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5일 토요일

산석(山石) - 반골(反骨)의 마음 다스리기

아이슬란드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한 야산 꼭대기에 서 있는 돌탑.










산석(山石)

山石犖確行徑微 (산석락확항경미)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아
黃昏到寺蝙蝠飛 (황혼도사편복비) 황혼 녘 절에 이르니 박쥐들만 날아다니네
升堂坐階新雨足 (승당좌계신우족) 법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비가 발치를 적시는데
芭蕉葉大梔子肥 (파초섭대치자비) 파초 잎은 커지고 치자는 살이 찌는구나
僧言古壁佛畫好 (승언고벽불화호) 중이 말하기를 고벽의 불화가 좋다고 하기에
以火來照所見稀 (이화내조소견희) 불 들고 비춰보니 드물게 보는 것이네
鋪床拂席置羹飯 (포상불석치갱반) 상이 펴져 자리 쓸고 앉으니 국과 밥이 차려지고
疏糲亦足飽我飢 (소려역족포아기) 거친 현미밥일망정 주린 배 채우기에 넉넉하네
夜深靜臥百虫絶 (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자리에 드니 벌레소리 그치고
淸月出嶺光入扉 (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고개 위에 솟아 문짝 틈으로 비춰드네
天明獨去無道路 (천명독거무도노) 날이 밝아 혼자 떠나는데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煙霏 (출입고하궁연비) 높고 낮은 언덕길 오르내리다가 안개에 길이 막혔네
山紅澗碧紛爛漫 (산홍간벽분난만) 산 붉고 계곡물 푸르러 어지러이 뒤섞이는데
時見松櫪皆十圍 (시견송력개십위) 문득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열 겹
當流赤足蹋澗石 (당류적족답간석) 흐르는 물 있어 발을 담구고 개울 돌 밟으니 
水聲激激風吹衣 (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요란하고 바람에 옷자락 나부끼네
人生如此自可樂 (인생여차자가낙) 인생이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워질 만한데
豈必局束爲人鞿 (개필국속위인기) 어찌 일에 얽히어 고삐를 잡힐까
嗟哉吾黨二三子 (차재오당이삼자) 안타깝구나, 나와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이여
安得至老不更歸 (안득지노부갱귀) 어찌 다 늙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가

                                                                           <한유(韓愈); 768년-824년>

이 먹을수록, 세상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의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경물(景物)도 달라 보인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그 말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풀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 세상만사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자신의 마음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세상만사가 달라 보인다는 또 다른 이치를 잠시 까먹은 사람들의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다스리면 저 마음이 고개를 쳐들어 세상만사는커녕 자기 마음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죽는 게 장삼이사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이 먹어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자기최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나 할까, 자기를 속일 수 있으면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을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다. 세상을 원망하다가 모두 다 용서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상 원망해봤자 내 속만 끓일 뿐 세상은 변함이 없어서, 결국은 마음이나마 편하게 먹고자 포기와 체념을 용서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荘畫傳, 1921년 발행)에 
실려 있는 한유의 초상
지금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당(唐)의 문장가 한유(韓愈)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고 또 3세에 아버지가 타계하여 박복하기 짝이 없는 유년을 보내던 중 14세에 형 한회(韓會)까지 죽자 형수 정씨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한유,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는 세 번씩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관직에 천거됐던 불운한 청년, 세상을 원망할 자격(?)이 차고 넘쳤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골 기질을 키웠던 듯싶다. 현실비판 의식이 강했다. 육조(六朝) 이래 문단의 정형처럼 유행해온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수사주의에 치중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한대 이전의 고문(古文)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했던 것도 그렇고, 태자가 요절하여 비통해하다가 불교에 빠져들던 헌종(憲宗)이 막대한 재물을 들여 법문사(法門寺) 불사리를 궁중으로 들여와 공양하자‘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올려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했던 것도 그의 반골기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헌종이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중신들의 간언으로 사형만은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당하고 만다.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국자제주(國子祭酒),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어사대부(御史大夫) 등등의 직을 역임하다가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가 낙백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시 ‘산석(山石)’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진하게 드러난다.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는 심정의 토로, ‘황혼녘’은 ‘낙백의 길’이고 ‘박쥐’는 자신을 헐뜯고 모함하는 무리, 배불론(排佛論)을 부르짖던 자신이 절간을 찾아 한 끼니 신세를 지리라고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런 상상을 해봤는지도 모르겠다. 고벽의 불화가 좋다는 중의 말에 마지못해 감상하는 척 하고는 ‘드물다’(稀)고 평한 것도 그런 방증의 하나로 보인다. ‘稀‘는 ’보기 드물다’는 뜻도 있지만 ‘희미하다’라는 뜻도 있는 바, 중이 좋다고 하는 고벽의 불화를 봤더니 희끄무레해서 잘 보이지 않더라(별 것 아니더라)는 중의가 읽혀진다. 입안에서 껄끄럽게 따로 도는 거친 현미밥을 시장기를 반찬삼아 배불리 먹었다는 것도 그렇고! 벌레소리와 맑은 달빛과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개울물과 옷자락 나부끼는 바람만으로도 인생이 줄거울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이어 ‘자신과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吾黨二三子)에게까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확신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가 아닌 한 누구라서 부인하랴. 한유가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성을 가다듬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를 숭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스쳐가는 풍월으로라도 모두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문구 하나만으로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게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 세상을 사는 인생의 깨달음이기에 아직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2017년 7월 14일 금요일

