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8일 화요일

우리가 물이 되어 - 수극화(水剋火)인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인가?

플러싱 리버의 물과 롱아일랜드만의 물이 만나는 플러싱 베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이렇듯 고요하고 평안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986년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姜恩喬); 1945년- > 

원 전 4,5세기 서양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많은 원자로 이뤄져 있으며, 원자가 합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지만 동양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 나타난 용마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하도(河圖)’와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 나타난 신령스런 거북이 등에 쓰여 있었다는 ‘낙서(洛書)’에서 비롯된 음양의 이치를 풀기 위해 주역(周易)이 등장했고, 거기에 우주 만물과 모든 변화는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원소가 운행변전(運行變轉)하여 만들어진다는 오행(五行)설이 추가되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나타났던 바, 이미 은(殷)나라 유민(遺民) 기자(箕子; 기원전 1175?-1083?)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언급했다는 게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서양보다 5백년은 더 앞선다고 하겠다. 그 ‘오행설’은 전국시대 이후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의 상생설(相生說)과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의 상극설(相剋說)로 분화․발전한다. 

오행의 상극과 상생 관계도
오행에서도 특히 주목받았던 것은, 물은 생명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은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먹고 살던 농경문화권이었기에, 물이었던 것 같다. 음양오행의 출발점이었던 하도(河圖)와 낙수(落水) 둘 다 물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양오행설이 널리 퍼지기 시작할 즈음 활동했던 초나라의 노자(老子)도 그의 명저 ‘도덕경(道德經)’에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도(道)로 설명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故幾於道)”고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 물은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 일례로 냇물[川]에 머리[頁]가 붙어 만들어진 ‘순(順)’은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한자문화권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서 그런지 지금도 한자문화권의 많은 시인들이 물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고, 또 자연의 이치에 대한 순응의 상징으로 간주하면서, 물을 노래하고 있음을 본다.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1968년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 강은교(姜恩喬; 1945년- )도 그 중 하나였다. 1986년에 펴낸 자신의 시선집(詩選集) <우리가 물이 되어>의 표제시로 올린 ‘우리가 물이 되어’를 보면 오행설의 수극화(水剋火)를 풀어쓴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다.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나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은 한(漢)나라 초의 학자 복생(伏生)이 물에 부여
'강은교의 시세계' 2005년 천년의 시작
했던 ‘임양(任養)의 덕(德)’을 풀어쓴 것 같고,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는 ‘화극금(火剋金)’의 치열한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는 ‘수극화(水剋火)’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 쉽게 읽혀지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애송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뭔가 모자라 보인다. 시(詩)라는 것 또한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의 철학과 전통과 관습에서 배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십분 이해하더라도, 독창적인 시상(詩想) 대신 모두 가 다 아는 개념에 비유의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시적(詩的) 감동보다는 교시적(敎示的) 깨달음이 먼저 감지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수극화(水剋火)인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인가? 오행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도 ‘우리가 물이 되어’의 감상은 달라진다. 이 작품에서는 물과 불이 상극(相剋)으로만 파악되어 물의 이미지로 화합-생성-조화-생명-만남 등이 떠올려지는 반면 불의 이미지로 갈등-소멸-투쟁-죽음-이별 등이 떠올려진다지만, 상생의 관점에서 보면 수(水)는 목(木)을 낳고 목은 불[火]을 낳는 바, 사물을 선악 내지는 대립관계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거부감마저 느껴진다. 그럼으로써 ‘상선약수’의 덕을 축소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행설에서 비롯된 물의 이미지를 제쳐놓고 읽기도 뭐하고, 그걸 머릿속에 떠올려놓고 읽자니 멈칫거려지는 부분이 많은 바, 부담없이 매끄럽게 읽기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시이지만 곰곰이 따져 읽을 때는 꽤나 난해한 감상을 요구하는 시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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