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Vanity-부질없는 것들의 부질 있음

텍사스 주 오스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오 헨리 기념 박물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오 헨리는 오스틴 시절 189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집에 거주하면서 아내 아톨과 함께 딸을 키웠다. 


Vanity(부질없음)

A Poet sang so wondrous sweet 
한 시인이 놀랍도록 감미롭게 노래했네
That toiling thousands paused and listened long;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오래 귀 기울일 정도로
So lofty, strong and noble were his themes, 
테마들이 아주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했지
It seemed that strength supernal swayed his song. 
마치 천상의 힘이 그의 노래를 흔들어주는 것 같았어

He, god-like, chided poor, weak, weeping man, 
그는, 마치 신처럼, 가난하고 유약하고 징징대는 인간을 꾸짖었네
And bad him dry his foolish, shameful tears; 
그리고는 아둔하고 부끄러운 눈물을 닦으라고 했지
Taught that each soul on its proud self should lean, 
모든 영혼은 저마다의 자긍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어
And from that rampart scorn all earth-born fears.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두려워하는 경멸을 방어하려면.

The Poet grovelled on a fresh heaped mound, 
그 시인은 새로 솟은 언덕 위에서 기었지
Raised o'er the clay of one he'd fondly loved; 
아주 좋아하던 그 언덕의 진흙 위에서 컸어
And cursed the world, and drenched the sod with tears 
그리고는 세상을 저주했네, 그 흙을 눈물로 흠뻑 적시면서 말이야
And all the flimsy mockery of his precepts proved. 
자신이 깨달아 얻은 교훈들이 하잘 것 없는 조롱거리 흉내내기라는 걸 보여줬다네.

                                          <오 헨리(O. Henry): 1862년–1910년>

울 찬비가 내린다. 버려진 거리,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해서 더 썰렁해 뵌다. 뉴욕시 변두리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도 이성을 잃은 듯하다. 하늘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광기마저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온기를 찾아 헤매고 죽어 있는 것들은 자유를 만끽한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에 맞춰 스크린 한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들마저 끊어지고, 모든 관객이 다 빠져나갔을 때, 텅 빈 극장 안 맨 뒷줄 좌석에 버려진 것 같은 공허함이 길모퉁이 시커먼 쓰레기통에 차고 넘친다. 코트의 얇은 천 조직을 뚫고 파고드는 한기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초라한 자학, 갈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사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니까. 몇 달 전만 해도 따사로운 햇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붉은 벽돌담을 타고 흘러내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깔리는 빗물 역시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글을 쓰던 시절의
O. 헨리.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공금을 횡령하여 5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감방살이 후 모범수로 풀려난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1862년–1910년)가 O. 헨리(O. Henry)로 이름을 바꾸고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300편 가까운 단편을 썼던 것도 겨울 찬비가 내릴 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던 건 아닌가? 일상이 자질구레하게 느껴져서, 모든 게 부질없다고 여겨져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마저도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뭔가 확인해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그의 대표작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를 다시 읽고는 찬비 내리는 그리니치빌리지를 어슬렁거리며 베어맨(Behrman)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존시(Johnsy)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그린 것 같은 담쟁이 넝쿨 잎을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애써본 사람들도 동의하리라. 마지막 잎새는 존시의 희망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가짜 잎새로 존시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베어맨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그리니치빌리지의 골목들이 지저분한 욕망과 불안으로 꾸불텅꾸불텅 뒤엉켜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뉴욕 뒷골목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통해 따뜻한 휴머니즘을 그렸다”는 평론가들의 작품평이 부질없기만 하다.