정인벽옥가 (情人碧玉歌) - 여자의 첫 경험



情人碧玉歌 (정인벽옥가)  2수


碧玉小家女 (벽옥소가녀) 벽옥은 작은 집 여자(첩) 
不敢攀貴德 (불감반귀덕) 감히 귀한 분에게 매달릴 수 없어
感郎千金意 (감랑천금의) 낭군의 천금 같은 뜻을 고맙게 여길 뿐이네 
慙無傾城色 (참무경성색) 성을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답지 못함이 부끄럽네

碧玉破瓜時 (벽옥파과시) 벽옥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 (낭위정전도) 낭군이 정을 베풀어 껴안고 뒹구네
感君不羞赧 (감군불수난) 낭군이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느껴지니
廻身就郞抱 (회신취랑포) 몸을 돌려 낭군 품에 안기네

                                                                               <손작(孫綽); 314년-371년>

령(年齡)이란 게 뭔가? 년(年)은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로 본래 ‘벼가 익다’라는 의미였으나, 벼는 일년에 한 번 익으므로 통상 일모작이었던 한자문화권에서는 자연스레 ‘한 해’를 뜻하게 됐다. 또 령(齡)은 앞니를 의미하는 ‘치’(齒)가 ‘령’(令)과 붙어서 된 말로 일년에 앞니가 하나씩 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앞니가 하나씩 빠지는 소나 말의 나이를 가리켰다. 그 두 글자가 서로 붙어 나이를 의미하는 연령(年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미개한 농경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온 시간을 따질 때 연령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겠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분화되면서 단순히 태어나서 지나는 시간을 달력에 따라 계산한 역연령(曆年齡, Chronological age), 사람의 뼈가 형성되는 골화과정(骨化過程)이 나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X선으로 촬영하여 측정하는 골격연령(骨格年齡, Skeletal age), 지능 발달로 측정하는 정신연령(精神年齡, Mental age)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여자가 섹스를 알게 되는 나이는? 한국서 초등학교 여학생들까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찍어 음란물 사이트에 판매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지만 그건 발랑 까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일 뿐 자고로 초경(初經) 전후에 섹스를 알게 된다는 게 정설, 요즘엔 여자아이들이 조숙하여 13-14세라지만 그 옛날엔 16세쯤 초경을 경험했었다.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瓜(과)’자 가운데를 나누면 두 개의 '八(팔)'자 두 개가 되는데, 그것들을 합하면 16이 되어 여자 나이 16세 즉 ‘이팔청춘’을 뜻하는 바, '외를 깬다'라는 의미의 '파과(破瓜)'를 요즘 말로 풀이하면 '처녀성을 잃다'일 것이다. 이 때의 ‘외’는 길쭉한 한국산 오이가 아니라 속에 붉은 빛이 감도는 외, 청(淸)나라 문인 원매(袁枚) 또한 그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파과, 어떤 사람들은 이를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깰 때처럼 곧 홍조를 보게 된다‘고 풀이한다(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고 말했고, 같은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도 ‘통속편(通俗編)’에서 “풍속을 살피건대, 여자가 몸을 깨는 것을 외를 깬다고 한다(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고 적었다. 그러나 남자의 파과지년(破瓜之年)은 다르다. ‘八’ 두 개를 곱하면 64가 되는데, 남자 나이 64세면 혼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로서, 송(宋)나라 축목(祝穆)은 ‘사문유취(事文類聚)’에서 “당나라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라는 구절이 있는 바,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뜻하기도 한다”라고 기록했었다.

‘파과지년’의 원전은 중국 진(晉)나라 시대의 시인 손작(孫綽) 시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진나라 항간에 유행했던 악부(樂府)로서, 여남왕(汝南王) 사마의(司馬義)가 자신의 애첩 벽옥(碧玉)을 위해 손작에게 청하여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이후에도 이런 저런 ‘벽옥가’가 유행한 것을 보면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사랑노래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또 송나라 때 곽무천(郭茂倩: 1041-1099)이 편찬했다는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송(남북조시대)의 여남왕이 지었다(宋汝南王作)”고 쓰여 있지만 곽무천이 옛날 노래들을 채집 수록할 때 진나라 손작의 ’정인벽옥가‘를 모방하여 유행했던 ’벽옥가‘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정인벽옥가‘는 남자들을 위한 음란 시, 얌전한 아가씨들이 읽기엔 매우 부적합(?)한 시였을 것 같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에 삽입되어 처녀막이 파괴될 때, 남자는 흥분을 못 이겨 부르르 떨고, 여자도 그런 남자의 사랑을 감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몸을 돌려 남자 품에 안긴다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다. 어떤 사람들은 ‘벽옥(碧玉)’을 밋밋하게 ‘푸른 구슬’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말씀, 그 옛날 임금의 성기를 ‘옥근(玉根)’이라고 표현한데서 보듯 ‘벽옥’은 매끄럽고 푸른 색깔의 남성 성기를 은유적으로 일컬은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도(顚倒)’는 ‘난새(방울새)를 엎어지게 하고 봉황새를 넘어뜨리다’라는 의미의 ‘전란도봉(顚鸞倒鳳)’의 줄임말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섹스와 연관되었을 때는 ‘남자’ ‘사내’를 뜻하는 ‘랑(郎)’을 쓰고 순정이나 사랑과 연관되었을 때는 ‘님’ ‘남편’을 뜻하는 ‘군(君)’자를 쓴 것도 이채롭다. 여자가 섹스를 할 때는 상대를 남자로 인식하지만 사랑을 느낄 때는 님으로 여긴다는 함의가 읽혀지기도 한다. 

