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Herbsttag(가을날)’ - 또 그 ‘때’가 왔다

보스턴 캠브릿지와 알스턴 사이를 흐르는 찰스 리버 사이드.  가을색이 완연하다.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때마다 릴케의 시 '가을날'을 다시 읇조려 본다.






















Herbsttag(가을날)

Herr①: es ist Zeit.② Der Sommer war sehr groß.③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④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⑤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주여①, 가을이 왔습니다.②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③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④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년-1926년> 

가 왔다. 무슨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하는 때’를 떠올리겠지만 천만의 말씀, 가을이 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23.5˚나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 땅덩어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한 이래 “태양의 황경이 180˚를 넘어서면서 태양이 적도를 통과하여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들어가는 때”를 ‘가을’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거창한 의미를 가지기에 ‘때가 왔다’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태양으로부터 약 1억 5000만㎞ 떨어진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의 궤적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넘어가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낮과 밤의 기온차 또한 크게 벌어지고 과실이 무르익고 식물의 생장이 휴면기에 들어가기에 자고이래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을’을 뜻하는 영어 ‘autumn’의 뿌리도 라틴어 ‘autumnus’로서 ‘수확(收穫)’을 뜻하기도 한다. 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영어 ‘fall’은 양분의 공급이 중단된 잎들이나 과실이 ‘떨어지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가을’이 ‘인생의 수확기’ ‘내리막길’ ‘후반부’ 등을 비유하는 데 쓰여 왔다는 건 가방 끈 짧은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 

맞다. 꼭 이맘 때 쯤이었으리라,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년-1926년)가 ‘가을날(Herbsttag)’을 쓴 것도. 그 ‘가을날’ 첫머리가 ‘Herr①’ 즉 ‘주(主)’로 시작하기에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구하고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역사 유구하고 인류 보편적이라는 증거가 또 하나 나타났다고 반색하겠지만 그 또한 만만의 말씀, 여기서의 ‘주’는 기독교의 신을 특정한 게 아니라 ‘대자연’ 또는 그것을 신격화한 ‘조물주(造物主)’로 해석하는 게 옳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느냐고? 그 작품을 쓸 무렵의 릴케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등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에 반발하여 과학적 이성적 태도를 취했었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가을날’ 첫 번째 행의 ‘groß’도 이 작품이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③? 무슨 자다가 일어나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서양문화=기독교 문화’라고 수박의 겉만 핥아온 한반도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를 의식하여 ‘groß’를 ‘위대하다’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왔지만, 기실 ‘groß’는 ‘great’ 뿐만 아니라 ‘big’ ‘magnificent’ 등의 의미도 지니는 바, 이 작품에서는 ‘굉장하다’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문맥이 통한다. 술 퍼마시고 중언부언하지 않는 한 여름을 위대하다고 칭찬해놓고 가을을 노래할 시인은 없을 테니까. 찌는 듯한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고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오장육부가 젖고 파리와 모기가 평화를 물어뜯던 여름은 참 지긋지긋했었으나, 그로 인해 만물이 생장하기에 차마 투덜거릴 수가 없어서, ‘참 굉장했었다’라는 반어법(反語法)을 사용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es ist Zeit.’②를 ‘가을이 왔다’고 번역한 것도 엉터리 중의 엉터리, 영어로 바꾸면 ‘It's Time’으로서, 예수가 재림하여 심판해주기를 고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상용 어구를 풍자하여 ‘드디어 때가 됐다(왔다)’고 너스레를 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신의 은총 속에서 영혼의 완숙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작품”이라고 떠벌이는 것이야말로 코미디의 클라이막스, 이 작품의 주제는 니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빨이 흔들리도록 곱씹었던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不安)과 고독(孤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④’라는 셋째 연 첫 행에 함축돼 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 즉 실존으로서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인간’을 의미하며,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는 불안과 고독을 인간이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어줍잖게 종교 따위에 귀의하지는 않겠다는 실존 선언이며, 그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쓰겠다⑤’는 것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을 앞두고 가을바람이 나뭇잎들을 떨어뜨려 이리저리 몰고 다닐 때 그 나뭇잎들과 함께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실존선언이야말로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조물주에 대한 가장 치열한 반항이 아닌가?! 

1900년경의 릴케
릴케를 독일시인이라고 떠들어대는 것도 낯간지러운 오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일어권 시인’이라고 해야 옳다. 1875년 지금은 체코로 불리는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난 릴케는 청년기 이후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반시대·반통속적인 줏대를 길렀고, 뮌헨서 공부하고 독일어로 말하고 썼지만 독일 지배 하 체코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의미에서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1899)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F.A.R. 로댕에게서 조각을 배우는 등 국적이나 민족주의에 연연하지 않았었다. 개개의 형상에 의지하였던 생의 불안을 존재적 문제로 다시 수용하면서 아프리카와 에스파냐 등지를 방황하다가 피카소의 그림이라든지 발레리의 시와 접한 후 10여년에 걸쳐 대표작 중의 하나인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를 완성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시(長詩) ‘두이노의 비가’는 ‘가을날’의 해설판이자 완결판, 릴케 자신이 1912년 1월 중순 어느 날 북풍이 몰아치는 두이노성 절벽을 걸어내려 가다가 사나운 바람소리와 물결소리 속의 목소리 듣고 길 위에서 받아썼다는 “내가 울부짖은들 천사의 서열 가운데 그 누가 들어줄 것인가?”로 시작되는데, 천사 조차도 들어주지 않는 인간의 고독을 천착하고는 “삶과 죽음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에서만 인간은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평생 고독과 불안에 시달렸을망정 ‘예수님’이나 ‘하느님’은 찾지 않았고 죽음 또한 주로 스위스 시에르 근처의 뮈조트 성(城)에서 지내면서 발레리의 작품을 번역하던 중에 담담하게 맞이했다고 전한다. 

자, 어쨌거나 이제 때가 됐다. 아직은 따사로운 햇살이 ‘마지막 과실’들을 완성시킴으로써 포도주의 단맛이 더 한층 깊어지겠지만, 머잖아 나뭇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창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런 가을밤이 더욱 더 길어지면서, 이제 집짓기를 포기한 사람이 잠자지 않고, 읽고 , 그리고 긴 편지를 써야할 때가 왔다. 더러는 해질 무렵 거리의 낙엽이 되어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삶이 뭔지, 사는 게 왜 이다지도 쓸쓸한지, 피할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이라면 어찌 부둥켜안아야 하는 건지를 곱씹고 또 곱씹으리라. 기억도 가물가물한 학창시절에 처음 읽었던 릴케의 ‘가을날’을 다시금 해석하면서.

2013년 10월 2일 수요일

추풍인(秋風引)-가을 타는 남자의 술래잡기


秋風引(추풍인) 

何處秋風至(하처추풍지)  어느 곳에까지 가을바람이 왔나? 
蕭蕭送雁群(소소송안군)  소소 불어 기러기 떼 보내더니 
朝來入庭樹(조래입정수)  아침에 정원 나무를 흔들어대는데 
孤客最先聞(고객최선문)  외로운 나그네가 제일 먼저 듣네 

                                               <유우석(劉禹錫); 772년-842년> 

월과 함께 술래잡기 놀이하는 것 같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셀 동안 아니 그것도 귀찮으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따위의 열 글자짜리 구절을 외울 동안 살금살금 다가와 뒷등을 탁 치고 달아나는 놀이 말이다. “이젠 진짜 가을이구나” 하는 말을 그치자마자 낙엽들이 뒷등을 탁 치고 달아나는 것 같다. 10월 들어 두 번째 맞은 휴일 오후, 낙엽에게서 등을 얻어맞은 분함을 풀기 위해 한시(漢詩) 모음집을 꺼내 두 눈 꼭 감고 점 보듯이 아무 데나 펼치자 당(唐)의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 술래놀이를 하느냐?”는 듯이 허허로이 웃는다. 가을바람이 어디까지 왔느냐고? 외로운 이민자의 귓전에까지 근접한 것 같다. 소소(蕭蕭)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의뭉 떨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기실 그 소소 바람 소리를 제일 먼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맨 처음 이사 왔을 때 값싼 코압(Co-Op) 아파트일망정 수목이 울창한 ‘잉글리시 가든(English Garden)’이 있는 것을 망외의 기쁨으로 여겼건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게 형장(刑場)으로 바뀔 줄이야! 아무리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어도 가을은 왔고, 매해 여름 무성한 욕망(慾望)으로 하늘을 덮던 플라타나스 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마다 자포자기(自暴自棄)와 미련이 교차하면서, 서늘한 가슴앓이가 도지곤 했다. 분수대 주변에 심겨진 팬지들의 꽃잎도 말라비틀어지고, 관리소 직원들을 약 올리듯이 웃자라던 잡초들 또한 시큰둥하게 누워 텅 빈 하늘이나 바라보고,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온 듯 중국집 배달부가 이 쪽 저 쪽을 오가며 아파트 이름을 확인할 때 가난한 이민자의 권태로운 일상(日常)이 문득 초라해지면서 내 것이 아닌 듯 서먹서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랬다. 가을은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어도 막무가내로 왔다. 잉글리시 가든을 뒤덮고 있던 초록이 커피색으로 짙어갈 즈음이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준비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건 나무들도 마찬가지, 소소 바람이 불면 잎의 양분이 줄기 쪽으로 옮겨가 엽록체가 분해되어 녹색을 잃고, 그와 동시에 잎자루 기부(基部)에 이층(離層)이 형성되고, 이층 세포의 접착력이 약해지면 잎이 탈락하게 되는 것을 골백번도 더 경험했건만 매번 처음 겪는다는 듯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짝이 없다. 나이 먹을수록 남성 호르몬이 늘어났는지 대범해져가는 아내는 “나무가 알기는 뭘 알겠어요? 감정 이입이 지나친 거 아닌가요?” 하고 배시시 웃지만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소소 바람 불 때마다 서걱이는 나뭇잎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 끝에 매달려 있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모양을 그저 그런 자연(自然)으로 무심히 바라볼 수가 없다. 

