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도시로 변해버린 뉴욕 퀸즈 카운티의 1920년대 전원 풍경. 농가의 생김새만 다를 뿐 한국의 시골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 |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7년, 정지용; 1902년-1950년>
먹고 사는 게 힘들수록 향수(鄕愁)가 커지는 것은 인지상정, 한자 ‘鄕愁’도 그래서 생겨났다. 시골 향(鄕)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서 본래 의미는 ‘함께 밥을 먹다’, 그게 훗날 ‘마을’ ‘시골’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자 거기에 먹을 식(食)을 더해 ‘잔치’라는 의미로 썼다. 가을 추(秋)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시름 수(愁)도 마찬가지다. 가을 추(秋)는 벼 화(禾)에 불 화(火)가 붙은 것으로서 추수를 앞두고 곡식을 좀먹는 메뚜기들을 잡아 불태우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는 게 정설, 겨울을 날 양식이 모자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그린 것인 바, 농경문화권에서 밥을 같이 먹던 혈연․지연에 대한 그리움 또한 시름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걸 거꾸로 말하자면, 향수는 ‘너’와 ‘나’의 성분과 사상과 다름을 극복해주는 공통분모로써, 향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감성으로 돌아가는 것인 바, 인간애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했던 것도 ‘향수’를 통해 인간애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본향을 아담과 이브가 죄 짓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으로 설정해놨듯이, 시골출신이 도회지의 물질만능주의에 타락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고향에서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는 게 고달프고 외로울수록 향수가 더욱 증폭된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아예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자고 일어나면 논밭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요즘 고향 또한 예전의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보면 현대인의 고향은 자신의 가슴 속이나 꿈속에만 남아있는 실루엣 같은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대인은 모두 다 실향민(失鄕民),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년-1950년)도 ‘현대인이 상실한,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고향’을 주목했던 것 같다. 1903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이 ‘향수’를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인 1923년 경,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19년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므로 ‘향수’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유학 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 일본에 유학 갔던 대부분의 조선 젊은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정지용 또한 낯선 타관에서 나라를 빼앗긴 2등 국민으로서 서러움을 톡톡히 겪으면서 ‘향수’의 시상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부터, 1946년 건설출판사에서 펴낸 정지용 시집, 정지용, 스티크니 |
최남선(崔南善)이 한국 최초의 신체시로 일컬어지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을 발표한 게 1908년이고 주요한(朱耀翰)이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한 게 1919년, 그 이후 불과 4년만에 정지용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라든지 ‘금빛 게으른 울음’ 등의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해가며 지금의 어느 현대시에 비겨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혹자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에 접했을 구미 영시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머지 시상과 시적 기교를 습관적으로 차용(?)했을 거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향수’가 하버드대 출신으로서 30세 때 뇌종양으로 숨진 미국 시인 조셉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 1874∼1904)의 ‘추억(Mnemosyne)’를 모방 또는 번안했다는 글이 나돌기도 했었다. 실제로 ‘향수’와 ‘추억’은 구조와 시상의 전개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매 연마다 ‘the country I remember’(추억)과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향수)가 반복된 것도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고, ‘소’ ‘누이’ 등의 소재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지용이 스티크니의 것을 한국말로 살짝 고쳐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향수’가 ‘추억’을 베낀 것이라고 해도, ‘향수’의 문학적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될 듯싶다. ‘향수’와 ‘추억’의 프레임과 테크닉은 같을망정 ‘향수’는 조선인의 가슴 속에 따뜻하게 묻혀 있는 ‘고향’을 그린 것인 반면 ‘추억’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을 그렸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지용이 한국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런 사소한 시시비비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탓에 정지용은 누군가가 평했던 것처럼 “살아서는 불우한 시인이었고 죽어서는 사상적 금기 대상”이었지만,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많은 기라성 같은 후배 문인들을 등단시킴으로써 한국시단의 씨알을 굵게 만든 탁월한 문학가였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젊은 천재 시인 이상의 시를 실어 길을 터줬고, 1939년 ‘문장(文章)’ 편집인으로 있을 때는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 세칭 ‘청록파’를 등단시켰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화여전교수와 경향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었다. 그런 그가 한창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던 스무 살 시절에 서양시인의 시 하나 모방했다고 해서 손가락질한다면 그게 더 비문학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나 ‘사철 발 벗은 안해’를 두고 있는 사람들만큼은 정지용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고 믿는다. 왜? 한국인들의 ‘고향 인심’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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