후대에 그려진 손작의 초상
손작이 어떤 사람이기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을 드러내놓고 까발리는 것을 터부시하던 시절에 그런 음란한 시를 썼나? 손작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기품이 있었고 솔직담백했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풍광이 아름다운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어 문사 41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엮고는 저 유명한 서문 ‘난정서(蘭亭序)’를 썼을 때 그 뒤에 또 다른 서문 ‘난정후서(蘭亭後序)’를 붙일 정도로 당대에 글재주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어 그 두 종교를 한 작품 속에 용해시킨 그의 대표작 ‘유천태산부(遊天臺山賦)’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가 남녀의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인벽옥가’가 사족(士族)들에게까지 읽혀지면서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도 그의 명성이 작품의 통속성을 덮어버릴 만큼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17년 6월 29일 목요일

엄마 걱정 - 시인의 '심적 외상(心的外傷, Psychological trauma)'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속의 검은 잎’(1989, 문학과 지성사), 기형도(奇亨度: 1960~1989)>


계의 중심은 ‘나’다. 동서남북의 방위도 ‘나’를 중심으로 정해지는 것이고 ‘나’의 눈에 빨강색의 안경이 걸쳐지면 세계는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의 안경이 걸쳐지면 파랗게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치고 석가의 제자들이 입만 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나‘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과 무관치 않다. '나'의 번뇌는 '나'로 말미암은 것,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불안과 고독의 뿌리가 '나'라는 데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인 '나'의 경험과 지식이 작용하는 사고(思考)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어떤 자극에 대해 적응하지 못할 때 불안이 야기되고, 그 불안을 해소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나'를 동정(同情)하거나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문득 외로움에 휩싸이고, 그런 외로움이 겹겹이 쌓여 굳어지면 고독이라는 감옥으로 변하지 않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불안과 고독의 감옥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지면서 불확실성이 극대화되던 19세기 후반 '나'의 자유와 책임과 주관성을 중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불안과 고독을 화두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년~1855년)는 불안과 고독의 뿌리를 원죄와 구원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서 찾았지만 기독교의 우산에서 벗어났던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1976년)는 인간의 존재 확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했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 없이 세계로 '내던져진 자'로서,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는 바, 자신의 '내던져짐'과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에 대해 권태로워하면서 불안해하고 결국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죽음과 대면해야 하므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 바 '현존재(Dasein)'의 자각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나‘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게 불안이고 고독이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했었다.

불안과 고독도 지나치면 병, 그게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커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심적 외상(心的 外傷, Psychological trauma)'을 남긴다.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S. 프로이트와 J. 브로이어(Josef Breuer)는 공동연구를 통해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인간에게 있어서 몹시 불쾌하고 강렬한 체험(심적 외상)은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위협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억압이라는 기제(機制)에 의하여 의식 세계에서 무의식 세계로 전환된다.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심적 외상은 콤플렉스를 형성하여 장래 그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었다. 

시인들은 자기만의 감수성으로 사물과 삶을 관찰하고 또 그것을 자기만의 시어로 표현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탓이 큰 것으로 이해되거니와, 그들이 매우 사적인 심적 외상으로 인한 충격을 시로 승화시키는 행위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위안의 방편으로 시작(詩作)을 시작한 시인들일수록 '심적 외상'의 신음(呻吟)을 작품의 배경음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앞길이 막혀 좌절했던 당나라 시인 이하는 자신의 시세계를 괴기하고 염세적으로 장식했었고, 한국의 대표시인 서정주 또한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했었으며, 아내와 사별한 아픔과 슬픔을 시로 읊어 베스트셀러 시인이 됐던 도종환도 “좌절과 고통 없었다면 시인 못 됐을 것“이라고 토로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1989년 문학과 사상사에서 펴낸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던 중 뇌졸중으로 인해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던 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 ~ 1989)도 '심적 외상'에 꽤나 시달렸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노라면 유년의 가난과 불안과 고독이 여린 심성에 깊은 상처를 남겨 성년이 되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1989년 5월 발간된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엄마 걱정'도 '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은 '엄마 걱정'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자기 자신 걱정, 해가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찬밥처럼 방 안에 담겨 불안에 떠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을 표출하고 있음을 본다. 아주 먼 유년의 일이었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자신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는 토로가 너무 애처로워 그 때의 일이 얼마나 큰 '심적 외상'을 남겼는지를 가늠케 한다. 실제로 기형도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런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 많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위험한 家系 1969' 앞부분>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죽만 먹고 지내는 가운데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고 매정하게 말한다든지 스펀지 마다 숭숭 구멍 난 잠바를 입고 다니는 철부지 아들이 새것을 사달라고 조르자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라고 거절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지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를 평생 어루만지고 살아야할 자신의 영혼을 더 불쌍히 여기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제목을 ’위험한 가계‘라고 붙인 게 아닌지?! 

