 술잔을 누구라서 뿌리칠 수 있으랴. 그나마도 여의치 않자 달과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술을 마시면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기까지 했던 그의 삶을 ‘취생몽사’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시에 취하나 술에 취하나 취하기는 마찬가지, 혼탁한 세상에서 불우한 자신을 달래는 데는 시문 짓기와 술 마시기가 유일한 방도였을 터, 이백의 취생몽사를 동정(同情)한다. 갈수록 사는 게 팍팍해지고 돈과 권력 없이는 술 한잔 같이 할 친구 찾기조차 쉽지 않아서 그런지 이백이 내미는 술잔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숨쉬는 무덤 - ‘안 보이는 것’ 보여주기

                    skchai 2013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깨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2003년, 김언; 1973년- > 

는 건가? 보이는 건가? 사람이 사물을 볼 때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게 사물의 참모습이라고 여기지만 기실은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나마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치자. 같은 나무인데도 어떤 사람은 줄기나 가지를 보고 어떤 사람은 잎이 얼마나 무성한지를 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거나 흥분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등의 시쳇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영어 속담 “Seeing is believing”도 마찬가지다. 본다는 것 또한 주관적인 감각의 작용인 바, 그런 주관적인 관찰(觀察)에 의해 얻어진 개념을 ‘관념(觀念)’이라고 한다. 한자 볼 관(觀)은 황새 관(雚)에 볼 견(見)이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황새가 긴 목을 빼고 뭔가 응시하는 모습이 떠올려진다. 또 생각 념(念)은 이제 금(今)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진 생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념은 자신의 시각으로 뭔가를 보고 머릿속에 떠올려진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런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본 사람들 중의 하나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다. 플라톤은 사물을 볼 때 육안(肉眼) 대신 사유(思惟) 즉 지적 직관(直觀)으로 사물의 핵심을 볼 것을 촉구했었다. 소위 ‘이데아(idea)’다. 감각으로 지각되는 대상들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들이어서 육안으로 볼 때는 매번 다르게 보이지만, 한결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이데아는 불변의 실재성(實在性)을 갖는 바, 지적 직관으로 그걸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일본인들이 ‘관념(觀念)’이라고 번역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관념’은 보는 주체의 생각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이데아’는 보는 주체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물의 참 모습을 의미하는 바, 말맛이 다르다. 그런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만물의 생성․변화론을 설명했던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 “이데아 또한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역시 감각으로 인지한 사물을 머리 속에서 영원한 것으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공박을 당한다. 결국은 도로아미타불,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냐 아니면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으로 지각되는 대상은 매번 다르게 보인다”는 것만큼은 헤라클레이토스든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든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김언 시집 '숨쉬는 무덤' 2003년 천년의 시작
독자들과의 공감적 감상을 전제로 시를 써야하는 시인은 사물을 볼 때 자신의 감각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지적 사유를 통해 최대한 객관화시킨 사물의 실체를 보려고 애를 쓰는가? 그런 우문(愚問)에 대해 1998년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 김언(1973년- )이 현답(賢答)을 해주는 것 같다. 2003년 펴낸 첫 시집 <숨쉬는 무덤>의 표제시를 읽노라면 시인이 자신의 감각을 통해 수용한 이미지를 독자들과 어떻게 공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 감상의 관건은 ‘보인다’와 ‘안 보인다’의 차이, 김언이 왜 첫 행을 ‘보인다’로 시작하여 수많은 ‘안 보인다’를 나열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김언의 감각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더듬어 볼 수 있거니와, ‘보인다’와 ‘안 보인다’를 바꿔서 읽으면 비디오 리플레이(replay)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전후의 풍경이 눈앞에 훤히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는 “애인과 이별하여 낙망한 나머지 감각의 기능마저 마비된 그의 눈에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어올 리 없고, 그런 상태에서의 ‘빈방’은 ‘숨쉬는 무덤’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풀어쓴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정작 이 시의 묘미는 작중의 화자(話者)의 눈에 ‘안 보인다’는 것들이 독자의 눈에는 ‘보인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감각을 통해 본 것들을 ‘안 보인다’고 능청을 떨면서 독자들의 눈에 들이대는 김언의 의뭉한 의도가 돋보인다. 그러나 그런 의뭉한 의도에 대해 눈을 흘길 수가 없다. 왜? 시인의 관념을 독자들의 관념으로 보편화하려는 노력이니까! 