하긴 자연이 그렇고,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면,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지난 여름 동안 같은 나ant가지에 매달려, 사랑을 속삭이고, 우정을 나누며, 꿈과 희망을 키워왔으면서도 안녕이란 말 한마디 없이 미련과 자포자기로 헤어져버리는 무정(無情)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미련과 자포자기? 그러고 보니 참 익숙한 한 쌍의 노리개 같다. 그것들은 이룬 것도 없이 아랫배의 기름기만 부풀려가면서 달력의 숫자들을 징검다리 삼아 세월을 건너뛰고 있는 중년남자가 손바닥 피를 잘 돌게 한답시고 주물럭거렸던 한 쌍의 호두알 같은 것이었다. 누구는 낙엽을 태우면서 풍요(豊饒)와 윤택(潤澤)의 기억을 떠올렸다지만 뭔가 이룩해보려고 항상 쫓기듯이 살아온 이민자에겐 차마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부끄러이 실토한다. 그래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부끄러움 하나, 어느 덧 ‘가을을 타는 남자’가 돼버렸다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엊그제 서울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거기서도 미련과 자포자기의 낙엽들이 어지러이 엇갈리고 있었다. 모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는 친구는 “회사에서 용도 폐기당할 것 같다. 이제 떨어져나갈 날이 머지 않았다”며 술에 절어있었고, 사업에 성공하여 돈 좀 벌었다는 친구는 제까짓 놈이 늙으면 얼마나 늙었다고 청춘(?)을 되살리겠다며 열댓살 연하의 아가씨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다가 가정파탄과 부도를 맞았다고 했고, 학창 시절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 날 데모만 하던 친구가 아직도 국회의원 배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차기 총선이야말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며 정계 실력자 뒤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삶이란 다 그런 것인가?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왜 그다지도 서글프게 전개되는 것일까? 손에 든 커피잔이 온기를 잃어간다. 뜨거운 것이 식어가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게 아닌데...왜 이렇게 가을을 타는지 모르겠다. 어느 곳에까지 가을바람이 왔느냐고? 가슴 속 깊숙한 곳에까지 불어든 것 같다. 

상해고적에서 펴낸
유우석 전집 표지
중국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년-842년)은 꽤나 자존심이 강했던 것 같다. 강서성. 오군(吳郡) 출신으로서 한(漢)나라 때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劉勝)의 자손임을 자칭했었지만 기실은 흉노족의 후예로 조상이 북위(北魏) 때 낙양(洛陽))으로 옮겨왔다는 게 정설, 혁신을 주장하던 왕숙문당(王叔文黨)에 가담했다가 805년 9월에 연주(連州 자사(刺史)에 좌천되었다가 10월에 다시 낭주(朗州) 사마(司馬)로 옮겨졌지만 시를 쓸 때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었다. 매해 가을이면 울적해져서 계집아이처럼 온갖 청승을 다 떠는 중년의 이민자와는 달리 아무리 불우한 처지에 처하더라도 의젓하고 굳건한 자세를 견지했었다. 그의 시작(詩作)들이 ‘담백하면서도 오묘한 맛’을 내는 것도 그런 자존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말년에 시를 주고 받으며 교유했다는 백거이(白居易)가 감상(感傷)으로 시를 썼다면 유우석은 절제(節制)로 시를 썼다. ‘추풍인’도 그런 류의 하나다. 가을이 되어 심사가 처량해지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소소 불어 기러기 떼 보내고’라든지 ‘아침에 정원 나무를 흔들어대는데’로 대신하는 절제가 돋보인다. ‘가을바람이 어디까지 왔나?’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외로운 나그네가 제일 먼저 듣는다’라고 남의 말 하듯 자신의 속내를 슬그머니 내비치는 유우석에게 한 수 잘 배웠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The Young Housewife - 평범한 삶 속의 시적 감동


The Young Housewife (젊은 주부) 

At ten AM the young housewife 
오전 10시 젊은 주부가 
moves about in negligee behind 
평상복을 입은 채 얼쩡거린다 
the wooden walls of her husband’s house. 
자기 남편의 집 나무 울타리 뒤편에서. 
I pass solitary in my car. 
나는 내 차를 타고 고독하게 지나간다. 

Then again she comes to the curb 
그 때 그녀가 모퉁이로 와서 
to call the ice-man, fish-man, and stands 
얼음장수와 생선장수를 부른다. 그리고 서서 
shy, uncorseted, tucking in 
수줍어하면서, 코르셋도 입지 않은 채, 
stray ends of hair, and I compare her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to a fallen leaf. 
낙엽과 비교한다. 

The noiseless wheels of my car 
내 차의 소리 없는 바퀴들은 
rush with a crackling sound over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린다 
dried leaves as I bow and pass smiling. 
마른 잎사귀 위로, 내가 고개 숙이고 미소 지으며 지나갈 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 

한 것일수록 중요한 것인 경우가 많다. 흙, 물, 공기 등등도 무한정 공짜이지만 기실 그것들이 없으면 인간은 하루도 생존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특별한 것일수록 가치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사실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지난 2007년 런던대 교육연구소의 나타부드 포우드사비 박사도 영국 내 8천가구를 대상으로 임금 인상이나 친구와 연인과 만나는 시간 등 자질구레한 일상에서부터 실직 등의 크고 작은 삶의 변화가 인생의 행복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 자질구레한 일상도 의외로 큰 금전적 가치와 맞먹는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포우드사비 박사에 따르면 매일 친구와 가족을 보는 것을 값으로 따지면 연봉 8만5천파운드(약 1억5천800만원) 인상에 상응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심각한 질병을 앓는 경우 병에 걸리기 전과 같은 생활의 만족도를 여전히 유지하려면 최소한 연간 48만파운드(약 8억9천100만원)를 필요로 하고, 갑자기 실직하면 실직으로 인한 수입 상실을 제외하고도 14만3천파운드(약 2억6천600만원)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찌 일상의 소중함을 돈으로 따질 수 있으랴. 아침에 일어나 식구들 얼굴을 보는 것과 못 보는 것, 어슬어슬 한기가 감도는 새벽에 일어나 마시는 한 잔의 커피, 비 오는 날 창문 밖에 펼쳐지는 수채화 같은 풍경....어쩌면 삶의 색깔 또한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일상 속 자질구레한 물상(物像)들의 조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러더포드 출신의 윌리엄스를 기념하여 
2012년 미 우정국에서  발행한 우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물상들을 사랑한다. 시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의사 출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도 그랬다. 그는 “시를 쓸 때엔 ‘관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로(No ideas but in things)’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미지즘(imagism) 시운동을 심화시킨 객관주의(Objectivism)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작(詩作) 초기엔 당시 유행하던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활용을 극대화하는 실험시를 썼으나 차츰 자기만의 목소리로 자기 주변 일상의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일상적인 언어로 노래하여 소위 ‘미국의 문화적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5부작 ‘패터슨(Paterson)’을 쓰기도 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에 펴낸 시집 ‘브뤼겔의 그림들과 다른 시들(Pictures from Brueghel and Other Poems)’로 196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윌리엄스는 종전 시작(詩作)의 감초로 여겨지던 상징(象徵)의 남발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투철한 현실인식과 일상의 평면적인 관찰을 기본으로 시를 써서 미국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었다. 

뉴저지 러더포드에서 출생한 윌리엄스는 삶 그 자체를 사랑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을 미덕으로 꼽았다. 뉴욕 호레이스 만 고교(Horace Mann High School) 재학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부모의 권유로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학부에 진학하여 소아과 의사가 됐고, 고향 러더포드에서 소아과 의사로 개업한 후에도 처방전에까지 시를 쓸 정도로 시작에 몰두했다. 그가 1917년에 발표한 ‘The Young Housewife(젊은 주부)’도 그 때 그 시절 쓴 것으로 보인다. ‘Young Housewife’를 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갓 결혼한 새댁, 윌리엄스 활동 당시 남녀가 결혼을 하면 교외의 한가로운 주택가에 집을 마련하고 남편이 출근한 후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게 유한계층의 관례였던 바, 단꿈을 꾸듯 행복하게 살아가는 새댁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삶의 아름다운 단면을 스케치하고 있음을 본다. 젊은 여인의 평상복에서 느껴지는 긴장의 이완, 젊은 여인이 코르셋도 입지 않은 채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 느껴지는 관능미,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런 젊은 주부를 몰래 훔쳐보는 작중 화자(話者)의 야릇한 흥분, 그 흥분을 고조시키기라도 하듯 달리는 차 바퀴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들의 효과음...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그런 시적 감동을 이끌어낸 윌리엄스의 관찰력이 놀랍기만 하다. 

윌리엄스의 이미지즘은 에즈라 파운드와의 교유에서 크게 영향 받았다는 게 중론, 그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물건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들을 조합하는 데 특출함을 보였다. ‘젊은 주부’와 ‘얼음장수’ 또는 ‘생선장수’의 극적인 대비도 일상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포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거니와,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바퀴와 그 바퀴에 깔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들의 청각적 이미지 대비도 돋보인다. 그가 1023년에 발표한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를 보면 원색의 물감으로 그린 선명한 그림 같기도 하다. 다음은 ‘The Red Wheelbarrow’의 전문. 

so much depends      너무 많이 실려있네 
upon                          위에 

a red wheel                빨간 바퀴 
barrow                       손수레 

glazed with rain          빗물에 반짝였네 
water                          물 

beside the white         그 곁의 그 하얀 
chickens.                    병아리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한 작품을 대하는 듯하다. 주변에 널린 자질구레한 것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빨간 바퀴’와 ‘하얀 병아리’의 원색적인 대비로 시적 클라이막스를 고조시키고 있음을 본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의 이미지를 누구나 친근하게 수용할 수 있는 구어체로 재현한 윌리엄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개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흡사 카메라를 들고 도시의 거리를 산보하다가 눈에 띄는 것들을 보고 셔터를 눌러 찍은 사진들처럼. 윌리엄스에게 있어서 시는 장인정신으로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감흥을 읊는 것도 아니었던 바, 평범한 삶의 모양과 색깔과 소리를 담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만들어내는 윌리엄스의 시작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도시 소시민들을 위한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평범한 삶을 사랑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시인이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종남별업(終南別業) - 늙는 법 예습하기


終南別業(종남별업) 