세상의 중심은 '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 또한 상기한다면, 소통의 문이 열린다. 시를 짓고 감상하는 이유도 그런 소통의 문을 열기 위해서라는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시가 어쩌다 생겨난 게 아니라 원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혼자만의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가 발명해낸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2017년 4월 18일 화요일

꽃나무-주관과 객관 사이의 인지부조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 찰스 강변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톨릭 청년 2호, 1933.7, 이상(李箱: 1910~1937)>

간이 스트레스 및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속이면서 대체하는 양식을 ‘방어 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성격발달 수준이나 불안 정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킨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중 하나가 투사(投射, Projection)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나 갈등의 원인이 자신 내부에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치 자신 외부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선거인단 확보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유효 득표수에서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뒤진 것으로 나타나자 이민자나 민주당원들의 불법 투표 때문일 것이라고 우겼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보기는커녕 모든 게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음모를 꾸민 탓이라고 강변했던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 자신이 못 나서 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치인들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촛불집회니 태극기 집회니 이런 저런 데모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일종의 투사를 한 것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투사를 하는 사람들은 실체보다도 그 실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우선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다.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과 객관적 실체가 다르게 나타날 때 자기 정당화를 통해 양자 사이의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저런 의혹과 추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걸핏하면 ‘위대한 미국’ 또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탄핵에 이어 구속까지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어떠한 경우에도 사익·사심 추구가 없었다”는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것도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사람들이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려면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차이부터 다시 학습해야 한다는 것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주관은 감각하고 의식하고 사고하는 대상에 작용하는 것 즉 의식 그 자체를 말한다. 실천을 강조할 때에는 주체(主體)라고도 하는데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에 의하여 구성되고 주관에 좌우된다”고 여겨 주관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유물론자들은 “주관은 최고도로 조직된 물질 즉 뇌의 작용으로서 객관을 반영·모사(模寫)한다”고 폄하한다. 대상의 객관성과 배치되는 독선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를 '주관적'이라고 비난하는 풍조도 거기서 생겨났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반면 객관은 주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 즉 대상(對象)을 말한다.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작용으로써 만들어진 2차적(二次的)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물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인식 대상이나 실천 대상이 된다”고 반박한다.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종교인이나 자기 믿음이 강한 관념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으로 인식하려고 덤벼들지만 과학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미국사회나 한국사회나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것도 주관과 객관의 충돌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나의 주관을 객관이라고 믿으면서 너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든지, 자신의 주관과 객관적 실체가 불일치할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든지, 내가 수용하기 힘든 갈등이나 불안을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인 이상
서울 출신으로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하다가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한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라면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좀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요양하면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는 이상이야말로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몰라 일본식으로 '리상'이라고 불러 자신의 필명을 '이상'이라고 정했다는 설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거니와, 1934년 자신의 주관으로 쓴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의 객관적인 항의로 중단해야만 했으며, 자신은 결핵을 극복하기 위해 도쿄행을 결행하였으나 얼렁뚱땅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병사할 때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곰곰이 곱씹어봤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주관이 세상 사람들의 ‘주관적인 객관’에 의해 거부당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던 그의 의식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을 터, 시대를 잘못 타고난 시인의 마음고생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1933년 7월 <가톨릭 청년> 2호에 발표한 작품 ‘꽃나무’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로 보인다. 이 작품의 주제는 ‘꽃나무’가 상징하는 객관적 자아와 ‘나’가 대변하는 주관적 자아의 충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는 주관적 인식,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는 자신의 주관과는 차이를 보이는 현실의 객관적 인식, “나는막달아났소”는 그런 현실로부터의 도피,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는 인지부조화의 자각....소위 자의식(自意識)의 분열로 치닫고 있음을 본다. 자신의 주관과 객관의 사이의 고뇌를 콕 찍어내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당대의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그런 주관적인 자의식의 분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너도 나도 남 탓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읽고 또 읽어볼 만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2017년 4월 8일 토요일

여성에 관하여-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페미니즘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 최승자(1952년 ~ )>

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1893년)이 188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을 읽다보면 “도대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하느님은 어디서 자빠져 낮잠을 자고 있느냐”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노르망디 귀족의 딸 잔느는 줄리앙 자작과 결혼하지만 이내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난봉꾼이었던 줄리앙은 잔느의 몸종 로잘리를 건드려 아이를 낳게 하고도 모자라 백작 부인과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또 잔느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정숙한 여인의 귀감으로 여겼던 어머니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남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대해 더 없는 환멸을 느낀다. 외아들 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보지만 폴 마저 창녀와 함께 살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등 잔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모파상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생에 대한 배신감, 솟구치는 비애로 뒤범벅된 그런 작품을 쓴 데 대해 사람들은 “모파상이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던 데다가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주목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모파상이 여성의 일생을 남성의 시각으로만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의 불행조차 ‘남자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파상 자신은 여권의 시장을 위해 그런 작품을 썼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기실은 여자의 일생이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강조한 지독한 성 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일견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려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시각이나 사회적 편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모파상 살아생전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돋보기를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또한 페미니즘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883년 모파상이 한 잡지에 발표한 후 단행본으로 엮어진 게 일본에 소개될 때 ‘여자의 일생’이라고 번역됐고 그걸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베껴 한반도에 소개함으로써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 원제는 ‘Une vie’ 또는 ‘L'Humble Vérité’로서 ‘어떤 인생’ 또는 ‘비천한 진실’이었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비천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나온 후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최승자(1952년~ )에게 물어보면 “가깝고도 멀다”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다. 등단하자마자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던 최승자는 등단 초기 당시 한국사회의 흐름과 맞물려 페미니즘을 시작의 주제로 삼았었다. 지금도 한국문단에서는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라는 이름을 빠짐없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최승자의 페미니즘은 8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바,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즉 남성 우위 사회에 대한 반동적인 페미니즘을 내세울 때 최승자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여성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여성성을 확인하려고 시도했었다. 최승자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작품 ‘여성에 관하여’에도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죽음과 탄생, 죽음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卵子)의 종말, 탄생은 수정되어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태아, 여자의 몸이 삶과 죽음의 발원(發源)이라는 통찰로 여성성의 근원(根源)을 찾고 있음을 본다.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의 모태이자 삶과 죽음의 뿌리라는 것이다.

