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대 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 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권혁웅; 1967년- >
아름다움이라는 게 뭔가? 한자 미(美)는 그 옛날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으로 삼았던 양 양(羊) 아래 큰 대(大)를 붙여 만든 글자로서 ‘살이 쪄서 큰 양’을 뜻했다. 신에게 바치는 희생이므로 큰 게 좋아 보였고, 좋아 보인다는 것은 만족감을 주는 바, ‘美’는 “눈으로 보기에 좋아야 하고 쾌감(만족감)을 주는 것”이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반면 영어 ‘beauty’의 뿌리는 ‘하다’ ‘수행하다’ ‘호의를 보이다’ 등의 의미를 지닌 인도유럽어 ‘deu-’에서 나온 라틴어 ‘bellus’로서 감각보다는 기능을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beauty’가 과일이 익었을 때 또는 여자가 성숙하여 일생 중 제일 아름다운 때 등등 ‘-한 때(전성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hōraios’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모양을 중시하는 데 반해 서양 사람들은 실속이나 기능을 중시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미의 반대 개념은 추(醜), 한자 ‘醜’는 술을 뜻하는 유(酉)에 무서운 탈바가지를 쓴 형상의 귀신 귀(鬼)가 붙은 것으로서, 무섭거나 보고 싶지 않은 꼴을 뜻하는 바, 추(醜)라는 것 또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어 ‘ugly’의 뿌리 역시 ‘무섭게 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노르웨이어 ‘ugga’로서, 한자 추(醜)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美’든 ‘beauty’든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변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미의 개념이 시대와 관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미리 확장할 수도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서 석고나 돌 등 균일한 재료를 사용해온 전통적인 조소(彫塑) 기법에 대한 반발로 폐기물 따위를 이용하여 오브제를 만들어낸 정크아트(Junk Art) 또는 스크랩아트(Scrap Art)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의 개념 확장 노력의 일환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정크 아티스트들은 전후 쏟아져 나오는 가정 및 산업 폐기물들이 기계문명 시대의 미술재료로 안성맞춤일 거라는 생각으로 ‘아상블라주(Assemblage)’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개척했던 바, 1961년 뉴욕 최초로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아상블라주 예술(The Art of Assemblage)’전(展)의 기획자 겸 당시의 MoMA 큐레이터 W. 사이츠(William Seitz)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시(詩) 하면 정갈하고 아름다운 느낌부터 떠올리는 한국서 쓰레기 같은 낱말들로 시를 쓸 수 있을까? 다른 시인들은 머뭇거릴지 몰라도 고려대 국문과 출신으로 199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권혁웅(1967년- )은 그럴 수 있다고 단호히 대답할 것 같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한 해 전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려 비평(批評)과 시작(詩作)을 겸해온 권혁웅의 작품을 보면 다른 시인들이 쓰고 버린 단어 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어들만 일부러 골라 시를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도 그 중 하나다. ‘변비’ ‘신의주찹쌀순대’ ‘눌린 머리 고기’ ‘새우젓’ ‘당면’ ‘선지’ ‘빨래판’ ‘휴지를 든 손’ 등등 듣기만 해도 불유쾌한 이미지부터 떠오르는 어휘들을 시어(詩語)로 사용했다는 그 자체가 파격이고 도발로 보인다. 시의 첫 머리를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라고 시작하여 x싸는 장면을 환기시킨 후, 음식물이 목구멍과 위와 소장과 대장을 거쳐 항문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듯 사적 감정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나서, 마지막 행에 가서는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라고 독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공감을 유도하고 있음을 본다. 흡사 변기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가득 채워놓고는 관람객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상블라주’ 아티스트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권혁웅의 시를 “시의 품격과 미를 파괴하는 기괴한 개인 방언”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x싸는 장면이나 x싼 후 밑을 닦으려고 휴지를 손에 든 순간의 멈칫거림도 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34년 7월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처음 연재됐을 때 극렬한 반발을 야기하여 중단됐으나 지금에 와서는 ‘천재시인’이라고 추켜세우고 있듯이, 반세기 전 ‘정크 아트’가 태동했을 때 모두들 쓰레기라고 비웃었으나 요즘의 미술전시회 태반이 ‘아상블라주’인데서 보듯, 권혁웅의 시 또한 훗날 높이 평가받을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유보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미술이든 시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고갱이가 있는 것이지 전통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할 당위는 없는 것이고 보면, 권혁웅의 ‘시의 품격과 미를 파괴하는’ 시 또한 충격적이고 도발적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황금나무 아래서'(2001, 문학세계사)와 '마징가 계보학'(2005, 창비) |
권혁웅은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도’ 속에서는 전통과 관습으로 굳어진 격식의 파괴와 사사로운 경험의 보편성 확인 내지는 공유 노력이 단연 돋보인다. 자칫 자기중심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시대와 사람이 변했는데도 예전의 틀에만 사로잡혀 있을 건가? 현재 내가 경험한 것과 느낀 것을 당신도 공감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도로 이해되거니와, 쓰레기 같은 어휘나 상황을 시 속에 등장시키는 것 역시 “미(美)라는 게 아름다운 것들만의 ‘아상블라주’는 아니다. 추한 것들의 ‘아상블라주’도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것 같고, 2001년 펴낸 첫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1) 이후 2010년 펴낸 정치풍자 시집 <소문들>(문학과지성사, 2010)에 이르기까지 매 편의 시가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나고 있음에 결코 ‘한 때의 불장난’은 아닌 듯싶다. 군중의 부화뇌동에 함몰된 개인의 감성을 되살려보자는 외침으로도 들린다. 선배 시인들이 꽃을 보고 놀았다면 권혁웅은 ‘마징가 Z’를 갖고 놀았고, 선배 시인들이 비 오는 호숫가에서 애인과 헤어졌다면 권혁웅은 ‘신의주찹쌀순대 2층’에서 결별할까말까 망설였을 뿐, 그의 감성이 더럽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의 시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시작에서 비유(比喩)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권혁웅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의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마징가 계보’의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의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등등은 비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비유 덩어리다. 게다가 권혁웅의 비유는 알맹이를 돋보이게 하는 겸손한 비유다. 아무렇게나 고른 싸구려 선물을 비싼 포장지로 포장하면 기대를 배반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지만 정성으로 고른 귀한 선물을 수수한 포장지로 포장하면 기대 이상의 성의가 느껴지듯이, 권혁웅이 순대 접시나 새우젓 종지에 담아놓은 것들 또한 소박한 눈으로 다시 보게 된다. 그런 겸손하고 소박한 비유 또한 자질구레한 폐기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아상블라주’와 꼭 닮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듯이 시인들의 시작 또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시를 꽃그늘 아래서 또는 비 오는 밤 창가에서만 읽는 시대는 지났다. 콘크리트 숲 속 아파트 변기에 앉아 읽기도 하고 워크래프트(Warcraft) 게임을 하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기도 한다. 지난 세기 백남준(白南準)이 버려진 텔레비전 수상기들을 모아 조잡한 그림을 보여줬을 때 모두들 “그게 예술이냐? 아이들 장난이지”하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 ‘아이들 장난’이 ‘비디오 아트(Video Art)’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로 자리를 잡았듯이, 지금의 권혁웅의 ‘x싸는 시’ 또한 먼 훗날 “시와 미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말의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경험과 감성을 어떻게 보편화하여 공감적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쓰레기 같은 어휘들로 꽃 같은 비유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비유의 옷을 입힐 시대정신 또는 알맹이는 찾아냈는지, 보편성을 확보하고 시대정신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시’로서의 항상성(恒常性)은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 등등의 진지한 고민이 끊임없이 추가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