O. 헨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그가 이따금 시를 썼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너무 유명하여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고 얼렁뚱땅 제쳐놓는 뻔뻔한 부끄러움으로 읽고 또 읽어본다. 시나 소설이나 그게 그거, 쓰는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 시의 형태를 갖추든 소설로 풀어지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O. 헨리가 우울한 감상주의자였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한다. 시든 소설이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거라는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시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발행했던 주간지 ‘롤링 스톤(The Rolling Stones)’에 발표했던 시 ‘Vanity(부질없음)’도 그런 불안의 표출로 보인다. O. 헨리가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하는 창구로 이용했던 ‘롤링 스톤’은 발행부수가 한때 1,500부에 이르기도 했지만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수입이 되지 않아 결국은 때려치우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한 시상(詩想)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때쯤이었으리라. 우리말로 ‘덧없음’ ‘허무’ ‘공허’ ‘허영’ ‘허식’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vanity’의 뿌리는 ‘텅 빔’ ‘헛됨’을 뜻하는 라틴어 ‘vanitas’이고 ‘vanitas’는 원래 “자기 자신을 속이다”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바, 혹여 O. 헨리가 자신의 글쓰기나 삶까지도 ‘헛된 자기기만’으로 여겼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문학적 단상을 ‘하잘 것 없는 조롱(flimsy mockery)’이라고 비하하면서도 뭔가 끄적거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던 O. 헨리가 안쓰럽기도 하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불용(不容)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입술을 깨물면서 ‘마지막 잎새’를 썼던 O. 헨리의 눈물처럼. 먹고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열정이 ‘하찮은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부질없음’이라는 시까지 남긴 시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려보는 게 독자의 의무라고 여기는 것도 부질없는 짓인가?! 자기 자신을 기만이라도 해서 부질없는 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더 외롭고 허망해질 터, 시인 O. 헨리의 우울한 ‘부질없음’을 독자의 ‘부질있음’으로 감싸주고 싶다. 



2019년 12월 16일 월요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순응(順應)과 적응(適應) 사이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저물어가는 세월의 강물에 올 한 해를 일군 삽을 씻으면서 순응을 연습해본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창작과비평사, 정희성(鄭喜成); 1945년- >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어디 저물어가는 게 올 한 해뿐이랴. 세상도 저물어왔고, 나도 저물어왔고,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도 저물어왔으리라. 그게 피부로 느껴진다. 매해 연말, 1년 중 특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소회와 어줍잖은 감상들에 지나지 않건만 왜 이다지도 새롭게 느껴지는 건가? 그런 것들을 겪을 만큼 겪어 이제는 이력이 생겼다는 듯이 담담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던가? 

한자 순(順)은 내 천(川)에 머리 혈(頁)이 붙어서 된 것으로서, 머리를 흐르는 물에 처박는 모양을 연상케 한다. 혹자는 “흐르는 물과도 같은 성현의 도리에 머리를 숙이고 따르다”라고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윗사람 말을 잘 듣는 것을 ‘순(順)하다’라고 표현하면서 갑순이 미순이 호순이에게 ‘순(順)’자를 붙인 사람들의 축소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흐르는 물’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성현의 도리’보다 훨씬 더 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자연의 이치에 따르다’라는 의미의 순리(順理)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고, 순리에 적응하여 익숙해지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다. 

흔히 ‘순응’과 ‘적응(適應)’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말맛이 약간 다르다. 갈 적(適)은 ‘누그러지다’라는 의미의 밑둥 적(啇)에 쉬엄쉬엄 걸을 착(辶)이 붙은 것으로서 길을 가다가 지치면 쉬엄쉬엄 간다는 의미, 또 응할 응(應)은 기러기 안(雁)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이고, 북반부에서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하고 봄이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는 철새 기러기는 무리 짓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바, 응(應)은 환경의 변화나 무리를 좇는 것을 말한다. ‘순응’이 변함없이 항상 옳은 자연의 이치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적응’은 자신의 호오(好惡)와는 관계없이 외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순응’은 ‘adaptation’이고 ‘적응’은 ‘assimilation’이다. ‘adaptation’의 뿌리는 ‘적합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daptare’이고 ‘assimilation’은 ‘닮다’ ‘비슷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ssimulare’다. ‘순응’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라면 ‘적응’은 싫든 좋든 어찌할 수 없어서 따르는 것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회의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회 변화의 주체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인간과 사회는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는 ‘프랙탈(fractal)’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fractal’은 폴란드 태생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Benoit Mandelbrot)가 창안한 개념, 어원은 ‘조각 난’ ‘부분으로 부서진’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fractus’로서, 자연물이나 수학적 분석 등에서 나타나는 규칙이나 질서를 말한다. 그 ‘프랙탈’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해보면 인간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변화하고, 그렇게 변화한 인간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사회에 인간은 또 다시 순응 또는 적응하는 바, 그 과정에서의 어느 정도의 부작용과 갈등은 불가피한 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다수 또는 힘 있는 세력이 사회변화를 초래할 경우 그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응’할 것인지, ‘적응’할 것인지, 또는 거부할 것인지를 놓고 고뇌하는 것을 본다. 