中歲頗好道 (중세파호도)   중년에 자못 도를 좋아하여 
晩家南山陲 (만가남산수)   뒤늦게 남산 언저리에 집을 지었네 
興來美獨往 (흥내미독왕)   흥이 나면 좋아서 혼자 다니는데 
勝事空自知 (승사공자지)   좋은 일은 조용히 나만 안다네 
行到水窮處 (항도수궁처)   걷다가 물 다하는 곳에 이르면 
坐看雲起時 (좌간운기시)   앉아서 구름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네 
偶然値林叟 (우연치림수)   우연히 숲 속 늙은이 만나면 
談笑無還期 (담소무환기)   담소하다가 돌아갈 줄을 모르네 

                                     <왕유(王維); 699년-759년> 

나이 들수록 일자리는커녕 할일을 찾기가 힘들어지면서 고립감과 고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례하여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짜증도 늘어난다는 것은 늘그막에 나랏일 걱정한답시고 오만가지 일에 다 끼어드는 ‘어버이 연합’ 회원들도 부인하지 않으리라. 그들이 활약(?)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정권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직시 직접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장년)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시켰었다. 당시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50~54세는 준고령자, 55세 이상은 고령자라고 지칭해 왔으나 앞으론 ‘고령자’라는 단어를 ‘오래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의미의 ‘장년(長年)’이라고 바꾸기로 했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고령자 취업차별을 없애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으나 그 또한 결국은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 정권이 바뀐 지금 지금 ‘장년’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그 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고령자들이 일자리 찾기가 개선됐다는 후문은 들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이 들어 조금만 힘든 일을 해도 팔다리 허리가 쑤시고 두 눈이 침침해지는 사람들이 “젊은이 못지않게 일 잘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우습지만, 그런 고령자들의 욕심을 부추겨서라도 정권이나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를 높여보겠다고 침 튀기는 사람들이 더 한심하다. 고령자 위하는 척 하면서 희롱하는 것 같아 눈이 절로 흘겨진다. 

나이는 저절로 먹는 것이지만 늙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세기 인간의 노화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영국 리버풀 대학의 노인심리학자 D. B. 브롬리(D. B. Bromley)는 그의 저서 ‘노화심리학(The Psychology of Human Ageing)’에서 “인생의 1/4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3/4은 늙으면서 보낸다”고 말했었다. 생물학적으로 청소년기를 지나면 성장이 멈추고 퇴화하기 시작하므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잘 대비해야 한다는 매우 간단한(?) 충고였었다. 그러나 그게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브롬리가 생전에 발표한 어려운 논문들과 저서들이 더 잘 말해준다. 자신이 늙어간다고 느낄 때마다 스스로 풀어야할 문제들이 수두룩하거니와 그 문제들을 서둘러 풀지 않으면 세상 원망만 는다는 게 늙은이들의 뼈아픈 경험담이고 보면,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늙는 법을 잘 배워서 쪼그라드는 몸과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져주는 게 상책일 듯싶다. 

왕유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복생수경도(伏生授經圖).
복생(伏生)은 전한 시대 제남(濟南) 출신의 명유(名儒) 
늙어가면서 몸 고생 마음고생 덜 하려면 욕심부터 줄여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젊었을 적 불만족(不滿足)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면 늙어갈수록 만족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른 바 ‘순응(順應)’을 학습해야 한다. 한자 좇을 순(順)은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그린 내 천(川)에 머리 혈(頁)이 붙은 것으로서, 자연의 섭리의 상징인 물의 흐름에 나의 생각을 맡긴다는 의미,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 왕유(王維; 699년-759년)가 자연 속에 파묻혀 산수를 벗 삼았던 것도 순응을 학습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었던 왕유는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자(字)까지 ‘마힐(摩詰)’이라고 했으나,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반란군의 포로가 돼 부역을 했다가 나중에 그것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속세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중국 도교와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종남산(終南山) 언저리 망천(輞川)에 별업(別業) 망천장(輞川莊)을 짓고 시와 그림을 즐겼었다. 그 때 그렸다는 화집 ‘망천도(輞川圖)’는 진본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모사도와 함께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돼왔거니와, 북송의 문장가 소식(蘇軾)은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 “시 중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평하기도 했고, 지금도 왕유는 문인화의 원조격인 남송화(南宋畵)의 시조(始祖)로서 추앙을 받는다. 

‘종남별업(終南別業)’은 왕유가 망천장에 은거할 때 지은 작품, 많은 시인들이 경쟁적(?)으로 노래했던 자연귀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색다른 맛이 느껴진다. ‘종남산의 별장’을 뜻하는 제목 ‘종남별업’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왜 ‘별장’이나 ‘초가’ 또는 ‘모옥(茅屋)’ 등등 대신 ‘별업’이라는 단어를 골랐나? 별업의 업(業)은 그 옛날 종이나 북 등의 악기를 거는 틀의 가로 판자를 본뜬 것으로서, 거기에 뭔가 기록해두었기에 ‘일’ ‘문서’ ‘직업’ 따위를 뜻하게 됐던 바, ‘별업’은 생계를 위해 꾸려나가는 주업(主業) 말고 별도로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장안에서의 관리 생활이 주업이라면 산수를 즐기면서 삶을 다시 생각해보는 종남산에서의 사색이야말로 별업, 속세를 떠난 사람의 일과라는 의미다. 평균수명이 60을 넘지 않던 그 시절 중세(中歲)는 30세 언저리, 인생의 반환점을 막 돌면서 도(道)를 좋아했다는 고백은 속세에서 살만큼 살아 염증을 느끼게 됐다는 실토로 받아들여지고, 물길을 따라 걷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림수(林叟)’ 즉 ‘숲 속의 늙은이’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내다본 것으로 보인다. 자연에 귀의하여 늙음을 순치하는 왕유의 만년이 아름답다. 한국의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물론 나이 먹을수록 세상에 대한 원망만 키우는 늙은이들이 외우고 또 외우면 보약이 될 것 같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님의 침묵(沈黙) - 속세를 사랑한 휴머니스트의 '님'


님의 침묵(沈黙)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926년 ‘님의 침묵’ 회동서관, 한용운(韓龍雲); 1879년-1844년> 

어사전은 ‘침묵(沈黙)’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음. 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라고 풀이하여 명사취급하고 있으나 한자 어법으로 보면 옳지 않다. 한자 침(沈)은 물 수(水)에 ‘아래로 늘어뜨리다’라는 의미의 ‘유(冘)’가 붙은 것으로서 ‘빠지다’ ‘가라앉다’ ‘잠기다’ 등을 뜻하는 동사(動詞)이고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의 검을 흑(黑)에 개 견(犬)이 붙은 묵(黙)은 ‘개가 짖지 않는다’ 즉 ‘아무 소리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沈黙’은 ‘黙(묵)’에 빠지거나 잠기는 것을 말한다. 그게 일제시대 일본식 조어법의 영향으로 명사화한 것인 바, 실제로 중국에서는 ‘침묵(沈黙)’ 대신 ‘정묵(靜黙)’이라는 명사를 더 많이 사용한다. ‘그는 침묵했다’는 ‘沈’을 동사로 ‘他沉默了’라 쓰고 그걸 명사로 표현할 때는 ‘그의 침묵(정묵)’은 ‘他的静默’이라고 쓴다. 

1937년경의 만해 한용운
만해(卍海 또는 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년-1844년)이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沈黙)’을 쓸 때도 일본식 조어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이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했다고 알려진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첫머리 “공약삼장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와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의 ‘의’가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조사로 사용되었듯이, ‘님의 침묵’의 ‘의’ 또한 주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거니와, 침묵(沈黙)이 일본식 한자조어법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님의 침묵’은 ‘님이 아무 말 안 한다’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싶다. 

1926년 회동서관 간행한 한용운의 첫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 ‘님의 침묵’처럼 괴리적(乖離的) 감상이 많은 시도 드물다. 한용운이 승려신분이었을 적 발표한 시여서 그런지 직감적으로 ‘님’을 석가모니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을 들어 ‘잃어버린 나라’로 해석하기도 하고, ‘님’이라는 말이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여 왔다는 점을 들어 단순히 ‘사랑하는 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기실 그런 중의성(重義性)은 한용운 자신이 시집 ‘님의 침묵’ 서문 격인 ‘군말’로 부추긴 바 크다. 그 ‘군말’에서 한용운은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조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시집 ‘님의 침묵’ 서문 원문)”면서 자신이 의도했던 ‘님’이 특정한 ‘님’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용운이 독자들에게 제멋대로 ‘님’을 상정(想定)하는 자유를 줬다고 여기는 건 큰 오류다.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정의하면서도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고 단정한 이유가 뭔가? 또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고 덧붙인 이유가 뭔가? 한용운이 생각하는 ‘님’은 ‘그림자’ 즉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림자처럼 인식은 되지만 정작 실체는 없는 ‘그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그런 ‘그리움’ 또한 ‘알뜰한 구속(拘束)’으로 다가오기에, 그럴 바에야 한용운 자신은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나 그리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바, ‘님의 침묵’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허무 속에서 인간에의 연민(憐憫) 즉 인간애(人間愛)를 품고자 쓴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싶다. 그것마저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여서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라고 끝을 맺었고 그 애탐과 허무감 또한 공(空)이어서 제목을 ‘님의 침묵’이라고 붙인 게 아닌지?! 

