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8일 수요일

세월이 가면 - 청춘(靑春)은 가고 애수(哀愁)는 남는 것

비 내리는 보스턴 찰스 리버사이드.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朴寅煥; 1926년-1956년>


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술을 퍼마시면서 오감의 예민함을 죽이던 시절, 술집서 혓바닥이 꼬부라질 즈음이면 자기 자랑 좋아하는 친구들은 으레 안주거리 삼아 첫사랑을 이야기하곤 했다. 자랑했다. 술에 취해 비틀비틀 골목길 걸어 올라가다 속이 부대껴 구토할 때면 이상하게도 첫사랑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전봇대를 껴안으면 자동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온대나. 그리고는 첫사랑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첫사랑이어서 달콤하기는 하지만 이내 싫증이 나고, 또 그리움을 평생 동안 술잔에 채운다는 그 얼어 죽을 놈의 낭만을 위해서라도, 이별은 예정되어 있는 거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은근히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내겐 내세울 첫사랑이, 가슴 아픈 이별이, 가슴속에 피어나는 그리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흡사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놈이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반쯤 감긴 친구의 두 눈에 어리는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를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성에 눈을 뜬 여드름 사춘기, 예쁘장한 단발머리 여고생을 뒤따라가서 능청을 떨 숫기도 없었거니와, 대학에 들어가서도 미팅보다는 데모에 열을 올렸었다. 왜? 사랑이란 게 “의식이 흐리멍덩한 작자들의 배부른 유희”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좀 더 솔직히 고백컨대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이 멀었던 탓에 첫사랑은 커녕 지고지미하고 순결하고 이타적인 참사랑이란 것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되레 스탕달의 ‘적과 흑’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줄리앙 쏘렐처럼 사랑이란 것도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행여 아내가 들으면 섭섭할는지 모르겠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벚꽃 이파리들이 흩날리던 창경원에서의 사랑고백? 당시엔 진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아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이 여자라면 나를 이해하여 나의 반려자가 될 수 있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냉철한 계산으로 꼬드겼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여자라기보다는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였고, 핑크빛 사랑이 아닌 ‘인생 혁명’을 위한 동지로서의 합일(合一)이었다는 것을 토로한다. 못난 영혼, 후회스런 청춘, 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하나 만들지 못했을까?...그래서 하얀 눈 조명 빙그르르 돌아가는 신사동 88 캬바레 밤무대 가수들이 가성(假聲)에 거짓 웃음을 실어 나를 때엔 갑자기 찬바람이 그리워졌고 결국은 어느 뒷골목 전봇대를 붙잡고 토해내고말 독주를 마구 들이켰는지도 모르겠다. 

박인환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알량한 위안은 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박인환(朴寅煥; 1926년-1956년) 또한 청춘의 앨범 속에 고이 끼워둘 만큼 순수한 사랑 만들기에는 실패했던 것 같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느냐고? 1956년 환도(還都) 후 박인환이 죽기 얼마 전 서울 명동의 어느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쓴 시에 친구 이진섭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는 시 ‘세월이 가면’만 해도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첫사랑이 어쩌고 낭만이 저쩌고 떠들어대지만 천만의 말씀,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나 시 제목은 ‘세월이 가면’이라고 미래 시점(時點)으로 붙여놓고 본문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현재 시점으로 읊은 횡설수설 감상이 너무 허술(?)하거니와, 이름은 잊어버리고 눈동자와 입술만 기억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진지한 첫사랑의 추억은커녕 되레 어쩌다 하룻밤 만나 즐긴 풋사랑 대한 미련이 진하게 느껴진다. 시제를 통일하자면 ‘세월이 가면’은 ‘세월이 갔어도’가 맞고, 시제의 어긋남을 시적(詩的) 자유(自由)로 이해한다면 제목을 붙인 사람과 작품 속의 화자(話者)가 따로따로 놀게 된다. 

‘세월이 가면’은 사랑을 못해본 자신을 자책하면서 쓴 시로 보인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그 작품에 대해 사랑이나 낭만과는 거리게 멀게 “전쟁통에 겪은 비운과 불안, 좌절감, 상실감을 노래한 것으로서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찢긴 삶의 모습이 도시적 이미지를 통해 간결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 맞다. ‘세월이 가면’을 끄적거릴 때의 박인환은 희미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렸던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놈의 흔하고 흔한 첫사랑 하나 못해본 자신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첫 사랑이라고 가슴에 품을 만한 대상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이 10년이 넘도록 방치해뒀던 그의 첫사랑 애인이 묻혀 있는 서울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건 ‘세월이 가면’을 문학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가슴 아프고 애틋한 사랑시로만 포장하고 싶은 사람들의 어설픈 꾸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바, 기실 박인환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의 거리를 방황하는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품을 ‘그 눈동자 입술’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영혼이었기에 틈만 나면 술을 퍼마셨고 결국은 그로 인해 세상을 등졌다. ‘세월이 가면’을 쓰고 난 며칠 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폭음을 하고 귀가하여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전한다. 

군복 한 번 입어보지 못한 놈이 군대 이야기를 더 많이 주워들어 더 크게 떠들어대듯이 첫사랑 역시 첫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해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더 잘 아는 건 아닌지?! 첫사랑은 생각하고 꾸며대기 나름, 누구나의 가슴 속에든지 ‘그 눈동자 입술’은 있다고 믿어지는 바,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또한 ‘첫 사랑’이라는 상투적 소재를 빌려 인생의 애수(哀愁)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바로 문학이고 시일 터,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애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려니와,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인환은 ‘성공한 시인’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박인환은 1949년 작품 ‘거리’로 등단한 이후 1956년 타계할 때까지 작품 활동 기간이 7년도 채 안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월이 가면’이나 ‘목마와 숙녀’는 여느 대가의 작품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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