창작과비평사에서 1978년에 간행한 
정희성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맞다. 순응할 건가? 적응할 건가? 그게 문제다. 경상남도 창원 출신 시인 정희성(鄭喜成, 1945년- ) 또한 ‘순응’과 ‘적응’과 ‘거부’ 사이에서 무척 방황했던 듯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순응이 여의치 않자 적응이나마 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제16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는 등 한국사회의 소수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던 그의 시작(詩作)에 대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위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프랙탈’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군부독재 세력과 자본가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 순응 또는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했었다.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으므로 한국 사회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거부할 수 없는 억압 앞에서는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諦念)이 그의 작품의 기저를 이루고 있음이 확연히 감지된다. 

정희성이 1978년에 발표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도 순응과 적응 사이에서의 체념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결코 싸구려 체념은 아니다. 살필 체(諦), 생각 념(念), 생각을 살펴서 깨닫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체념과 닮았다. 자연의 이치를 상징하는 ‘흐르는 물’에 고단한 노동을 상징하는 ‘삽’을 씻고 슬픔도 내다버리는 행위에서는 세상 변화에 대한 순응의 의지가 읽혀지고, ‘샛강 바닥의 썩은 물’은 그 변화에 대한 순응 과정에서의 거부감의 배출로 보이며,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고독하고도 처절한 적응 의지가 확연히 감지된다. 이 작품이 사회참여 시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일말의 감동을 덤으로 주는 것도 ‘삽’과 ‘샛강 바닥 썩은 물’과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을 모두 ‘흐르는 강물’로 정화하여 떠내려 보내는 체념과 달관(達觀)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휘 선택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나름대로 시적 카타르시스(katharsis)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어두워서 다 읽고 나면 뒤끝이 우울해지는 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흠. 그래서, 덜 다듬어진 것 같아서 아쉽다.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고풍의상(古風衣裳)-시적 감동 없는 ‘옛것 사랑’

18,9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사진 오른쪽)와 1930년대  기생들의 모습.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회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1939),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연과 환경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게 편했던 농경정착문화권에서는 옛것 즉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대의 경험과 습관과 지식을 중시했었다. 그런 것들 가운데 줄기를 삼을만한 것들을 간추려 전통(傳統)이라고도 했다. 농경정착문화권의 ‘선생님’으로 불리는 공자(孔子) 또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역설했었다. 옛 것을 배우고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됨직하다는 것이었다. 

‘옛것(故)’이라는 게 뭔가? 한자 ‘故’는 옛날을 뜻하는 고(古)와 글월이나 ‘회초리로 치다’를 뜻하는 등글월문(攵=攴)이 합쳐진 것,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관습이나 전통 등 글월로 기록해둘 만한 가치 있는 ‘옛것’을 말한다. 흔히 옛 고(古, 故)를 영어 ‘old’와 같은 의미로 간주하지만 천만의 말씀, 영어 ‘old’의 뿌리는 ‘성인’ ‘다 큰 사람’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alt’가 영어권으로 넘어와서 변한 ‘ald’로서 ‘(현재의 시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묵었다(성장했다)’라는 말맛을 풍긴다. 한자로 말하자면 구(舊)에 가깝다. 예를 들면 ‘old house’는 ‘지금은 없는 옛날 집’이 아니라 ‘현존하지만 오래 되어 낡은 집’을 뜻한다. 