기실 한용운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경지를 터득하기 위해 불도를 닦는 승려가 아니라 인간과 속세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휴머니스트였던 것 같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네 살의 나이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오십대에 환속한 후 다시 재혼해 딸 하나를 더 얻은 것도 그렇고, 세속과 거리를 둬야할 불제자가 독립운동을 하고 시를 쓴 것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부질없는 일탈(逸脫)에 지나지 않거니와, 속세의 고뇌를 떨쳐버리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걸 기꺼이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휴머니스트였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그런 그를 추켜세운답시고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교육가 등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야말로 ‘님의 침묵’의 ‘님’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쓴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피할 수 없는 고독과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불경을 외우기도 하고, 시를 쓰다가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하고, 속세를 사랑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만해 한용운, 그야말로 당대의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는 칭찬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

A Rainbow - 위선(僞善) 속에서 경건(敬虔) 찾기


A Rainbow (무지개)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은 뛰노라 
A rainbow in the sky:                                하늘의 무지개를 품으면: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나 어렸을 때도 그랬고;
So is it now I am a man;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고;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늙었을 때도 그러하리라, 
Or let me die!                                           아니면 차라리 죽게 하소서!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And I wish my days to be                          바라건대 나의 나날들이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타고난 경건(敬虔)으로 서로 서로 얽매이기를.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설(逆說, paradox)은 언뜻 보면 일리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 덩어리인 것 또는 주장을 말한다. 영어 ‘paradox’의 뿌리는 ‘반(反)’이나 ‘역(逆)’을 뜻하는 접두사 ‘para’와 ‘의견’을 뜻하는 ‘dox’가 붙은 고대 그리스어 ‘paradoxos’로서 반대의견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한자 ‘역(逆)’은 쉬엄쉬엄 갈 착(辶) 위에 큰 대(大)를 뒤집어 ‘거스르다’라는 의미를 표현한 ‘屰(역)’을 얹어놓은 것으로서 ‘주류의 상식을 배반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들이 긴 세월 동안 축적되어 나타난 사회의 가치판단이나 사회적 주류의 상식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인간의 역사라는 게 승자의 기록에 지나지 않듯이 사회적 주류의 상식이라는 것 또한 ‘다수의 우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런 허점을 해부하여 진실에 접근하는 것, 많은 시인들이 다수의 관점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통찰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드는 인간이 ‘착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역설 중의 역설, 아니 인간 세상 그 자체가 역설의 바퀴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역설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남의 것을 훔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게 장삼이사의 그렇고 그런 삶이라는 건 시장통 사람들도 다 안다. 그런 장삼이사들 또한 가끔은 “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손님들을 속여먹는 장사꾼들일수록 교회에 더 열심히 다니고, 거짓말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진실한 사람을 좋아하고, 도둑놈들일수록 친구들에게는 술을 잘 산다. 그걸 ‘양심의 균형(均衡) 잡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본성은 본래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믿는다면, 가끔은 착한 척이라도 해야 행복감을 더 느끼게 된다는 데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윌리엄 워즈워드 전기, 스테픈 질
2011년,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19세기 전반 낭만파의 대표 시인으로서 영국 왕실로부터 ‘계관시인(poet laureate)’ 칭호를 받았던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1850)의 '무지개(A Rainbow)를 읽을 때도 머릿속에 역설이 떠올려진다. ‘순수’가 어쩌고 ‘경건’이 어쩌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이야말로 혀로 수박의 겉을 핥는다는 핀잔을 받아 마땅하다. 무지개는 대기 중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들에 햇빛이 굴절 반사되어 해의 반대쪽에 길게 뻗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색깔의 반원 모양의 ‘헛것’에 지나지 않는 바, 그 ‘헛것’을 가슴에 품는다(behold)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 아닌가?! 어렸을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다고? 그 또한 거짓말! 어렸을 때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희망사항’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설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들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확실한 역설로 쐐기를 박아놓은 워즈워드의 배려를 미안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할진저! 

‘타고난 경건(natural piety)’에 이르면 이 작품에서의 역설은 클라이막스에 달한다. 영어 ‘nature’의 뿌리는 라틴어 ‘natura’이고 ‘natura’는 ‘태어나다’라는 의미의 ‘nasci’에서 나왔던 바, ‘natural’은 ‘원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의미다. 또 ‘piety’의 뿌리는 라틴어 ‘pietas’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의무’ ‘효성’ ‘경건’ 따위를 의미했던 바, 그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의무’ 또는 ‘경건’을 타고났던 예수의 사체(死體)를 표현한 일체의 예술작품을 ‘피에타(Pieta)’라고도 하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신의 아들 이야기이고, 욕망덩어리를 끌어안고 태어난 인간의 ‘natural piety’는 ‘위선(僞善)’일수도 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piety’의 형용사형 ‘pious’는 ‘종교를 빙자한’ ‘위선적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거니와 ‘pious hope’는 “비현실적이어서 이뤄질 것 같지 않은 희망”을 말한다. 

워즈워드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종교개혁, 데카르트와 루소로부터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자였다는 점 또한 이 작품 속의 ‘역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낭만주의(Romanticism)’는 기이(奇異)·가공·경이 등을 뜻하는 라틴어 ‘romanice’에서 나온 것으로서, 문학용어로서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F. 슐레겔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량하나 문명에 의해 타락한다는 근본이념 아래 이성보다 정서를 신뢰하여 영혼의 내적 추구와 폭로 및 위선에 대한 증오를 주로 다뤘다는 점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이른바 원시성·유아 찬미, 고대와 중세에 대한 동경 외에 이국취미·지방색·이상취향(異常趣向)·반사회·초월주의·밤[夜(야)]·박명(薄明)·죽음·꿈·환상·폐허 취미·악마성·무의식·유동성 등을 특징으로 했던 바, 15살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 맡겨져 갖은 멸시와 고독을 친구 삼으면서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기의 급진사상에 물들기도 했던 워즈워드의 ‘무지개’ 또한 그런 낭만주의적 사고의 결실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무지개’ 등의 자연 현상으로 풀어낸 점이 워즈워드의 특장점이긴 하지만. 

‘무지개’를 감상할 때마다 지저분하고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삶을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게 포장했다는 칭찬이 절로 나온다. 워즈워드야말로 욕망덩어리를 끌어안고 태어나 이따금은 착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장삼이사들의 인간성(그게 ‘natural piety’인지 모르겠지만)을 사랑하고 연민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이었던 것 같다.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飮酒(음주) 제5수-실패한 인생의 자기 최면



飮酒(음주) 제5수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사람들 틈에 오두막 짓고 살아도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시끄러운 마차 소리 들리지 않네 

問君何能爾 (문군하능이)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만 
心遠地自偏 (심원지자편)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외지게 된다네 

採菊東籬下 (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

山氣日夕佳 (산기일석가) 산 기색은 저녁 무렵이 아름답고 
飛鳥相與還 (비조상여환) 새들은 서로 함께 날아 돌아오네 

此中有眞意 (차중유진의) 이 중에 참뜻이 있어 
欲辯已忘言 (욕변이망언) 설명해주고 싶지만 이미 말을 잊었다네 

                                       <도연명 (陶淵明); 365년-427년>


히 ‘자연(自然)’ 하면 인공과 동떨어진 숲이나 냇물 따위의 산수(山水)를 머릿속에 떠올리지만 천만의 말씀, 한자문화권의 ‘자연’은 영어문화권의 ‘nature’하고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自然’의 그럴 연(然)은 고기 육(肉)과 개 견(犬)과 불 화(火)가 합쳐진 것으로서,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먹을 게 드물 던 그 옛날 개를 잡아먹을 때는 개고기를 불에 그슬려야 했듯이, ‘然’은 일이 돌아가는 이치나 가만 내버려둬도 스스로 돌아가는 꼴을 의미한다. 실제로 중국어 사전에서 ‘自然’을 찾아보면 명사로는 ‘自然界, 형용사로는 ‘꾸밈이 없이 자연스럽다’, 부사로는 ‘자행(自行)’과 동의어로 ‘스스로’ ‘저절로’라고 풀이돼 있을 뿐 숲이나 바위나 강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자연은 자연계가 돌아가는 이치나 모습,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4대강 정비한답시고 강바닥을 파헤친 것도 ‘스스로 그러한 꼴로 되어가는’ 자연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람이 강바닥을 파헤쳐 놓아봤자 홍수에 떠밀려온 산비탈의 사토로 다시 채워질 건 자명한 이치, 또 그걸 퍼내 아파트 지어봤자 언젠가는 허물어져 다시 흙이나 모래로 변하리라는 것 또한 두말 하면 잔소리....그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연’이 아닌가?! 반면 영어 ‘nature’의 뿌리는 라틴어 ‘natura’이고 ‘natura’는 ‘태어나다’라는 의미의 ‘nasci’에서 나왔던 바, 원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 즉 신이 창조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도연명 초상
까놓고 말하자면 자랑할 명예도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할 돈도 없는 사람들일수록 자연(산수)을 찾는다. 그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 산과 강에 널려 있는 풀이나 물은 주인이 없어 돈이나 권세 없이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까. 그 옛날 벼슬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낙향하여 천석고황(泉石膏肓)이 어쩌고 단표누항(簞瓢陋巷)이 저쩌고 청승을 떨었던 것도 그게 돈도 안 들고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데 누가 감히 토 를 달으랴.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에이 더러워서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고 때려치우고 자연 즉 ‘스스로 돌아가는 이치나 꼴’에 자신을 던져버렸던 도잠(陶潛); 365년-427년)도 그랬다. 연명(淵明)이라는 자가 더 많이 알려져 도연명으로 불리는 그가 41세 때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할 때 “그 까짓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다지만 그건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커 보이거니와, 기실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그가 서진의 명장이었던 증조부 도간이나 명사로 이름을 날렸던 외조부 맹가처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더라도 세상을 향해 가래침을 내뱉었겠느냐는 말이다. 

나름대로 분수껏 열심히 사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도연명은 실패한 인생 즉 경쟁에서의 패배자였다. 남들은 어려서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할 때 겨우 29세가 되어서야 벼슬길에 올랐고 그나마 주(州)의 좨주(祭酒), 주부(主簿), 진군의 참군(參軍) 등 말단을 전전하다가 겨우 팽택현령 자리를 얻었으나 80여일 만에 사표를 낸 게 13년에 걸친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아무개처럼 중앙의 고관대작이 돼보기는커녕 녹봉이 쌀 다섯 말밖에 되지 않는 향리의 현령 자리를 꿰차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을 터, 사표를 내던지는 게 쥐뿔도 없이 자존심만 강했던 시인의 ‘자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를 잘못 만나서, 세상이 잘 못 돌아가고 있기에, 자신과 같이 올곧은 천재는 산수에 파묻혀 지낼 수밖에 없다는 자기 최면이 유일한 낙이었으리라. 