참 재밌는 시다. 어떤 시든지 어렵게 해설하기를 좋아하는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서도 ‘기존의 모형과 틀을 뒤집는 미래시의 생김새’가 이러쿵저러쿵 사족을 붙이지만, 시라는 게 쉽게 읽으면 쉽게 이해되고 난해하게 읽으면 한없이 난해해지는 바, 우선은 재밌게 읽고 쉽게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숨쉬는 무덤’이라는 제목이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 박정만(朴正萬; 1946년-1988년)의 시 ‘숨쉬는 무덤’과 같은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게 께름칙하거니와, 시의 뼈대 또한 기형도(奇亨度; 1960년-1989년)의 ‘빈방’과 닮았고, 깊이가 없어 보이는 게 흠이라면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격을 좁혀준 데 대해서만큼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When We Two Parted - 낭만적인 사련(邪戀)의 아픔과 슬픔

          2013, window, skchai

When We Two Parted 

WHEN we two parted                    우리 둘 헤어졌을 때 
In silence and tears,                      침묵 속에서 눈물 흘렸지, 
Half broken-hearted                       아픈 마음 두 동강 나서 
To sever for years,                         몇 해 동안 따로 따로 놀았지 
Pale grew thy cheek and cold,        창백해진 그대의 뺨 차갑게 변하고 
Colder thy kiss;                              그대의 키스는 더 차가왔네; 
Truly that hour foretold                   기실 미리 예견됐던 것이지 
Sorrow to this.                               이런 정도의 슬픔은. 

The dew of the morning                   그 날 아침의 이슬 
Sunk chill on my brow —                나의 이마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지 - 
It felt like the warning                      마치 경고해주는 것 같았어 
Of what I feel now.                         지금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 
Thy vows are all broken,                그대의 맹세 다 부서지고 
And light is thy fame:                      그대의 명성도 엷어져 
I hear thy name spoken,                  누군가 그대 이름을 말하면 
And share in its shame.                   나도 같이 부끄러워지네 

They name thee before me,            사람들이 내 앞에서 그대 이름 말하면 
A knell to mine ear;                        내 귀엔 조종(弔鐘)처럼 들리네 
A shudder comes o'er me —          온몸에 소름이 끼쳐 - 
Why wert thou so dear?                 왜 그대가 그토록 사랑스러웠나? 
They know not I knew thee,           사람들은 내가 그대를 알았다는 것을 몰라 
Who knew thee too well: —           그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걸: - 
Long, long shall I rue thee,              오래, 오래 나 그대를 한탄하리라 
Too deeply to tell.                           말로 다 못할 만큼 깊이. 

In secret we met —                       비밀리 우리는 만났지 - 
In silence I grieve,                          (그래서) 침묵 속에서(속으로만) 슬퍼하네 
That thy heart could forget,             쉽게 잘 잊는 그대의 마음을, 
Thy spirit deceive.                          속이고 거짓말 하는 그대의 영혼을. 
If I should meet thee                       언제고 그대를 다시 만난다면 
After long years,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How should I greet thee? —           나 그대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 - 
With silence and tears.                  침묵 속에서(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면서. 