수 천 년 동안 공자 말씀을 귀 따갑게 듣고 살아온 탓인지 한국인들은 옛것을 무척이나 중시하는 척 한다. 말 그대로 ‘말로만’이다. 컴퓨터 하나로 지구촌을 들여다보는 요즘에도 한국적 전통을 비판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미화하면서, 시대에 맞지 않는 습관이나 생활양식을 개선하기 보다는 이중적 태도의 관성 속에서 안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삶의 기본인 의식주(衣食住)만 봐도 그렇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선호하면서도 기와집이나 초가(草家)를 예찬하고, 설렁탕이나 비빔밥보다는 일식이나 양식을 고급으로 간주하면서도 ‘한식의 국제화’를 외치는가 하면, “이 지구상에 한복처럼 아름다운 의상은 없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도 누군가 치마저고리 입고 사무실에 출근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자꾸만 위아래를 훑는 것을 본다.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청록집'과 시인 조지훈의 만년의 모습
경북 영양(英陽) 출신으로 1946년 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과 함께 자연 친화적인 시들을 모은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했다고 해서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한 데뷔작 ‘고풍의상(古風衣裳)’도 ‘말로만 옛것 사랑’인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한국현대시문학사에서 과대평가된 작품들 중의 하나,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조지훈의 나이는 열아홉, 채 스물이 안 된 문학청년의 작품 치고는 발군의 세련미가 돋보인다고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중고교 국어시간에 가르칠만한 고전으로 대접할 일은 아닌 듯싶다. 한국현대문학사 초창기에 ‘청록파’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하면서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긴 그의 문학적·학문적 성과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관찰자의 느낌과 서술만 있을 뿐 즉 주체(작품 속의 화자)와 객체(고풍의상) 사이의 교감이 없어 시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적 감동이 차단되어 있거니와,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아닌 소재의 주관적인 묘사에만 치중함으로써 시공(時空)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 민속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은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한복을 할머니 할아버지 옷으로나 간주하는 요즘의 신세대 독자들에게는 공감 불가능한 ‘온고이지신’, 한옥 헐고 아파트 짓는 요즘 쫄쫄이 청바지에 쫄티 즐겨 입는 21세기 젊은이들에게 회장저고리나 열두 폭 치마나 운혜(雲鞋) 당혜(唐鞋)를 권할 수도 없거니와, 한국의 전통미가 어쩌고저쩌고 강제 주입시킨 후 이 작품을 백 번 천 번을 외우게 해봤자 시적 감동이 전해질 리는 만무, 시문학 교실의 학생이 아닌 전통의상박물관의 관람객에게나 들려주면 적합할 듯싶다. 

일본 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억압 아래서 감히 식민지 조선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조지훈의 민족정신과 패기는 칭찬해주고 싶지만 문학성만을 놓고 볼 때 ‘고풍의상’은 한국의 전통미를 예찬하기 위한 목적성을 가지고 쓴 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그 목적성이 과녁을 크게 벗어났다. 시의 목적성은 단 하나, 음식은 맛으로 먹고 옷은 멋으로 입듯이, 감동으로 읽혀야 한다. 시를 쓸 ‘당시의 의도’만 있을 뿐 그 시를 읽는 ‘현재의 감동’이 없으면 그 때 그 시절의 선전선동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 즉 시적 감동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어야 오랜 세월을 두고 읽혀진다는 것을 시를 짓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 염세주의 청춘의 한탄

뉴욕 퀸즈 플러싱 개천변 풍경.

증진상(贈陳商; 진상에게 주다)

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장안유남아 이십심이후)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

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능가퇴안전 초사계주후)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 끌어당기네

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인생유궁졸 일모료음주)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

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 (지금도이색 하필수백수)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리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 (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진술성이여,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

學爲堯舜文 時人責衰偶 (학위요순문 시인책쇠우)
배움이 요순의 문장에 이르러도 세상 사람들은 쇠약하다고 꾸짖네 

柴門車轍凍 日下楡影瘦 (시문거철동 일하유영수)
사립문에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고 해질 녘 느릅나무 그림자 수척한데