도연명이 술 마시면서 쓴 시를 모아놓은 ‘음주(飮酒)’ 20수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도 그런 자기 최면을 풀어쓴 것으로 보인다.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외지게 되므로 벼슬아치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는다? 보기 싫은 게 눈 앞에 있으면 눈 질끈 감고 도리질 해대는 초등학생들도 배시시 웃을 유치한 얼렁뚱땅이 아닌가? 도연명 자신도 그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자기최면을 자랑스레 여겼던 것 같지는 않다. 할 일이 없어 국화꽃이나 따다가 멀리 남산이나 바라보는 자신의 진의(眞意)를 이러쿵저러쿵 변호해봤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부끄러울 뿐이어서 ‘이미 말을 잊었다(已忘言)’고 말꼬리를 흐렸던 건 아닌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쑥스럽고 부끄러운 자기최면 덕분에 역사에 기리 남는 대시인이 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도연명은 향리에 은거한 이후 더 큰 고뇌를 곱씹어야 했다. 50세 때 은사(隱士)에게 명목으로만 주어지는 벼슬인 저작좌랑(著作佐郞)을 제수 받았고 주로 심양 근처에서 지내면서 시작(詩作)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먹고살기 위해 허구한 날 땅이나 파야하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427년 향년 62세로 생을 마감했었다. 그가 ‘도화원기(桃花源記)’ 등을 지으면서 유달리 이상향을 그리워했던 것도 현재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지금도 벼슬자리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먹일 때마다 패배자들이 도연명의 자기 최면을 흉내 내는 것 같아 쓴웃음을 금할 수 없지만, 삶의 단맛보다는 쓴맛이 더 깊고 오묘하기에 문학의 주요 소재가 됐기에, 인생의 패배자 도연명이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오른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하겠다. 그게 산수가 아닌 세상의 ‘자연’이 아닌지?!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초혼(招魂) - 한국인의 페티시즘(fetishism)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1925년 ‘진달래꽃’, 김소월(金素月); 1902년-1934년> 

간의 생명은 정(精)-기(氣)-신(神)의 결합, 즉 육신(肉身)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靈)의 생명력인 신(神)이 기(氣)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는 게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의 운행이 정지되어 정(精)과 신(神)이 분리되는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더라도 정(精)은 백(魄, 얼)이 되어 땅으로 흩어지고 신(神)은 혼(魂, 넉)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시된 건 혼(魂)이었다. 정이나 기는 썩어서 없어지는 육신과 함께 흩어지고 말지만 하늘로 간 불멸(不滅)의 혼은 언제고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다. 

혼(魂)은 불멸이므로 이론적(?)으로는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그래서 영혼불멸을 믿는 불교에서도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사불이(生死不二)’로 윤회를 설명했는가 하면 ‘차시환혼(借屍還魂)’ 따위의 믿거나말거나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춘추시대 손무(孫武)도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차시환혼’ 이야기를 차용하여 “쓸모 있는 것(사람)은 빌리기 어렵고 쓸모없는 것은 빌릴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빌려 써먹는다. 내가 아둔한 껍데기(쓸모없는 것)를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아둔한 껍데기가 나를 가리도록 한다(有用者 不可借 不能用者 求借 借不能用者而用之 匪我求童蒙 童蒙求我)”는 계책을 36계(計) 중 제14계로 꼽았고, 민간에서도 태상노군(太上老君; 도교에서 노자(老子)를 높여 부르는 이름)을 추종하던 이현(李玄)이라는 사람이 선계의 태상노군을 만나기 위해 잠시 육신을 이탈했으나 자신의 혼이 돌아올 때까지 육신을 보살피기로 했던 제자가 우여곡절 끝에 이현의 육신을 화장하는 바람에 쇠 지팡이[鐵拐]를 짚고 다니다 죽은 거지의 시신(屍身)으로 들어가 ‘철괴리(鐵拐李)’로 살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승된다. 

그런데 어떻게 혼을 불러들이나? 영혼불멸사상의 뿌리를 원시사회의 정령숭배(精靈崇拜)에 서 찾는 사람들은 그 혼을 불러들이는 환혼(還魂) 또는 초혼(招魂)의 관습 또한 원시사회의 ‘페티시즘(fetishism, 주물숭배)’에서 찾는다. 호랑이 이빨을 목걸이나 팔찌로 만들어 착용하면 호랑이의 용맹한 영혼이 깃든다느니 사자(死者)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입었던 옷에는 사자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등등의 믿음을 뜻하는 단어 ‘fetishism’ 뿌리는 ‘억지로 꾸민’ ‘진짜가 아닌’을 뜻하는 라틴어 ‘facticius’,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인 것처럼 속인다’는 행간이 읽혀지는 바, S. 프로이트는 여성의 팬티나 신발 따위에서 성욕을 느끼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페티시즘’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었다. 한반도 등지서 초혼의 한 방법으로 전승된 ‘고복(皐復)’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페티시즘’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지붕 위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사자(死者)의 체취가 남아 있는 헌 옷이나 속곳을 흔들면서 사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른 후에도 환생하지 않으면 혼이 멀리 떠나 가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장례 절차를 개시한다. 

소월 김정식
김소월(金素月; 1902년-1934년)의 시집 <진달래꽃>(1925)에 실린 시 ‘초혼(招魂)’이 ‘고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게 고복을 매개로 하여 한국인들의 머릿속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페티시즘을 일깨우는 작품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사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과 처절한 슬픔이 페티시즘의 도움으로 극대화됐다는 말이다. ‘이름’이야말로 사자의 혼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러들이는 ‘페티시(fetish)’, 그 ‘페티시’가 산산이 부서져 허공중에 흩어져 버림으로써 주인도 들을 수 없다는 암시에서 느껴지는 절망감,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를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 그래서 선 채로 돌이 될 때까지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화자(話者)의 슬픔에서 ‘페티시즘’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야말로 페티시즘의 극치인 바, 김소월이 ‘가장 한국적인 시인’으로 꼽히는 것도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은 페티시즘을 가장 잘 포착해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김소월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진달래꽃’ 또한 한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한국인들과 친숙했었던 까닭에 한국인들의 정한(情恨)이 짙게 배인 ‘페티시’ 중의 하나라는 데 토를 달지 못한다. 김소월의 명시 대부분이 한국인들의 페티시즘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가 교훈보다는 감동과 쾌락을 위해 창작된다는 점에 주목했던 T. S. 엘리어트는 ‘시(詩)는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等價物)’이라고 주장했었다. 사상이든 정서든 시인이 속한 사회의 산물이고 보면 시라는 것 또한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꾸며지는 것’(좋은 말로는 ‘창작’이라고 함)임을 부인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페티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떤 민족의 정서(情緖)와 페티시즘의 뿌리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 창작의 한 기둥을 이루는 비유와 상징 또한 전통과 관습 속에서 형성된 페티시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의 성패는 페티시즘을 얼마나 자극하여 독자들의 정서를 흔들어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김소월의 ‘초혼’을 읽어보고 또 읽어볼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The Applicant - ‘살아있는 인형’의 푸념


The Applicant (지원자) 

First, are you our sort of a person? 
먼저, 당신은 우리와 같은 부류인가요? 
Do you wear 
당신은 걸치고 있나요 
A glass eye, false teeth or a crutch, 
유리눈깔, 가짜 이빨 또는 사타구니 
A brace or a hook, 
멜빵 또는 훅 
Rubber breasts or a rubber crotch, 
고무 유방 또는 고무 샅 

Stitches to show something's missing? No, no? Then 
뭔가 잃어버렸다는 걸 보여주는 꿰맨 자국들? 아니라고, 아니라고요? 그럼 
How can we give you a thing? 
우리가 당신에게 물건을 어떻게 주나요? 
Stop crying. 
울지 말아요 
Open your hand. 
손 벌리세요 
Empty? Empty. Here is a hand 
비었어요? 비었네요. 여기 손이 있어요 

To fill it and willing 
그걸 채워주고 그리고 기꺼이 
To bring teacups and roll away headaches 
찻잔들을 날라주고 그리고 두통들을 몰아내주고 
And do whatever you tell it. 
그리고 뭐든지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하지요 
Will you marry it? 
당신은 그것과 결혼하겠어요? 
It is guaranteed 
품질은 보증하지요 

To thumb shut your eyes at the end 
마지막에 가서는 엄지로 당신의 두 눈을 감겨주고 
And dissolve of sorrow. 
그리고 슬픔도 녹여주죠 
We make new stock from the salt. 
우린 소금으로 새로운 상품도 만들죠 
I notice you are stark naked. 
이제 보니 당신은 완전히 알몸이네요 
How about this suit---- 
이 옷은 어때요---- 

Black and stiff, but not a bad fit. 
검고 뻣뻣하지요, 그러나 아주 안 맞는 건 아니에요 
Will you marry it? 
당신은 그것과 결혼하겠어요? 
It is waterproof, shatterproof, proof 
그건 방수도 되고, 깨지지도 않고, 
Against fire and bombs through the roof. 
방화기능도 있고 그리고 지붕 뚫고 떨어지는 폭탄들도 막아주죠 
Believe me, they'll bury you in it. 
제 말을 믿으세요, 그 옷들이 당신을 푹 파묻어줄 거예요 

Now your head, excuse me, is empty. 
이제 당신의 머리는, 매우 실례의 말씀이지만, 텅 비었어요 
I have the ticket for that. 
그걸 대비해 티켓을 준비해뒀죠 
Come here, sweetie, out of the closet. 
이리 오세요, 여보, 벽장 밖으로 나오세요 
Well, what do you think of that? 
헌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Naked as paper to start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처럼 발가벗었네요 

But in twenty-five years she'll be silver, 
그러나 25년이면 그녀는 은이 될 거에요 
In fifty, gold. 
50년이면, 황금, 
A living doll, everywhere you look. 
살아 있는 인형, 어느 모로 보나 
It can sew, it can cook, 
바느질할 수 있고, 요리할 수 있고, 
It can talk, talk, talk. 
말할 수 있고, 말하고, 말하지요 

It works, there is nothing wrong with it. 
그건 작동하지요, 아무런 이상한 게 없어요 
You have a hole, it's a poultice. 
구멍이 있지요, 그것은 습포로 붙인 거예요. 
You have an eye, it's an image. 
눈이 있지요, 그것은 그냥 환상이지요. 
My boy, it's your last resort. 
이거 봐요, 그것은 당신의 마지막 쉼터예요 
Will you marry it, marry it, marry it. 
그것과 결혼하겠냐구요, 결혼하세요, 결혼하세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1963년> 