                                 <1816년,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년-1824년> 

‘Romanticism’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중세기 프랑스 궁정에 널리 퍼졌던 기사들의 무용담을 ‘로망(Roman)’이라고 했고, 그런 무용담엔 허구와 과장이 덧붙여지는 게 예사여서, ‘상상의’ ‘모험적인’ ‘비현실적인’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형용사 ‘romantique’가 생겨났다. 그게 영어 ‘romantic’으로 변한 후, 그런 류의 예술 사조를 가리키는 말로 ‘Romanticism’이 만들어졌던 바, 그걸 일본인들이 물결 랑(浪) 흩어질 만(漫) ‘낭만주의(浪漫主義)’라고 음역(音譯)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흔히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하면 비 오는 날 카페에 들러 짙은 갈색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따위의 말초적인 감상부터 떠올리지만 본디는 그런 ‘싸구려’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성(感性)에 불을 붙여 높이 쳐든 횃불이라고나 할까, 낭만주의의 줄기를 더듬어보면 인간의 자기 사랑이 진하게 감지된다.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로부터 인간을 구해줬다. 다시 말하자면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理性)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성(感性)을 강조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의 딱딱한 잔소리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들은 이성 또한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개인의 감성을 존중했고, 사회라는 것 또한 개인의 감성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었으며, 시인들 또한 주변의 눈치나 격식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지금 읽으면 이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사사로운 감정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것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신(神)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충격적이었고, 그런 개인주의적 감정 표출은 개인주의를 발판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조지 고든 바이런 초상
존 키이츠(John Keats),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단을 이끈 절름발이 미남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년-1824년)의 시들에 ‘낭만적’이라는 수사가 붙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그 만큼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런 자신은 1808년에 썼다고 했지만 181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When We Two Parted’도 마치 실연한 남자가 술주정을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이런이 몰래 사귀던 유부녀 프란시스 웨더번 웹스터(Frances Wedderburn Webster)가 바이런을 속이고 딴 남자와 밀회를 즐긴 게 알려진 직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아픔과 슬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사랑했던 사람’이 공개돼서는 안 되는 사련(邪戀)의 상대였다는 것을 암시하듯, ‘silence and tears’라는 표현을 세 번씩이나 사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그 만큼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털어놓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시가 운율을 바탕으로 지어지기에 그걸 한글로 번역하면 시쳇말로 ‘앙꼬 없는 찐빵’으로 변해버리는데, 이 작품 또한 ‘parted’-‘hearted’ ‘tears’-‘years’ 등 각 연의 ABAB CDCD EFEF GHGH의 압운을 빼놓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그런 정교한 운까지 계산하여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 바이런의 시작(詩作) 테크닉이 돋보이기도 한다. 

바이런이 낭만주의 시작에 몰두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성품이 낭만적이었고 삶 자체가 낭만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휘어져 있었던 탓에 절름발이로 살아야했던 바이런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외톨이가 되는 등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운 좋게도 가문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아 상류사회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었고,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하여 숱한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同性愛) 경향을 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그가 스위스에서 퍼시 비시 셸리를 만나 각지를 떠돌면서 퇴폐에 찌들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문학사에도 언급될 정도다. 말하자면 바이런은 자기 감성이 명령하는 대로 산 사람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나머지 18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했다가 독감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중 이듬해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을 했지만, 그 짧은 생애를 왕성한 시작과 함께 자유분방한 삶으로 일관했던 바, 지금도 ‘낭만주자 중의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낭만주의자의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에서 주옥같은 시편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자체 또한 너무 ‘낭만적’이어서 지금은 골동품이 돼버린 낭만주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두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요즘엔 낭만주의 시 속에만 ‘낭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씁쓸한 느낌과 함께.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으로 비판한 골육상잔(骨肉相殘)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폐허가 된 인천의  한 공장건물 앞에서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여자 어린아이. 그 여자 어린아이는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하기 위해 38선을 그었고 북한과 남한이 그들을 대리하여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고 
漉豉以爲汁 (록시이위즙)   즙을 걸러내 메주를 만든다. 
萁在釜下燃 (기재부하연)   콩깍지는 가마솥 아래서 타고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속에서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시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서로 닦달하는 게 어찌하여 이리도 급한가? 