黃昏訪我來 苦節靑陽皺 (황혼방아래 고절청양추)
황혼이 나를 찾아와 절조 힘들게 지키려니 푸른 햇살마저 주름지네

太華五千仞 劈地抽森秀 (태화오천인 벽지추삼수)
태화산은 오천 길이나 되어 땅을 갈라 나무들을 빼어나게 키워내고

旁古無寸尋 一上戛牛斗 (방고무촌심 일상알우두)
주변에 겨룰만한 게 없어서 한 번 솟아 견우성과 북두성을 찌르는데

公卿縱不怜 寧能鎖吾口 (공경종불령 영능쇄오구)
높으신 분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더라도 어찌 내 입까지 막으랴

李生師太華 大坐看白晝 (이생사태화 대좌간백주)
나도 태화산을 스승 삼고 크게 앉아 밝은 낮을 바라봤건만

逢霜作樸樕 得氣爲春柳 (봉상작박속 득기위춘류)
서리를 만나면 잡목이 되지만 기를 얻으면 봄버들이 된다더니

禮節乃相去 顦顇如芻狗 (예절내상거 초췌여추구)
예와 절이 서로 떠나가니 초췌하기가 풀강아지 같네 

風雪直齋壇 墨組貫銅綬 (풍설직재단 묵조관동수) 
풍설로 재단 바로 잡고 검은 끈으로 동수 꿰차려 했지만 

臣妾氣態間 唯欲承箕帚 (신첩기태간 유욕승기추) 
계집 같은 기세와 자태로 키질과 빗자루 질이나 하고 있으니

天眼何時開 古劍庸一吼 (천안하시개 고검용일후)
하늘 눈이 언제 열려 옛 검 휘두르며 큰소리 쳐보나 

                                                             <이하(李賀); 790~816>

세주의(厭世主義, pessimism)는 세상이 불합리하고 비애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 한자 싫어할 염(厭)은 지붕이나 너럭바위 아래의 막힌 공간을 그린 엄(厂) 속에 ‘물리다’ ‘싫어하다’라는 의미의 염(猒)자가 들어있는 형상으로서 답답한 가운데서 물리고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주관적이다. 반면 영어 ‘pessimism’의 뿌리는 ‘최악’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s’로서 ‘pessimism’, 보는 이가 ‘worst’를 보느냐 ‘best’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객관적이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한자문화권 사람들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가 달라 보인다고 믿는 영어문화권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느껴진다. 