부장적 사회에서는 여자의 기능(?)을 높이 평가했었다. 한자 여자 여(女)도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라는 게 정설, 섹스와 종족의 번성을 위해 남자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어미 모(母)도 아이에게 물리기 위한 젖꼭지를 강조해 만들어졌다. 영어 ‘woman’의 뿌리도 ‘아내’ ‘여성’을 뜻하는 ‘wif’와 ‘인간’을 뜻하는 ‘man’이 결합한 고대영어 ‘wifman’으로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돼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계사회에서 태동한 종교인 기독교의 창조주 여호와 또한 천지를 창조할 당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남자들의 성욕을 해소시켜주고, 그 결과 출산을 하여 가문의 노동력을 증대시켜주는 한편, 밥 짓는 일이나 빨래 등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남자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게 여자들의 미덕이었던 것이다. 그 옛날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스스럼없이 용인됐던 것도 여자를 기능적으로만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근대 시민극 및 현대 현실주의 연극의 토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여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이자 시인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이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한 것은 1879년, 세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이자 변호사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내인 노라는 남편 토르발트 헬메르의 병원비를 빌리기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한 게 발단이 되어 남편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급기야는 남편의 자기중심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에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온다. 이후 노라는 ‘페미니즘의 원조’로 대접받지만 이후 집을 뛰쳐나온 수많은 노라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보고서나 증언은 없다.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입센의 상상력 속에서 가출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형의 집’은 발표 당시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무대에 올려보지도 못했다. 

실비아 플라스 전기, 2004년,
그린우드 출판사
20세기 들어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여권신장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있었지만 집을 뛰쳐나온 노라들이 안주할 곳을 찾기란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 남자들의 머릿속에서 여성의 기능을 중시하는 부계사회의 전통을 일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목표했던 여권신장은 언제나 도로아미타불, 지금도 많은 가정주부들이 여성의 ‘기능’ 속에 함몰돼버린 자아와 인격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본다. 20세기 중반 미국 문단에서 일군의 여성 시인들이 페미니즘의 조명탄을 펑펑 터뜨린 것도 그런 조명탄 아래서나마 여성의 자아와 인격을 확인해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 때 뿐, 조명탄이 꺼지고 나면 다시 캄캄한 밤, 스미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던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1963년)도 그 캄캄한 밤중에 홀로 헤맸었다. 케임브리지 재학 중에 만난 영국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아 오순도순 살던 중 바람둥이 휴즈와의 별거로 벼랑 끝에 서게 됐고, 그 벼랑 끝에서 여자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차별과 불안과 고독을 곱씹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런던의 한 아파트 부엌에서 가스 오븐 속에 머리를 처박아 자살하고 만다. 플라스의 문우였던 앤 섹스턴(Anne Sexton)도 그랬다. 1966년 시선집 ‘살거나 죽거나(Live or Die)’로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나 플라스와 마찬가지로 캄캄하고 우울한 밤을 헤매다가 46세가 되던 해인 1974년 차고 속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심으로써 목숨을 끊었다. 여자의 ‘기능’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자아와 인격을 찾는 여자들이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가출해봤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재차 일깨워준 것이었다. 

‘지원자(The Applicant)’는 플라스가 자살한 후 3년 뒤인 1966년에 빛을 본 작품, 여기서의 ‘지원자’는 여성의 기능만을 중시하여 결혼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꼼, 그걸 찬찬히 음미해보면 그 시대 페미니스트들이 여자의 기능만을 중시하는 세상을 얼마나 원망하고 혐오했는지 한 눈에 드러난다. 남자들이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을 꼬집어 ‘고무유방 또는 고무 샅(Rubber breasts or a rubber crotch)’을 들이대고, 그런 남자들과 결혼하려는 여자들을 ‘살아있는 인형(A living doll)’에 비유하는가 하면, 여자들의 기능만을 중시하는 남자들에게 ‘살아있는 인형’과 결혼하겠느냐고 다그친다.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를 무생물인 ‘그것(it)’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기능’만으로 여자를 평가하려는 세상에 대한 조롱의 극치, ‘품질 보증(It is guaranteed)’이라는 말 속의 자학과 분노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세상에서 여자가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 받기는 글렀다는 게 플라스의 우울하고도 처절한 관찰이었던 것 같다. 

플라스는 섹스턴 등과 함께 미국 시단에서 ‘자기 고백 시인(confessional poets)’으로 불린다. 아직도 플라스의 시들이 자주 읽히는 건 이 세상이 여자들의 자아와 인격보다는 기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리라. 그러나 ‘기능’으로 ‘인격’을 덮어버리는 현상이 비단 여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 겸 위로의 말을 덧붙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왜? 많은 남편들 또한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지 오래되었거니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불행이나 개개인의 성격의 차이까지도 싸잡아 여성차별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이고, 남자 여자 구별은 선택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므로 아무리 사회적 평등성을 강조해봤자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그래서, 플라스의 시들을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 것도 반대한다. 이제는 식상한 페미니즘보다는 자기고백 시 특유의 적나라한 표현과 전통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과 여성 시인으로서의 섬세함에 더 주목해야 플라스 작품의 진미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플라스이니까, 그런 여자시인이니까, ‘고무 유방(Rubber breasts)’이나 ‘고무 샅(Rubber crotch)’ 등을 과감하게 시어로 사용한 게 아닌가?! 어쨌거나 플라스는 미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성공한 시인, “여성 시인이 여성을 ‘기능’에서 해방시켜 자아와 인격을 찾고자 하는 시를 쓰다가 새로운 형태의 시를 만들어냈다”는 문학사적 평가가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시를 쓰는 사람과 그 시를 읽는 사람은 따로따로라는 것을 재차 실감한다.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망악(望岳) -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望岳(망악) 

岱宗夫如何(대종부여하)    태산은 과연 어떠한가 
齊魯靑未了(제노청미료)    제나라와 초나라에 걸친 푸름이 끝나지 아니 하였네 
造化鐘神秀(조화종신수)    만들어져 변한 건 조물주의 빼어난 솜씨이거니와 
陰陽割昏曉(음양할혼효)    음과 양이 어둠과 밝음을 가르는구나 
荡胸生層雲(탕흉생층운)    가슴을 활짝 펴니 층계구름 생겨나고 
決眦入歸鳥(결제입귀조)    눈 크게 뜨니 귀환하는 새들이 들어오는구나 
會當凌絶頂(회당능절정)    언젠가는 꼭 정상에 올라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뭇 산이 작음을 한눈에 굽어보리라 

                                        <두보(杜甫; 712년-770년> 

마 전 명예 퇴직한 서울의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을 때 “대한민국의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봤다”고 했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는 게 답답하여 운동 겸 뒷동산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기도 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올망졸망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노라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아서, 등산클럽에 가입하고는 졸래졸래 따라 다니다보니 웬만한 산은 다 올라가보게 됐다는 것이었다.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해 숱한 월급쟁이들이 직장에서 등 떠밀려 쫓겨났을 때 관악산 입구에 신사복 입고 등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등산로 입구에 싸구려 운동화를 파는 가게까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생각 나 쓴웃음이 머금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출근하는 척 신사복을 입고 나와 거리를 방황하다가 터덜터덜 관악산에 오르는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리라. 자식 등록금 걱정, 먹고 살 걱정, 노후 걱정...돈 안 들이고 시간 때우기 위해 배낭 대신 걱정보따리를 짊어지고 관악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노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뜬 구름처럼 오락가락...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 꽉 막힌 실업자의 가슴이 조금이라도 뚫린다면 태산인들 오르지 않았겠는가?! 

중국 대륙 동쪽에 위치한 해발 1,545m의 태산(泰山)은 보통명사인 ‘큰산[泰山]’을 고유명사로 만들어 버릴 만큼 크다. 춘추전국시대 장자(莊子)는 소요유(逍遙遊)에서 전설의 큰 새 붕(鵬)의 크기를 과장하기 위해 등이 ‘태산과 같다(背若太山)’고 했으나 그 때의 태(太)는 단지 ‘크다’는 의미일 뿐이고 태산(泰山)의 태(泰)는 ‘크고 넉넉하다’라는 의미인 바, ‘泰山’은 산이 커서 모든 것을 다 품어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 태산은 중국인들이 가장 숭상했던 방위인 동(東)에 위치하여 서악(西岳)인 섬서성의 화산(華山), 남악(南岳)인 호남성의 형산(衡山), 북악(北岳)인 산서성의 항산(桓山), 그리고 중악(中岳)인 하남성의 숭산(崇山)을 거느리는 오악지장(五岳之長) 또는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고도 불렸다. 맹자(孟子)는 진심장(盡心章) 상편(上篇)에서 “공자께서는 동산에 올라 보고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보고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고 말하면서 “도달하는 경지가 높고 크면 클수록 그 아래의 것들은 작은 것으로 눈에 비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두보의 초상
39세가 되어서야 겨우 미관말직을 얻어 입에 풀칠이나 하던 중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터져 실업자가 된 채 이리저리 표랑했던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년-770년) 또한 20세기 서울서 살았다면 신사복 입고 관악산에 올랐었을 것 같다. ‘망악(望岳)’ ‘등악양루(登岳陽樓)’, 등고(登高) 등 높은 산을 바라보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지은 시가 유난히 많다. 그래도 뭔가 희망을 품을 수 있던 젊었을 때는 높은 산을 바라보며 더 나은 삶을 꿈꿨고 이런 저런 가망성이 다 없어진 뒤부터는 세상 내려다보면서 불우한 자신을 한탄했었다. 그 중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망악’을 보면 입신양명을 꿈꾸는 젊은 백수건달 두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동성(山東省)으로 가던 중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을 보면 낙방거사인 주제에 아직은 기가 살아 큰소리 뻥뻥 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산동성에서 이백(李白) 등을 만나 교유하다가 장안으로 옮겨와 고관대작에게 벼슬을 청탁하는 간알시(干謁詩)나 쓰면서 10여년을 허송세월한 후부터는 그런 ‘큰소리’가 팍 쪼그라든다. 이후 반란군에게 붙잡혀 끌려가기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친지들을 찾아다니다가, 온갖 고생 다한 후 죽기 3년 전에 지은 ‘등고(登高)’를 보면 “간난이 괴롭고 한이 맺혀 서리 같이 흰 귀밑털만 늘고(艱難苦恨繁霜鬢) 화톳불 스러지는데 탁주 술잔만 새로 머무는구나(燎倒新停濁酒杯)”고 한탄만 길게 늘어놓고 있음에 처량하기 짝이 없다. 