                                       <조식(曹植); 192년-232년> 

육상잔(骨肉相殘)이 벌어지면 ‘골(骨)’과 ‘육(肉)’이 공멸한다. 뼈 골(骨)은 서로 연이어져 있는 뼈대 모양의 뼈대 알(歹)의 원형 아래 살코기 덩어리를 본뜬 고기 육(肉)이 붙은 것으로서, 살은 뼈가 없으면 형태를 갖출 수 없고 뼈는 살이 없으면 연결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외부의 충격에 상하기 쉬운 바, 뼈와 살은 싫어도 서로 붙어 있어야 하는 사이다. 그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둘 다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간의 다툼이나 동족간의 전쟁 등 골육상잔이 끊이질 않았던 이유는? 삼국시대 이래 같은 민족끼리 골육상잔을 일삼아온 한국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패전국 일본에 전쟁 도발 책임을 물어 당시는 엄연한 ‘일본 땅’이었던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데다가 한반도 내부에 누적된 모순과 갈등이 도화선이 되어 촉발되었다는 게 정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1981년에 펴낸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 1990년 증보판 발행)’에서 “6· 25는 해방과 건국 이래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과 분단 상황을 풀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으로서 국가수립을 둘러 싼 남한 내부의 대립과 투쟁, 미군정의 오판과 정책오류, 남북의 국지적 무력충돌 등이 어우러져 전면전으로 비화되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말해보자. 제2차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미국이 한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분할 점령했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했고,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방어선' 발언에서 보듯 동아시아에서 한반도를 울타리 삼아 일본을 보호하려했던 미국이 참전하여 북상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 또한 참전하여 또 다시 휴전선이 그어진 것 아닌가?! 실제로 얼마 전 한국의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국민 10명 중 6명(58.6%)만 6·25전쟁을 북한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나머지 상당수(37.1%)는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김일성 개인에게만 6.25의 책임을 물으면서 남북 분단 상황을 독재 정당화에 써먹었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독재시대 세뇌교육 탓인지 아직도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게만 묻는 ‘보수꼴통’들이 수두룩하지만,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보다는 그걸 당기도록 만든 쪽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구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이나 미국을 등에 업고 분단을 현실화한 이승만 또한 뒤통수 긁적이면서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반성은커녕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이리저리 찢겨지고 있음에 골육상잔으로 죽은 귀신들이 죄다 한반도에 모인 건 아닌가 하는 우스개 생각도 든다. 이명박 정권 때 국론을 분열시켰던 천안함 사건만 해도 그렇다. 남한서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대북 심리전 방송을 위한 대형 확성기를 설치하겠다고 나서자 북한이 ‘서울 불바다’ 운운하면서 “전면적 군사적 타격행동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공갈 협박한 가운데 남한 내부에서는 반정권-친정권으로 나뉘어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박치기만 해댔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도 북한서 대남․대미 공갈협박을 일삼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나 되는 듯이 전 세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꼴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미국서 위기를 과장하여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무기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반면 친미주의자들이나 북한 위협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세력은 “북한이 김정은 체제의 안정적 구축을 위해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음을 본다. 

청대에 그려진 조식 초상
중국 후한(後漢) 말기 조조(曹操)의 다섯째 아들 조식(曹植; 192년-232년) 또한 씁쓸하게 비웃을 것 같다. 최종 봉국(封國)이 진(陳)이고 시호가 사(思)여서 ‘진사왕(陳思王)’으로도 불리는 조식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시문에 능통했으나 후계 권력투쟁에서 형 조비(曹丕)에게 밀려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사(正史)에는 처음엔 조식이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비에 비해 처세가 떨어지고 음주를 절제하지 못하는가 하면 수레를 타고 천자만이 다니는 길을 지나갔다가 물의를 빚어 후계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제위에 오른 조비는 조식 세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조식을 제거하기 위해 “네가 시재(詩才)가 뛰어나다고 하니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라.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그래서 지었다는 시가 바로 ‘자두연두기’로 시작하는 ‘칠보시(七步詩)’다. 

전설에는 조식의 칠보시를 들은 조비가 크게 뉘우치고 반성하여 조식을 살려줬다고 하나 그건 조조 일가를 폄하하기 위해 후대 사가들이 쓴 소설일 뿐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투쟁에서 시 하나를 놓고 생사를 흥정(?)했다는 게 자다가 일어나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칠보시’의 전설이 진실이라면? 시를 잘 지은 조식의 시재(詩才)보다도 시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라이벌을 살려준 조비의 아량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저런 사서(史書)는 생전의 조식은 자주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의 일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관직을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가운데 아내가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절망과 근심 속에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조식의 시재도 뛰어났지만 형 조비도 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조조 역시 전장을 누비며 지은 ‘횡삭부시(橫槊賦詩; 창을 비켜들고 지은 시)’로 유명하여 3부자가 ‘건안삼조(建安三曹)’라고 불렸다. 