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최승자의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여성에 관하여’ 사이의 거리는? 역시 가깝고도 먼 것 같다. 남성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관찰했던 모파상은 인간의 삶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껴 자살을 시도한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893년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여성의 눈으로 여성성을 관찰했던 최승자 또한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려오면서 육체적으로는 집과 병원을 오가고 정신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지난 해 자신의 근황을 담은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건재(?)함을 알렸지만 페미니즘은 썰물처럼 빠져나고 그 빈자리를 생에 대한 관조로 채우고 있음을 본다. "나는 죽은 시계/세계가 노자 時 장자 分에 멈춰 있다/장자가 無라면 노자는 虛다/장자가 소설가라면 노자는 시인이다/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인다"('죽은 시계' 전문)라는 작품에서 보듯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페미니즘도 삶의 아픔과 슬픔과 고뇌도 초월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뚜렷이 감지된다. 

'여성' 최승자보다는 '시인' 최승자로 바라보고 싶다. 최승자 또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활동해왔지만 결국은 인간 아무개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그게 여자가 아닌 인간의 ‘비천한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이 크다.

2017년 3월 25일 토요일

십자가-시인 윤동주의 순결한 신앙고백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1945년>

회라는 말의 어원을 뒤적거려보면 그리스어의 ‘에클레시아(ekklesia)'와 ’키리아케(Kyriake)'가 등장한다. 에클레시아는 “시민의 집, 의회”를 의미하며, 키리아케는 “주님에게 속한다”는 뜻으로 독일서는 지금도 교회를 ‘키르헤(Kirche)’라고 부른다. 초기교회는 이 말을 유대교와 이방종교로부터 구별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특수집단”이란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시는 집단인 교회는 그 발생 초기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등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모이는 공동체였으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민족 단위의 교회 혹은 전체적인 공동교회로 그 성격이 변하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리스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 등으로 분화되었다가, 다시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로 발전해왔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발라케즈가 1632년에 그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모든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는 십자가(十字架)가 달려 있다. 어설픈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가를 기독교의 신성한 전유물로 여기지만 천만의 말씀, 십자가는 예수 이전 고대부터 만들어졌고 로마 제국에서는 십자가형(Cruxification)에 쓰이던 사형 틀이었다는 상식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세로는 예수와 예수를 믿는 신자를 연결하고 가로는 신자와 신자를 연결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인정받으려면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건 이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독교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먼저 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입만 벌리면 ‘믿습니다’를 외치기보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처럼 타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나?”하고 자문해보는 것이 기독교 신자의 첫걸음인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은 것 또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만 오라는 표시로 받아들이면 틀림이 없다. 

한국에서 개신교 신자 비율이 처음으로 불교를 앞지른 것은 지난 97년이었다. 당시 한국갤럽이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천6백13명을 대상으로 ‘제3차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종교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개신교인의 비율이 20.3%로 나타나 18.3%에 그친 불교신자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었다. 개신교인 비율은 84년 같은 조사에서 17.2%, 89년에는 19.2%로 불교에 비해 1.6~1.7% 포인트 뒤졌었으나 97년 조사에서 2% 포인트나 앞질러 국가적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명실공이(?) ‘기독교 국가’가 됐다. 한국인 대다수가 한국의 어느 거리에서든 교회 십자가를 볼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 ‘기독교 국가’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뉴욕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왕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뉴욕 메트로 지역 일원의 한인 교회 수는 차고에 십자가 붙여놓고 목사 부부가 찬송가 부르는 개척교회에서부터 신도수가 1만여명에 육박하는 대형교회까지 줄잡아 8백여개, 신학교가 30여개, 관련 언론기관이 10여개, 수양관이 20여개다. 왜 교회 내에서 이간질을 하느냐며 목사가 성가대 지휘자의 멱살을 잡든 말든, 팔뚝 빠지도록 손발톱을 다듬어 헌금을 하면 그 헌금으로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TV방송에 내보내든 말든, 가게 속여 팔아먹었다며 집사와 장로가 언성을 높이든 말든, 장로가 헌금을 슬쩍 착복했든 말든, 적어도 겉으로는 가장 믿음이 돈독한 소수계로 손꼽히고 있다. 