젊었을 적 높은 곳을 올려다보면서 키운 꿈이 늙어서 낮은 곳을 내려다볼 때 회한으로 변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한 두보, 인생 높낮이에 연연하다가 술잔도 얼른얼른 비우지 못할 정도로 늙어서야 꿈과 회한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깨달은 건 아닌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인생일수록 만년에 터덜터덜 내려오는 길이 멀고 힘들다는 것을 어느 명예퇴직자가 감히 부인하랴. ‘태산’의 ‘태’가 단순히 크다는 의미의 ‘太’가 아니라 ‘커서 넉넉하게 품어준다’는 의미의 ‘泰’인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2013년 7월 12일 금요일

솔아 푸른 솔아 - 솔잎이 서럽도록 푸른 이유


솔아 푸른 솔아-百濟. 6 

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박영근(朴永根); 1958년-2006년> 

나무를 뜻하는 한자 송(松)의 원형은 ‘송(鬆)’, 긴[長] 터럭[彡]을 가진 나무[木]인데 그 터럭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아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다’는 의미의 공(公)을 붙여 만들어낸 글자다. 그 점을 높이 평가하여 공자 또한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명언을 남겼고, 자고이래 많은 시인묵객들이 소나무를 애송하고 그려왔던 바, 조선조 후기 서예가․금석학자․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도 유배시절 서적을 구해다 주는 등 자신을 극진하게 챙겨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를 꼽는다면 단연 소나무다. 끈질기게 오래 사는데다가 사철 푸르러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변함없는 지조와 절개를 중시해온 한국인들의 성정과 매우 닮았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오죽하면 애국가(愛國歌)에까지 등장할까! 햇빛이 잘 드는 곳이면 어떤 땅이든 가리지 않고 잘 자라서 한반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거니와,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아 예로부터 집을 짓는 데 사용돼 왔고, 싱싱한 솔잎은 통증과 피를 멎게 하고 송진은 염증을 빨리 곪게 하고 고름을 빨아내는 효능이 있어 여러모로 한국인들의 삶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 것 같다.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목피’도 소나무 속껍질을 말한다. 지난 해 추수한 양식이 다 떨어지는 춘궁기가 되면 땅 속의 물을 빨아올려 한껏 부드러워진 소나무 속껍질까지 벗겨 죽을 쒀먹었으나, 소나무 속껍질은 위와 장을 거쳐도 완전히 분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분이 줄어들면 딱딱하게 굳어지는 성질이 있어 변비를 유발했고, 그런 사람들이 무리한 배변을 하다가 x구멍이 찢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까지 생겨나게 됐다. 

박영근 시선집 '솔아 푸른 솔아'
2009년 강 출판사
x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소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밖에. 그래서 소나무의 푸른 빛깔은 변치 않는 삶의 서러움의 색깔이기도 하다. 시인들의 눈에도 그런 빛깔로 보였다. 서정주는 ‘새벽 애솔나무’에서 “천 만 번 벼락에도 살아 남아 가자고/ 겨울 새벽 이 나라 비탈에 서 있는/ 너무 일찍 잠깨어난 우리 애솔나무야”하고 안쓰러워했고, 신경림은 ‘늙은 소나무’가 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황지우는 아예 ‘소나무에 대한 예배’를 올리기도 했었다. 어찌 그 뿐이랴. 지난 1980년대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라는 시집을 펴내 소위 ‘노동문학’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받는 노동자 시인 박영근(朴永根; 1958년-2006년)이 자신의 한과 서러움을 담은 시를 쓰고는 제목을 ‘솔아 푸른 솔아’로 붙인 것도 뾰족한 솔잎의 푸름이 자신의 감성을 아프게 찔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목이 ‘솔아 푸른 솔아’임에도 불구하고 솔에 대한 묘사가 단 한 줄도 없는 이유가 뭔가? 소나무 껍질 같은 민중의 삶을 솔잎의 서러운 빛깔을 보라는 박영근의 의도를 간과하면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나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에 서린 한의 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터, 작품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게 옳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 박영근은 군 제대 후 서울로 이주하여 현장노동자로 일하다가 1981년 ‘반시, 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었다. 박영근 이후 박노해와 백무산 등이 잇따라 출현했다고 해서 ‘노동문학’ 1세대로 꼽지만 그를 ‘노동문학’의 테두리에만 가둬둘 수는 없을 것 같다. 2006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세상을 뜰 때까지 소위 민족민중문학의 전위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시작의 순수성만큼은 비싼 등록금 내고 상아탑에서 시작 수업을 받은 시인들 못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 역시 뛰어난 바, 노동시와 민중시를 뛰어넘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재조명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돈 내고 배워서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다듬은 감성으로 쓰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Tears, idle tears - ‘가버린 날들’이 흘리는 눈물


Tears, idle tears (눈물, 덧없는 눈물) 

Tears, idle tears, I know not what they mean, 
눈물, 덧없는 눈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몰라 
Tears from the depth of some divine despair 
어떤 거룩한 절망의 심연에서 나온 눈물 
Rise in the heart, and gather in the eyes, 
가슴에서 솟구쳐 두 눈에 고이네 
In looking on the happy autumn-fields, 
행복한 가을 들녘을 바라보면서 
And thinking of the days that are no more. 
가버린 날들을 생각하노라면 

Fresh as the first beam glittering on a sail, 
생생하여라, 돛단배에 반짝이는 첫 햇살처럼 
That brings our friends up from the underworld, 
저승에서 우리 친구들을 데려오는 (그 돛단배) 
Sad as the last which reddens over one 
슬프다, 돛단배 빨갛게 물들이는 마지막 햇살처럼 
That sinks with all we love below the verge; 
사랑하는 사람들 싣고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그 돛단배) 
So sad, so fresh, the days that are no more. 
그렇게 슬프고, 그렇게 생생하여라, 가버린 날들은 

Ah, sad and strange as in dark summer dawns 
아, 슬프고 낯설구나, 여름날 동틀 녘의 어둠처럼 
The earliest pipe of half-awakened birds 
잠이 덜 깬 새들의 첫 지저귐 
To dying ears, when unto dying eyes 
죽어가는 귀들에게는, 그리고 죽어가는 눈들에게는 
The casement slowly grows a glimmering square; 
창틀은 천천히 흐릿한 네모꼴로 커진다 
So sad, so strange, the days that are no more. 
그렇게 슬프고, 그렇게 낯설구나, 가버린 날들은 

Dear as remembered kisses after death, 
다정하여라, 죽은 후에 기억되는 키스처럼 
And sweet as those by hopeless fancy feigned 
그리고 감미로워라, 실현 가능성 없는 환상의 키스처럼 
On lips that are for others; deep as love,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입술 위; 사랑처럼 깊은, 
Deep as first love, and wild with all regret; 
첫 사랑처럼 깊은, 그리고 그 모든 회한으로 미칠 것 같은 
O Death in Life, the days that are no more! 
오, 삶 속의 죽음이어라, 가버린 날들은! 

                 <1847년, ‘The Princess’,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년-1892년> 

은 생각이나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문자로 쓴 것, 사실이나 주장을 전달할 때는 논문(論文)이나 기사(記事)를 쓰지만 감정이나 정서를 전달할 때는 시(詩)가 효과적이다. 왜? 감정이나 정서는 말 한마디로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이별을 앞둔 애인이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우는 모습을 글로 써서 전달한다고 가정해보자. 논문이나 기사를 쓰는 사람은 “애인이 운다”고 간단하게 사실을 적시하거나 “애인이 운다, 그런데 간헐적으로 운다,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거기에 맞춰 운다”고 긴 설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지만 권혁웅 같은 시인은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는 비유로 상황과 느낌을 한꺼번에 전달하고 있음을 본다. 또 암 투병을 하다가 죽음에 직면한 여자의 삶에 대한 회상과 이해와 동정을 풀어쓰면 소설책 한권 분량이 될지도 모르지만 시인 문태준은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는 한 마디 말로 함축하여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야말로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시(詩)는 그 자체가 하나의 비유(比喩) 덩어리다. 비유란 어떤 사물 또는 관념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 비유 중 가장 흔히 쓰이는 게 직유(直喩, simile)와 은유(隱喩, metaphor)로서, 직유는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처럼 사물의 유사성을 연결시켜 이미지를 환기시키거나 의미를 확장시키는 반면 은유는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처럼 속성을 꿰뚫어 정곡을 찌르는 데 유효하다. 직유와 은유를 남발하면 혼란이 야기되어 본래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나 이미지가 왜곡되기도 하지만, 그걸 의도적으로 유도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해석이나 이미지 환기를 이끌어내기도 하는 바, 그런 중의성(重義性, ambiguity)과 모호성(模糊性, vagueness) 또한 시작(詩作)의 한 테크닉이기도 하다. 그 비유의 중의성과 모호성은 어떤 한 가지 사물을 하나의 의미 또는 하나의 이미지로만 파악하는 전통과 관습을 깨고 다양한 의미 또는 다양한 이미지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발전과도 무관치 않다. 16,7세기 계몽주의(啓蒙主義) 덕분에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한 게 18,9세기의 낭만주의(浪漫主義)이고, 낭만주의의 결실로 맺어진 게 종전의 전통이나 권위에 반발하여 개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20세기 초의 모더니즘(Modernism)이었던 바,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이 자신의 관찰과 느낌을 중시한 비유를 애용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하겠다. 