어쨌거나 ‘칠보시’는 골육상잔의 당사자들을 꾸짖기 위한 잠시(箴詩)로 인구에 회자되지만 누가 ‘콩깍지’이고 누가 ‘콩’인지 따져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칠보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조비는 가마솥 아래서 타는 ‘콩깍지’이고 조식은 가마솥 속의 ‘콩’이지만,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 제3자만 이득을 취할 뿐, ‘콩깍지’나 ‘콩’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6.25 전쟁 때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일본은 패망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를 재건하는 기틀을 다졌고, 남북한 긴장이 고조될수록 미국․중국․러시아의 무기 장사꾼들만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가운데, 정작 ‘콩깍지’와 ‘콩’ 노릇을 하는 남한과 북한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말이다. 군사적 대치 및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켜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남북한 기득권 세력을 제외한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 남북간의 골육상잔은 진짜 잔(殘), ‘殘’은 부서진 뼈 알(歹)에 창 과(戈) 두개가 붙은 것으로서 창칼로 뼈를 부수는 것, 골육끼리 창 들고 싸워봤자 뼈가 바숴지는 것 말고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을진저!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섬진강 1 -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도 품어줬더라면

뉴욕주 베어마운틴 정상에서 바라본 허드슨 강 상류. 유사 이래 강은 인간을 품어줘왔지만 아직까지도 인간은 강을 품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1982년 ‘21인 신작시집’(창비), 김용택(金龍澤); 1948년- > 

(江)과 하(河)의 차이는? 물이 흘러갈 때 강(江)은 물길이 곧아서[工]  ‘工工工...’ 소리를 내고 하(河)는 물길이 굽어서[可] ‘可可可...’ 소리를 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우스개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원래 강은 장강(長江) 즉 양자강(揚子江)을 가리키고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강남(江南)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말은 겨울이면 기후가 온화한 양자강 이남으로 날아간 제비가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이면 양자강 이북으로 돌아온다는 말이고 “백년하청(百年河淸)”은 “흙탕물인 황하가 언제 맑아지겠느냐”는 의미다. 또 중국서 ‘하북(河北)’은 ‘황하의 북쪽’을 가리키는 바, 하북의 베이징(北京) 인근 숲 속에서 70만 년 전부터 20만년 전까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일종인 ‘베이징 원인(北京原人)’의 화석이 발견된 데서 보듯, 이 지구상에서 일찍부터 강을 끼고 형성된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다. 

강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바다 또는 호수 그리고 또 다른 강으로 흘러가는 경로’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체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고 또 숱한 민물고기들을 품어 예로부터 인간의 삶과 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구 북반부의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금과옥조로 삼은 것도 찬바람을 막아주는 산과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물을 고루 갖춘 곳이 명당이기 때문이었던 바, 황하 문화권에 속한 한반도 사람들 또한 산과 강 사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는 것은 주지의 상식에 속한다. ‘생명(生命)의 젖줄’이라는 표현도 그래서 생겨났거니와 한자문화권에서 유난히 많은 시인들이 강을 시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김용택의 섬진강 연작시 모음 시집 '섬진강'(창작과비평사)과
김용택이 글을 쓰고 황헌만이 사진을 찍은 '꿈꾸는 섬진강'(삼성당)
섬진강(蟾津江) 연작시로 필명을 날려 ‘섬진강 시인’으로도 불리는 전라북도 임실군 출신 시인 김용택(金龍澤; 1948년- )이 평생 섬진강을 노래해온 것도 섬진강이 자신의 삶의 뿌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를 굽이쳐 흐르다가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의 길이는 212.3 km, 유역면적은 4,896.5 ㎢, 전라남북도 전체 면적이 2만여 ㎢이므로 전라도의 약 25%를 섬진강이 적셔주고 있는 셈이지만 시인 김용택이 보기에는 강물 못지않게 눈물 또한 넘쳐흘렀던 것 같다. ‘섬진강 1’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시의 전반부는 어머니 품 속 같은 섬진강의 생명력을 찬미한 반면 후반부는 수탈과 소외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고 있음을 본다. 당시 이 시가 그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한을 남긴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발표된 데다가, ‘전라도 실핏줄’ 또는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라는 등의 직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은 데서 보듯, 박정희 독재의 지역편중 개발로 인해 소외당하고 차별당해 온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표출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김용택 본인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고개를 흔들지 모르지만 그렇게 읽혀질 수도 있다는 것만큼은 지금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쉽다. 시적 감동의 보편성을 확대하지 못한 한계가 느껴진다. 좋은 말로 하면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 대변이겠지만 나쁜 말로 하면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의 한풀이 냄새가 풀풀 난다. 그걸 민중의 한풀이였다고 우기면 더 할말이 없지만. 