시인 윤동주
어쨌거나 할렐루야? 천만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집에 하나씩은 모셔두고 있는 십자가가 기실은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고 날마다 그 형틀을 바라보면서 이웃에 사랑을 베풀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려고 애썼던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1945년) 또한 긴 한숨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 저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부농으로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 윤하현이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정착한 연고로 어린 시절 윤하현의 손에 이끌려 명동촌의 명동교회에 다녔던 윤동주는 기도하듯 자기를 성찰하는 시를 썼었다. 명동교회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십자가’도 그 중 하나다. 쫓아오던 햇빛이 높은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에 걸렸다는 감각적 표현도 신선하지만, 예수를 인간적으로는 ‘괴로웠던 사나이’ 그러나 이타적인 사랑으로는 ‘행복(幸福)한 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음에 기독교리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었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고,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겸손하면서도 결연한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짓고 있음에 윤동주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쳤던 진짜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내면의 성찰이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왜곡된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 윤동주의 ‘십자가’를 신자들 돈 뜯어 키운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읽어주고 또 읽어주고 싶다.

2017년 3월 20일 월요일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 페미니스트 시인이 본 ‘남자의 좆’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


강남의 술집은 음습하고 황량했다
얼굴에 ‘정력’을 써붙인 사람들이
발정한 개처럼 낑낑대는 자정,
적막강산 같은 어둠 속에서
여자는 알몸의 실오라길 벗었다
강남 일대가 따라 옷을 벗었다

아득히 솟은 여자의 유방과
아련히 빛나는 강남의 누드 위로
당당하게 
말좆 같은 뱀이 기어올랐다
소름을 번쩍이며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목아지를 감아 흐느적이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
강남의 등허리를 기어내리고
태초의 낙원
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

적막강산 같은 무덤 속에서
해골뿐인 남자가 비루하게 속삭였다

뱀은 남자의 좆이야
이브의 유혹도 최초의 좆이었지

해골들이 하하 쳐드는 술잔에
뱀의 정액이 넘쳐 흘렀다
도처에 페스트가 들끓고 있었다
강남의 흡혈귀가 조용히 웃었다

놔먹인 땅에 이제 칼과 창이 필요했다
아무데나 기어드는 뱀의 대가리에 
휙 휙 내리치는 해방의 칼
하얗게 빛나는 흡혈귀의 아가리에
쭉쭉 꽂히는 자유의 죽창

                     <‘지배문화, 남성문화’ 제4호(1988). 고정희(高靜熙: 1948~1991)>

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아마데우스’로 두 번이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밀로스 포먼 감독이 연출한 영화 ‘국민 대(對) 래리 플린트 소송’(The People vs. Larry Flynt)에서 저질 포르노 잡지 ‘허슬러’로 떼돈을 모은 주인공 래리는 말한다....살인은 불법이다. 그러나 살인 장면을 찍은 사진을 뉴스위크에 실으면 퓰리처상을 받는다. 섹스는 누구나 하는 합법적인 행위이지만 그걸 잡지에 실으면 감옥에 간다. 섹스와 살인, 어느 게 더 나쁜가?...굳이 래리 플린트의 교묘한 항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포르노처럼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드물다. 포르노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의 뒤쪽 절반을 잘라낸 말로 “인간의 성적 행위의 사실적 묘사를 주로 한 문학·영화·사진·회화”를 말한다. 어원이 “창녀(porno)에 관하여 쓰인 것(graphos)”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ornographos’인데서 보듯 처음엔 호색문학(好色文學)만을 의미했지만 영화나 사진 등으로 개념이 확산되면서 ‘obscence’ 내용을 담은 것들을 총칭하게 됐다. ‘obscence’은 ‘scene(무대) 밖의 것’ 즉 무대에서는 보일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잡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건 옛날 이야기, 성 해방시대가 도래한 지금 포르노를 ‘더럽고 추잡한 것’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은 줄어든 반면 나름대로의 효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에로틱한 심상(心像)을 야기함으로써 심리적 최음제 역할을 한다든지, 가상의 성욕 충족으로 성범죄를 감소시킨다든지, 날이 갈수록 포르노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추세다. 1968년 미국서 19명의 권위자와 20명의 스태프로 ‘외설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위원회’를 발족시켜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로우며, 포르노그래피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것도 그 같은 추세가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198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고정희 시집
'이 시대의 아벨'
섹스에 관한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이중적인 것 같다. 내가 하면 순결한 로맨스, 남이 하면 더럽고 추잡한 짓, 시인들 또한 이중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민주화가 막 꽃 피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페미니즘(feminism)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1980년대 여성 시인들이 섹스를 여성 수탈의 상징으로 매도한 것도 그런 이중적 태도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전남 해남 출신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면서 여권신장운동에 앞장섰던 시인 고정희(高靜熙: 1948~1991)도 그런 ‘부작용’을 전혀 눈치재치 못했던 것 같다. 고정희가 1988년 ‘지배문화, 남성문화’ 제4호에 발표한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를 보면 여성에게 있어서 섹스는 천형 또는 저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기독교 성경의 영향 탓을 감안하더라도, 통상의 섹스라는 게 남녀 쌍방의 합의(?)하에 이뤄진다는 것을 잠시 까먹었다는 듯이, 싫든 좋든 인류는 섹스를 통해 번식한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남성의 쾌락추구로만 매도하고 있음에 페미니즘에만 치우친 나머지 객관적인 균형감각을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페미니즘의 본질을 남성비하나 남성공격으로 착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섹스를 탐하는 남성을 ‘발정하여 낑낑대는 개’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남성의 성기를 ‘말좆 같은 뱀 대가리’에 비유하면서 “아무데나 기어드는 뱀의 대가리에/ 휙 휙 내리치는 해방의 칼/ 하얗게 빛나는 흡혈귀의 아가리에/ 쭉쭉 꽂히는 자유의 죽창”이라고 마감하고 있음에 남성에 대한 섬뜩한 적개심마저 느껴진다. 음습하고 황량한 강남의 술집에서 섹스를 거래하는 인간들이 비루할 따름이지 섹스 자체가 원래 비루한 것은 아니잖은가?! 에덴의 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먼저 따먹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이브였고,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도 금단의 열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걸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신학대학 출신 시인이 섹스를 더럽게 즐기는 사람들보다도 섹스 자체를 죄악시한 데 대해서는 실소가 머금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좆’을 언급하면 페미니즘 운동이 되고 남자가 ‘여자의 xx’를 입에 올리면 외설로 받아들였던 당시 한국사회의 수준도 낯간지럽다. 고정희 시인이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를 발표하고 나서 3년 뒤쯤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던 1991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마광수가 주인공 ‘나사라’가 대학교수 ‘한지섭’과 음란(?)한 성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의 여성잡지 연재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어냈다가 검찰에 구속된 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연세대 교수직에서도 쫓겨났던 필화사건을 떠올리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에서 “성난 남근이 내 팬티를 뚫는다. 아니 뚫는 게 아니라 팬티가 마치 콘돔처럼 남근을 감싸고 나의 성기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팬티가 주는 이질감 때문에 더욱 흥분한다”고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은 음란외설이고 고정희가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목아지를 감아 흐느적이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고 읊은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포장했던 평론가들의 이중적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1994년 일본에서 번역·출간된 ‘즐거운 사라’는 일본에 소개된 한국 소설들 중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가운데 일본 언론과 비평계는 “여성의 주체적 프리섹스를 옹호한 한국 최초의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칭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희를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의 꽃을 피운 시인”이라고 추켜세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즐거운 사라’를 단순한 음란소설로 규정하면서 여성을 비하했다고 호되게 비난했었다. 