알프레드 테니슨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년-1892년)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다리 역할을 한 시인으로 꼽을 만하다. 존 키이츠(John Keats)의 영향으로 낭만주의 색채를 띠면서도 풍부한 비유로 낭만주의 시인들과는 구별되었고, 고전적인 신화나 중세의 전설에서 시의 소재를 발굴하는 한편 개인의 감성과 느낌을 독창적인 운율에 담아 표현했다는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 시인의 전형을 보인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Tears, idle tears(눈물, 덧없는 눈물)’도 그런 류다. 첫째 연에서는 자신의 감상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등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지만, 두 번째 연부터는 ‘as(-처럼, -과 같이)’의 직유로 사물의 인식과 이해를 확대하고 있는 바, 개개의 시어(詩語)보다는 직유로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싹을 틔우고 있음을 본다. ‘가버린 날들’은 ‘여름날 동틀 녘의 어둠처럼 슬프고 낯설다’느니 ‘죽은 후에 기억되는 키스처럼 다정하다’는 등의 표현에서 진일보하여 ‘죽어가는 귀들에게는 잠이 덜 깬 새들의 지저귐’같고 ‘죽어가는 눈들에게는 창틀은 천천히 흐릿한 네모꼴로 커진다’고 공감각적 이미지까지 환기하고 있음에 이미 모더니즘으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의 또 다른 시 ‘Flower in the Crannied Wall(암벽 틈바구니의 꽃)’은 모더니즘 계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다음은 ‘Flower in the Crannied Wall’의 전문. 

Flower in the crannied wall, 
암벽 틈바구니의 꽃,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너를 뽑아낸다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여기 너를 붙잡는다, 뿌리째, 내 손 안에, 
Little flower--but if I could understand 
작은 꽃이여--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What you are, root and all, and all in all, 
네가 무엇인가를, 뿌리와 모든 것을, 모든 것 속의 모든 것을,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이 작품에서 ‘꽃’은 자연(自然)의 대유(代喩), ‘암벽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꽃’은 자연의 생명력과 경외를 상징하는 바, 그 꽃에 대한 관찰을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키고 있음에 인간의 직관(直觀)으로 인간과 자연과 초월적 존재를 연결하려했던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의 경향마저 감지된다. 테니슨이 1833년 시집 ‘샬롯의 숙녀(The Lady of Shalott)’를 발표했다가 비평가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이후 10여년간 침묵한 것도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간 그의 시작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850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In Memoriam(추도사 가운데)’로 탄탄한 필명을 구축한 테니슨은 영감(靈感)보다는 자연과학적 이치로 사물을 관찰하여 속성을 꿰뚫고 그 속성에 화려한 비유의 옷을 입힘으로써 ‘과학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과 함께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했던 테니슨이 1850년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년-1850년)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된 후 1892년 사망할 때까지 시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시작이 그 만큼 전향적이었고 독보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어옹(漁翁)- 인간세상에서 바라보는 자연(自然)


漁翁(어옹)

漁翁夜傍西岩宿 (어옹야방서암숙)   어옹은 밤에 서쪽 바위 곁에서 묵고
曉汲淸湘燃楚燭 (효급청상연초촉)   새벽에 맑은 상수의 물 길어 잡목으로 불 지피네
煙銷日出不見人 (연소일출부견인)   안개 사라지고 해가 떠오르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欸乃一聲山水綠 (애내일성산수녹)   한숨 소리에 산과 물만 푸르러
回看天際下中流 (회간천제하중류)   돌아보니 하늘 가장자리 가운데 물 흘러가는데
岩上無心雲相逐 (암상무심운상축)   바위 위 무심한 구름들 서로 쫓아가네

                                           <유종원(柳宗元); 773년-819년>

국 전국시대 송나라 몽(蒙) 출신의 장주(莊周;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가 썼다는 장자(莊子) 내편(內編) 제물론(齊物論)을 보면 ‘나비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장주가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날아다니는 동안 나비였을 뿐 장주임은 알지 못했으나, 얼마 후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주가 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 분명히 구별되었던 바, 장주는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을 ‘물화(物化)’라고 규정했다. 여기선 물화란 사물과 자아와의 구별을 잊는 것, 흔히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도 한다. 그런데 장자는 왜 물화 이야기를 꺼냈나?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군웅이 패권을 다투던 난세(亂世),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고달팠던 현실의 불안과 고뇌를 잊기 위해 자연에 귀의하는 게 유행병처럼 번졌던 바, 장주 또한 잠시나마 나비가 되어 인간세상의 근심 걱정 다 잊고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장자’ 전편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이기도 하다. 

맞다. 인간으로서의 불안과 고뇌를 떨치려면 인간세상을 벗어나면 된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인간세상에서 벗어나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돈과 권력과 명예를 위해 지지고 볶는 사람들보다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산수(山水)를 벗 삼자는 게 시인묵객들의 생각이었다.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현령 자리를 내팽개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를 노래하고, 이백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했던 왕유(王維)가 종남산 언저리에 별장을 짓고 ‘림수(林叟)’ 즉 ‘숲 속의 늙은이’가 되고자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불안과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의 자연에의 귀의는 좋게 말하면 물화(物化)이고, 몰아(沒我)이고, 망아(忘我)이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현실도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 자신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 같이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세상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부류, 인간세상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는 부류, 자연 속으로 진입했던 부류 등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물화 내지는 망아와 현실도피(現實逃避) 사이의 고뇌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종원의 초상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장가․시인으로 명망이 높아 소위 당송(唐宋) 8대가의 하나로 꼽히는 유종원(柳宗元; 773년-819년)은 인간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 자연에의 귀의를 염원했던 부류에 속했던 것 같다. 현실의 삶을 수용하면서도, 그로 인한 고뇌와 번민을 겪을 때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래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작품들이 많다.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33세에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郎)이 되었으나,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환관과 귀족들의 폐해를 혁신하려는 왕숙문(王叔文)의 정치개혁 운동에 가담했다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된 이후 다시는 중앙정계로 복귀하지 못한 채 변방을 떠돌았던 그였기에, 언제고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리라는 꿈을 차마 포기하지 못해 현실의 삶 속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고 자연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랬던 게 아닌가 싶다. 

유종원이 그림을 그리듯이 시를 쓴 것도 현실의 삶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 선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어옹(漁翁)’ 또한 유종원 자신이 그림을 그려놓고 자신이 감상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작중 화자인 ‘나’와 ‘어옹’을 분리한 것도 그렇고, 7번째 구의 ‘회간(回看)’은 자신이 그 풍경 밖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거니와, 바위 위 구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잇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음을 본다. 즉 유종원은 자연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저만치 떨어져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 속에 몰입하고는 싶지만 아직 몰입하지 않은 상태, 그런 심정은 ‘천제하중류(天際下中流)’에 이르러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는 것 같다. 하늘이 땅과 닿은 가장자리 가운데로 아득히 흘러가는 물길을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지 않겠는가?! 

‘어옹’은 환상과 공상을 배제한 채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관찰로 그림 그리듯 시를 쓴 유종원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일부로 파악할 것을 권고했던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나비는 나비이고 장주는 장주’라는 것을 깨달은 게 떠올려지기도 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어찌하리. 그게 인간의 현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던 유종원의 인간적인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한숨 소리에 산과 물이 푸르러 간다고 읊었던 건 아닌지?!

2013년 7월 9일 화요일

낙타 -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큰 깨달음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2008년 창비, 신경림; 1936년- > 

(詩)는 철학(哲學)과도 통한다. 철학을 감동적으로 풀어쓰면 시가 되고, 시적 감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면 철학이 된다. 시는 정서적 감동(感動)을 주목적으로 하고 철학은 논리적 깨달음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굳이 깨달음의 뿌리인 리(理)와 감동의 근원인 기(氣)의 뿌리가 하나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감동 속에 깨달음 있고 깨달음 속에 감동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일찍이 기원전 4백여년 전 동양철학의 비조(鼻祖)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을 편찬하고, 그보다 1백여년 쯤 뒤 서양철학의 한 기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élēs)가 ‘시학(詩學, Poetics)을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글로 쓰인 인류의 기록을 더듬어 보건대 시인 중에 철학자가 많았고 철학자 중에 시인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인간의 감동과 논리적 사고의 뿌리가 하나라고 여겼던 것 같다. 무려 7대에 걸쳐 성직(聖職)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에머슨은 태생이 종교인이었으나 자신의 사유(思惟)를 기존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양 사상에도 일가견을 이뤄 편협한 기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했고, 인간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결국 자연과 신과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귀속된다는 범신론을 주장했었다. 이른 바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다. 미국철학을 유럽철학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켰다고 평가받는 초월주의는 “직관적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내재하는 신성 및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망라하는 관념주의의 한 형태”로서 신, 인간, 자연을 초월적인 우주 영혼의 공유자(共有者)로 간주했었다. 그랬던 만큼, 에머슨은 세속의 구속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겨 ‘문학적 철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에머슨이 신경림(申庚林, 1936년- )의 시 ‘낙타’를 봤다면 손뼉을 쳤을 것 같다. 충북 충주 출신으로서 1956년 ‘문학예술’지에서 ‘갈대’를 비롯한 몇몇 작품으로 추천을 받아 등단한 신경림은 잡지사·출판사 등을 전전하다가 시작에 몰두한 이래, ‘농무(農舞)’ ‘갈대’ 등에서 보듯 소외계층의 한을 풀어냄으로써 ‘민중시인’로 불렸으나, ‘낙타’를 전환기로 세속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을 관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에머슨의 눈으로 본다면 ‘신, 인간, 자연을 초월적인 우주 영혼’을 천착하고 있음을 본다. 

신경림 시집 '낙타' 2008년, 창비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양자 사이의 인생 여로(旅路)를 먼저 떠올리지만 작품 속의 화자(話者)가 삶과 죽음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까먹어서는 괴리적(乖離的) 감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으로 풀어쓴 달관(達觀)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라고 풀어쓴 초월(超越)을 놓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나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로 상징되는 자연(自然)의 관점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낙타를 타고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낙타를 타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윤회(輪回)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의 ‘누군가’가 에머슨의 ‘초월적인 우주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시와 철학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재차 실감한다. ‘낙타’ 이후 소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한과 분노와 슬픔을 초월하여 삶을 관조하고 있는 신경림이 지난 해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손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동시집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를 펴낸 것도 수십 년 간의 시작(詩作)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초월적 우주 영혼’의 눈으로 본다면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보다도 엄마밖에 모르는 코흘리개 손자가 더 재미있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