오늘도 섬진강은 흐른다. ‘섬진강 시인’ 김용철의 ‘섬진강’ 또한 누군가에 읽혀지고 또 읽혀지고 있으리라.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30여년이 지난 지금 섬진강의 ‘흐름’과 ‘읽혀짐’이 잘 어우러지지는 않는 것 같다. 박정희 독재가 정권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치졸한 지역편중 개발과 인사로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지금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독재 쓰레기 세력에 빌붙어 단물이나 빨아먹고 사는 온라인 카페나 일부 언론들이 그 지역 사람들을 ‘홍어족’이니 ‘빨갱이’니 차별하고 폄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섬진강 1’이 그런 차별과 소외의 서러움도 강물에 실어 떠내려 보내고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까지 품어줬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모여 흐르는 섬진강이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왔다면 섬진강 또한 일찍이 노자(老子)가 설파했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도(道)를 따라 흘러왔을 터,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른다(處衆人之所惡)”는 말이 자꾸 곱씹혀져서다. 

어쨌거나, 김용택의 ‘섬진강 1’은 강은 인간을 품어주지만 인간은 강을 품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작품이었다. 지금의 김용택 본인 또한 ‘섬진강’의 품에 안겨 자신의 시작(詩作)이 변모해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리라. 30여년 전 자신의 필명을 알린 ‘섬진강 1’이 분노와 한을 떠내려 보내던 강이었다면 이후의 ‘섬진강’들은 사람을 품어주는 섬진강으로 변해갔었다. 어머니, 누이, 강변의 아이들, 오래된 마을, 오고가는 사람들...환갑을 넘긴 그의 시작이 원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섬진강의 품에 안겨 살다보니 섬진강을 닮아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장한가(長恨歌) - 땅에선 ‘연리지’ 되고 하늘에선 ‘비익조’ 되어

아파트 정원의 느티나무가 연리지로 변해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땅에선 연리지가 되고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기를 원한다.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련도 그랬을 거라는 백거이의 관찰에서 사랑은 윤리와 도덕도 뛰어넘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長恨歌(장한가) 

-----------(이상 생략) 

風吹仙袂飄飄擧 (풍취선몌표표거)    바람이 불어 선녀의 소맷자락이 날리니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흡사 무지개 치마와 날개옷이 춤추는 듯 하네 
玉容寂寞淚闌干 (옥용적막누란간)   옥 같은 얼굴에 적막하고 눈물이 그치지 않으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배꽃 한 가지가 봄비에 젖은 듯 하네 

含情凝睇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을 품고 시선 모아 군왕(황제)께 감사말씀 올리네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량묘망)   한번 이별하고 나니 음성과 얼굴 모두 아련합니다 
昭陽殿裏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 안에서의 은혜와 사랑 끊어진 뒤로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 안에서의 세월은 길기만 합니다. 
回頭下望人寰處 (회두하망인환처)   고개 돌려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不見長安見塵霧 (부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만 자욱합니다.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오직 예전에 쓰던 물건으로 깊은 정 표하고자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채기장거)   장식함과 금비녀를 부쳐 보내려합니다. 
釵留一股合一扇 (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정강이 모양이고 장식함은 부채모양이니 
釵擘黃金合分鈿 (채벽황금합분전)   비녀는 황금을 쪼갰고 장식함은 장식을 나눴습니다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마음을 금과 장식처럼 단단하게 먹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천상과 인간세상에서 만나 서로를 볼 것입니다 
臨別殷勤重寄詞 (림별은근중기사)   떠나려 함에 꼭 전할 말이 많아 서두르지만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   말 가운데 (우리) 두 마음만 아는 맹서가 있습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칠석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아무도 없는 밤에 은밀하게 속삭일 때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로 짝짓기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련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 원했었지요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끝없는 하늘과 변함없는 땅이 다할 때가 있더라도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면면이 이어져서 끊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 