화가가 그린 누드화를 보고 성욕을 느끼면 포르노가 되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예술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마찬가지로 시 감상에 관한 한 시는 쓴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이라는 상식 아닌 상식도 다시 곱씹혀진다. 고정희는 시인보다는 페미니스트로서 더 큰 성공을 거뒀던 것 같다. 여성운동가로서의 성취는 존중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가 않다는 말이다. 고정희의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 또한 여러 번 읽어봐도 성욕은 느껴지지 않으므로 포르노는 아닌 것 같고, 기독교 성경 창세기 한 부분을 어설픈 페미니즘으로 풀어쓴 것처럼 보이는 바, 래리 플린트에게 물어봐도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포르노도 아닌 것이 포르노 흉내를 냈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것 같다. 고정희가 여성운동과 시작(詩作)을 분리했더라면 더 훌륭한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을 남기고 더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참고로, 고정희 시인의 시세계 일람을 위해 시집들을 발간연도 순으로 정리해 둔다. 

1979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평민사
1981 <실락원> 인문당
1983 <초혼제> 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6 <눈물꽃> 실천문학사
1987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1989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창작과 비평사
1989 <Sister's We Are the Path and the Light> 둥지
1990 <광주의 눈물비> 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 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 들꽃세상
199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2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 비평사(유고시집)

2017년 3월 15일 수요일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차안(此岸)과 피안(彼岸) 경계에 서서

3월 중순인데도 뉴욕 일원에 폭설이 내려 거리마다 인적이 끊겼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피안처럼 느껴진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아는 것 같기도 하네.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그 사람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그는 내가 여기 멈춰 선 것을 보지 못하리라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그의 숲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네.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내 작은 말은 기이하게 생각하겠지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근처에 농가라곤 한 채도 없는데 멈춰 선 것을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말이야.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말이 방울을 흔들어대네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는 것 같네.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그 밖의 유일한 소리는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안락한 바람과 포근한 눈송이 휩쓸리는 소리뿐.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어, 
But I have promises to keep,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어,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어.