     이하의 초상(출처-中文百科)
살아온 과거보다 살아갈 미래가 더 많은 사람들을 ‘청춘(靑春)’이라고 한다. 요즘 청춘은 젊은이를 뜻하는 말로 변해버렸지만 원래는 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중국의 오행(五行)으로 풀이하면 봄은 파란 청(靑), 여름은 붉을 적(赤), 가을은 흰 백(白), 겨울은 검을 현(玄)에 해당하는바, 그래서 인생을 청춘(靑春)·주하(朱夏)·백추(白秋)·현동(玄冬)이라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었다. 봄날의 청춘은 앞날이 창창하여 뭔가 잘못돼도 그걸 바로 잡을 가능성이 크기에 쉽게 절망하지 않고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로 인해 절망하여 염세주의에 푹 빠져 있다면? 봄날의 꽃가지가 꽃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시드는 꼴, 그 꼴이 되었으니 오죽하겠느냐는 동정과 연민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자고이래 그런 동정과 연민을 시로 읊은 시인들이 수두룩했었다.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도 앞길이 콱 막힌 나머지 염세주의에 푹 절여진 청춘이었다. 그가 낙백하여 술로 울분을 달래던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는 ‘진상(陳商: ?-855))에게 주다(贈陳商)’를 보면 삶에 대한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이 이십에 마음이 이미 썩어서(二十心已朽), 세상만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불가의 능가경(楞伽經)이나 탐독하고(楞伽堆案前),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자 세상 원망하다가 돌덩이를 껴안고 멱라(汨羅)에 몸을 던진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나 읊조리고 있음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하가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인정받지 못한 진상을 동정하여 이 시를 썼다고 주장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이하는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즉 서기 807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올라왔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사(進士)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응시기회를 박탈당해 낙향했고, 808년 겨울 장안(長安)으로 가서 벼슬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겨우 음서제(蔭敍制)로 종9품 봉례(奉禮) 자리를 얻어 제사 심부름이나 하다가, 813년 봄 “봉례 말직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랴”라고 탄식하면서 낙향했었다. 그러다가 장안 시절의 친구 장철(張徹)에게 도움을 청하여 관직을 구하고자 노주(潞州, 지금의 산서성 장치현)로 향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귀향했고 이후 우울증으로 인한 병을 얻어 817년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반면 출생연도가 미상이지만 이하의 후배로 보이는 진상은 원화 9년 즉 814년 과거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와 예부시랑(禮部侍郎)을 거처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면서 문집 7권을 남기고 또 824년에서 826년까지 재위했던 경종(敬宗)의 실록(實錄) 10권을 편찬하기도 했었다. 이 시는 이하가 봉례랑에 임명되던 스무 살 시절 즉 809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에는 진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었으므로 뜻을 펴지 못하는 진상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이하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보는 게 옳거니와, 그러므로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라는 구절도 진술성이 처량하다는 게 아니라 “진술성(‘술성’은 진상의 자)이여, (내 신세가)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봉례랑이 되어)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재주를 인정받지 못해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선배가 전도유망한 후배를 붙잡고 늘어놓은 술주정쯤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이하의 시작(詩作)에 귀신이나 죽음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염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거꾸로 보면 염세주의 덕분에 이하가 ‘귀재절’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자고로 희망보다는 절망, 기쁨보다는 슬픔, 낙천주의보다는 염세주의가 시를 두께를 두껍게 하고 깊이를 깊게 해왔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이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널리 읽혀지는 게 그 만큼 많은 청춘들이 염세주의에 빠져 이하와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만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2019년 12월 7일 토요일

추일 서정(秋日抒情)-시인의 눈으로 본 색(色)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토룬 시가지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 코페르니쿠스 생가 등 중세 유적이 잘 보존돼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추일 서정(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7, 인문평론,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 


자 눈 목(目)은 눈의 생김새를 본뜬 것, 눈을 뜨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이든 아니든 뭔가가 보인다. 그걸 '견(見)'이라고 했다. 그 '견'을 좀 더 자세히 구분하기 위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을 볼 시(視)라고 했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날 현(現)이라고 했다. 시(視)는 신의 강림이나 뭔가를 희구하여 제사를 지낼 때의 제단을 본뜬 시(示)와 볼 견(見)이 합쳐진 것이고 현(現)은 빛을 발하는 구슬 옥(玉)과 볼 견(見)이 합쳐진 것, 시(視)의 주체는 뭔가 보고자 하는 아(我)이고 현(現)의 주체는 나의 눈에 보이는 비아(非我), 영어로 말하자면 시(視)는 'see'이고 현(現)은 'appear'다. 'see'의 뿌리는 'to see, look, behold; observe, perceive' 등의 의미를 지닌 고대영어 'seon'이고 'seon'의뿌리는 'to follow'의 의미를 지닌 인도 유럽어의 접두사 'sekw- '로서 나의 눈이 나의 의지대로 뭔가를 따라가면서(to follow) 보는 것을 말하는 반면 'appear'의 뿌리는 '앞으로 나오다'(to come forth)라는 의미의 라틴어 'apparere'로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볼 때 눈으로 보는 건가? 자신의 뇌에 이미 입력돼 있는 정보로 해석하는 건가? 각막을 통해 들어온 빛은 수정체에서 굴절돼 유리체를 통과해서 망막에 상이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대뇌피질(大腦皮質)의 후두엽(後頭葉)에 전달된다. 후두엽에는 시각연합영역과 일차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바,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 모양 등을 분석한 후, 그 결과를 이미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 즉 개개인의 지식과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장애가 생기면 눈의 다른 부위에 이상이 없더라도 볼 수 없게 되고 후두엽에서 발작이 일어나면 환시(幻視, Visual hallucication)가 유발되기도 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지만 그 일견(一見)이 개개인의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에 따라 제각각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우스개 속담이 생겨난 것도 그와 무관치 않거니와,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영어 속담도 뭔가를 본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한 뇌의 해석에 지나지 않고 그게 믿음으로 굳어진다는 의미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믿음 즉 주관적인 관찰(觀察)에 의해 얻어진 개념을 ‘관념(觀念)’이라고 한다. 한자 볼 관(觀)은 황새 관(雚)에 볼 견(見)이 붙어 만들어진 것이고 생각 념(念)은 이제 금(今)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진 생각을 말한다. 