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시쳇말로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다. 그래서 ‘맹목적(盲目的) 사랑’이라는 말도 생겨났거니와 서양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blind love’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고 한다. 지난 2004년 영국 런던대학(UCL) 연구진은 뇌 학술지 '뉴로이미지(NeuroImage)'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면 뇌의 비판적 사고기능과 부정적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의 활동이 억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었다. 일단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면 뇌가 상대의 특성과 성격을 평가할 필요가 줄어든다고 판단하여 맹목적으로 변하고, 그런 뇌의 작동은 낭만적 사랑과 모성애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사람이고, 그 사람이 사랑에 눈이 멀면 나라가 기울어진다고 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중국 한(漢) 무제(武帝) 때 궁중 음악을 관장하는 협률도위(協律都尉) 이연년(李延年)이 “북방에 아름다운 여인 있어(北方有佳人)/ 세상에 둘도 없이 홀로 섰네(絶世而獨立)/ 한번 돌아보니 성이 기울고(一顧傾人城)/ 다시 돌아보니 나라가 기우네(再顧傾人國)/ 성이 기울고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어찌 모를까마는(寧不知傾城與傾國)/ 아름다운 여인은 다시 얻기 어렵네(佳人難再得)”라고 노래를 불렀고, 이에 무제가 과연 그런 여인이 있는지 묻자 옆에 있던 누이 평양공주는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바로 그런 미인이라고 귀띔해줬고, 무제가 그녀를 불러들이고 보니 과연 아름다워서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한서(漢書)’는 전한다. 그녀가 바로 한무제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홍안절대이부인(紅顔絶代李夫人)’ 이연((李姸)이다. 만년의 한무제는 요절한 이부인을 그리워하여 저 유명한 ‘추풍사(秋風辭)’를 짓기도 했다. 

'산책하는 양귀비'
1821년 타카쿠 아이가이 그림
그러나 진짜 ‘경국지색’으로는 당나라 현종 때의 양귀비(楊貴妃)가 첫손에 꼽힌다. 연못을 들여다보면 물고기가 넋을 잃고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沈魚)’로 불렸던 월(越)나라의 서시(西施), 가야금 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진다고 하여 ‘낙안(落雁)’으로 불렸던 한(漢) 원제(元帝) 때의 왕소군(王昭君), 달이 부끄러워 자신을 가릴 정도로 예뻐 ‘폐월(閉月)’로 불렸던 한(漢) 헌제(獻帝) 때의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양귀비는 꽃을 건드리자 꽃이 부끄러워하면서 잎을 말아 올렸다고 해서 ‘수화(羞花)’로 불린다.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인 그녀는 원래 현종의 며느리였으나, 그녀에게 반한 현종이 화산의 도사(道士)로 빼돌렸다가 궁 안에 도교사원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여관(女冠)으로 불러들여 취했던 바, 부자지간마저 갈라놓을 정도로 예뻤던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현종은 즉위 초 ‘개원(開元)의 治(치)’로 칭송되는 어진 정치를 폈으나 양귀비에게 눈이 먼 이후엔 정사를 멀리하고 환락을 일삼다가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자초하여 양귀비는 참살 당하고 자신은 권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지므로, 4대 미인 중 명실상부(?)한 경국지색으로 나라를 기울게 한 미인은 양귀비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맹목적인 사랑’을 비웃지만 내심 부러워하기도 한다. 사는 게 외롭고 쓸쓸한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양귀비와 현종의 맹목적인 사랑이 비극으로 막을 내린 후 활동했던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도 그랬던 것 같다. 자(字)는 낙천(樂天)이어서 ‘백낙천’으로도 잘 알려진 백거이는 29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면서 한림원 학사가 되어 승승장구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외롭고 쓸쓸했던 것 같다. 그 즈음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를 보면 양귀비와 현종의 맹목적 사랑에 대한 선망(羨望)으로 가득 차 있다. 도학(道學)을 숭상하는 관료가 나라를 기울게 하여 정치적으로 단죄당한 사람들의 사사로운 애정을 찬미하는 서사시를 썼다는 자체가 파격으로 보이거니와 그게 당시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큰 히트를 쳤다는 것도 놀랍고, 구구절절 너무 섬세하고 애절하여 1천2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까지 애송되고 있음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기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어서 둘이 합쳐져야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이고 ‘연리지(連理枝)’는 각기 다른 뿌리를 가진 나무들의 가지가 하나가 되어 붙은 것, 하늘에서는 비익조로 짝짓기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바란다는 사랑 고백이야말로 앞으로 또 천년이 지난다 해도 변함없이 인구에 회자될 만 하지 않은가?!
백거이 초상

백거이는 매우 똑똑하고 유능한 관료였지만 마음만큼은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남자였던 것 같다. 조정의 공론에 반대하다가 항명으로 몰려 유배당했을 때 지었다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비파행(琵琶行)’은 그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비파행’은 화려한 옛날을 회상하면서 비파를 타는 늙은 창기의 이야기를 읊은 것으로서, 그 늙은 창기의 처지가 유배지에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처지와 너무 흡사하여 동병상련을 느꼈는지는 모르나, “滿座聞之皆掩泣(만좌문지개엄읍, 좌중 사람들이 듣고서 모두가 눈을 가리고 우는데)/ 座中泣下誰最多(좌중읍하수최다,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던가?)/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백거이 본인)의 푸른 적삼이 흠뻑 젖었더라)”라고 자신의 여린 속내를 매우 솔직하게 드러냈었다. 

백거이의 작품을 감상할 때 주목해야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작중의 화자가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觀察者)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등의 시작(詩作)이 자신이 작품 속 화자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반면 백거이는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바, 그런 시작 기법은 관료생활에서 얻어진 절제(節制)와 거리두기 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칫하면 식상할 수 있는 감상(感傷)을 적절히 조절하는 순기능을 발휘함으로써 망외(望外)의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본다. 양귀비가 ‘장한가’를 쓰고 늙은 창기가 ‘비파행’을 썼다면 자칫 개인의 한풀이로 비쳐질 이야기가 제3자의 정제된 관찰을 통해 더욱 더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기법이야말로 서사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어서, 백거이의 작품들이 유난히 돋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로 위의 ‘장한가’ 중 ‘이상 생략’된 부분을 적어둔다.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天生麗質難自棄 (천생려질난자기)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 
回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雲鬢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부조조) 
承歡侍宴無閑暇 (승환시연무한가)   春從春游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玉樓宴罷醉和春 (옥누연파취화춘) 
姊妹弟兄皆列土 (자매제형개렬토)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驪宮高處入靑雲 (려궁고처입청운)   仙樂風飄處處聞 (선낙풍표처처문)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漁陽鼙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내)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항)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항복지)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부발무나하)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누상화류)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항)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行宮見月傷心色 (항궁견월상심색)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天旋地轉廻龍馭 (천선지전회용어)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부능거)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니토중)   不見玉顔空死處 (부견옥안공사처)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상고진첨의)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歸來池苑皆依舊 (귀내지원개의구)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부누수)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섭낙시) 
西宮南內多秋草 (서궁남내다추초)   落葉滿階紅不掃 (낙섭만계홍부소)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자제백발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노) 
夕殿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孤燈挑盡未成眠 (고등도진미성면) 
遲遲鐘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냉상화중)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내입몽) 

臨邛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爲感君王展轉思 (위감군왕전전사)   遂敎方士慇懃覓 (수교방사은근멱) 
排空馭氣奔如電 (배공어기분여전)   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낙하황천)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부견)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山在虛無縹緲間 (산재허무표묘간) 
樓閣玲瓏五雲起 (누각령롱오운기)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中有一人字太眞 (중유일인자태진)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삼차시) 
金闕西廂叩玉扃 (금궐서상고옥경)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九華帳裏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珠箔銀屛迤邐開 (주박은병이리개) 
雲鬢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교)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내) 

                                                 <이하 글의 첫머리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