1936년 창간된 문예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거점으로 삼아 “시는 하나의 회화”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들를 발표했다는 시인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은 꽤나 관념적이었던 것 같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관념과 상상력의 안경을 통해 봤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낙엽'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후 소련의 점령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을 떠돌아야 했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유한 것은 쓸쓸한 가을날 길 위에 나뒹구는 낙엽의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덮어줄 수 있지만, 그걸 보고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떠올린 것은 김광균 혼자만의 상상이어서 실소가 머금어진다. '도룬'은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도시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의 일본어 발음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큰 공습이나 포격을 당하지 않아 르네상스 시기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생가 등 중세유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된 도시들 중의 하나, 1939년 9월 큰 저항없이 토룬을 점령한 나치 독일은 그곳이 한 때 프러시아의 영토였던 점을 들어 독일 영토로 병합한 후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과 폴란드인들을 대거 추방하거나 학살하고는 포로수용소로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룬에서 독일군과 폴란드군과의 공방이 치열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흰 이빨을 드러낸 공장의 지붕'과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을 등장시켜 자신이 의도하는 황량한 그림을 그리고 있음에 이 시를 발표할 당시 26세 일본 식민지 청년의 뇌속에 입력된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 시를 읽은 독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룬'이라는 도시를 알고 있었는지도 의문, '추일서정'이라는 제목이 없었더라면 이 시의 내용을 개인의 주관적 서정이 아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였을 터, 가공의 소재로 그럴싸한 그림을 그린 김광균의 환시에 속아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추일서정'이 실려 있는  김광균의 
두번째 시집 '기항지'(1947년, 정음사)
기실 김광균 작품세계의 진짜 매력은 '환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성으로 머릿속에 그린 혼자만의 그림을 이미지의 조합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재주가 탁월하여. “회화적 이미지에 도회적 감각과 낭만적 서정성을 가미한 독특한 시풍”을 구축했다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김광균의 시작(詩作)에 주지주의니 모더니즘(Modernism)이니 하는 칭찬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데 대해서까지는 동의할 수가 없다. 흔히 김광균에 대해 “T.E.흄, E.파운드, T.S.엘리어트 등 영미 이미지즘 시운동을 도입 소개한 김기림(金起林)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아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했다”고 주장하지만 꼼꼼이 살펴보면 결이 확실히 다르다. 현대 문명에 비판적이고 이미지를 선호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흄이나 파운드 등이 자신의 의지나 감정보다는 지성과 객관을 중시하여 '정서(sentiment)'를 배제한 채 순간의 이미지 포착에 주력했던 반면 김광균은 자신의 정서를 여과없이 드러내 큰 차이를 보이거니와, 영미 시단의 이미지스트들이 사물의 '현(現)'을 그대로 그려냈다면 김광균은 사물을 '시(視)'하여 자신의 뇌에 입력된 정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김광균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비애 등의 감상과 연결된 현란한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수식어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결국 산뜻한 눈요기로서의 풍경만을 연출할 뿐, 내면의 구체적 경험과 연결된 감동의 세계에 연결되지는 못한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르다. 이 사람이 본 것과 저 사람이 본 것도 다르다.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눈을 통해 들어는 모든 것은 색(色), 그 색은 개개인의 뇌 속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바, 그 변화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공감을 유도하는 게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얼마나 크게 찾아내는가에 따라 많이 읽혀지고 덜 읽혀진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읽던 '추일서정'과 세상살이 어느 정도 경험한 지금 다시 읽어보는 '추일서정'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게 색이기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