<From The Poetry of Robert Frost, edited by Edward Connery Lathem,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음을 뜻하는 영어 ‘death’의 뿌리는 ‘죽다’라는 의미의 고대 네덜란드어 ‘dood’와 고대 게르만어 ‘tod’로서 생명체의 삶이 끝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죽음을 뜻하는 한자 사(死)는 영어보다는 구체적이다. 살 바른 뼈 알(歺)에 화할 화(化)가 변한 비수 비(匕)가 붙은 것으로서 죽어서 살과 뼈가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끝낸다는 것은 어의(語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죽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도 없다. 누구나 다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유의미한 삶을 꾸려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보다 겸손하게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끝없는 윤회의 한 과정인 인생을 고해로 간주하는 불교에서 열반(涅槃)을 중시하는 것도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이해된다. 열반은 ‘바람 따위가 불기를 멈추다’ 또는 ‘촛불 등을 불어서 끄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으로서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를 말한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은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 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에 속박된 현상 세계를 차안(此岸)이라 하고 열반의 세계를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stopping by woods...'도록(Susan Jeffers, 1978)과 만년의 로버트 프로스트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서서 차안과 피안을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차안에 대한 미련? 피안에 대한 두려움? 슬픔과 아쉬움 아니면 해탈과 순응?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갈 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었던 미국의 국민시인 로버트 L.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도 그랬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학교 교사였다가 언론인으로 변신한 윌리엄 프레스코트 프로스트(William Prescott Frost)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북동부 매사추세츠주 로렌스로 이주하여 성장했던 프로스트가 1923년에 발표한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를 읽다보면 차안과 피안의 차이가 감지된다. 첫 머리를 ‘Whose woods’로 시작한 것은 네 것 내 것 소유권을 다투면서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차안의 삶 대유(代喩), 성가시고 짜증나는 차안의 말방울 소리와 안락한 바람이 포근한 눈송이를 휩쓸어가는 피안의 소리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있음을 본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자작시를 낭송할 정도로 시낭송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날렸던 프로스트는 압운(押韻)의 대가이기도 했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에서도 현란하고도 오묘한 각운(脚韻)이 돋보인다. 제목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에서의 ‘Stopping’과 ‘Evening’, 첫째 연의 know-though-snow, 둘째 연의 queer-near-year, 셋째 연의 shake-mistake-flake, 마지막 연의 deep-keep-sleep-sleep를 의식하면서 다시 한 번 읊조려보라. 시와 음악 사이의 울타리가 무색해진다. 뿐만이 아니다. 1연-2연-3연-4연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각 연의 세 번째 행의 마지막 단어 here-lake-sweep로 고리를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연의 각운 또한 죽음을 의미하는 ‘Sleep’을 선택하여 무성음 P로 마침표를 찍는 정교함에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또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가르친다. 이른 바 ‘불이(不二)’다. 불이는 피(彼)와 차(此)의 분멸(分別)이 없는 것, 인간의 번뇌와 괴로움은 ‘하나(一)’에서는 생기지 않는바 항상 ‘둘(二)’로부터 발생하는데,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넘어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깨칠 때 비로소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즉 둘로 보면 미지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프로스트가 불가의 도를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각운을 이용하여 차인과 피안을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한 것을 보면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오늘의 삶이 더 유의미해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그대에게-자기마저 속이려는 남과 여의 삼바









그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조차 
나의 욕심이라고 깨닫고 
시인하며 
가슴을 털며 돌아서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아니 
진정한 사랑의 조건은 
진실, 
그 하나만으로 족한 것.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혼을 본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보다 무의미한 것이기에 
우선은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

                 <‘홀로서기2-점등인의 별에서’(청하, 1987), 서정윤(徐正潤): 1957년-> 

가 내린다. 이런 땐 언제나 낯선 땅 뉴욕일망정 창밖을 내다보며 x폼을 잡아야 한다. 어젯밤의 자욱한 안개로도 풀어지지 않은 슬픔들이 벌거벗은 나무 가지마다 방울방울 맺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슴 속 이리 저리 흩뿌려지는 추억들, 멀리서 플러싱 가는 7번 전철은 아무런 생각 없이 데그덩데그덩 굴러가고, 유령처럼 모퉁이를 돌아가는 가구점 배달 트럭...새삼 온기가 그리워진다.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다. 그랬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있었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다. 슬픔을 잊으려 사랑하지만, 사랑 때문에 슬퍼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런 남(男)과 여(女)가 반드시 어딘가에 있으리라. 

1966년 스물아홉 살짜리 프랑스 영화감독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도 그런 남과 여를 찾아냈었다. 직접 각본을 쓰고, 핸디카메라로 촬영, 3주 만에 편집까지 마쳤다는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에서 슬픈 추억에 발목이 잡혀 고독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남과 여를 맺어줬었다. 스턴트맨 남편을 잃은 30대의 미망인 안은 딸 프랑수아의 문제로 학교에 갔다가 아내가 자살한 자동차 경주 선수 장을 만난다. 사랑은 거짓말, 파리행 기차를 놓친 안이 장의 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 죽은 남편에 대해 묻는 장에게 안은 남편이 배우이며 가수이자 시인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차창 밖을 내다본다. 추억에 잠긴다.....본능과 고독의 충동에 못 이겨 함께 몸을 섞지만 결국 여자는 남자를 남겨두고 홀로 기차에 오른다. 그러나 여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남자가 역에 먼저 도착해 여자를 기다린다. 여자가 거짓말로라도 자신의 사랑을 충족시키려는 일탈을 불사한 반면 남자는 그런 거짓말의 일탈을 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긴다. 사랑을 확인한다....빨강, 노랑, 청색의 모노크롬 화면과 대사 없이 표정과 동작만으로 상황을 처리하는 등 시적으로 절제된 영상을 프랜시스 레이의 음악이 포근하게 감싼다. 

1987년 청하에서 펴낸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 2- 점등인의 별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는 방식도 다른가? 다른 것 같다.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을 보내면서 문학성보다는 감성에 매달렸던 대구 출신의 시인 서정윤(徐正潤: 1957~ )도 남녀 간의 사랑방식 차이에 대해 꽤나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에 관한 인식의 차이에 무척이나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그 여자의 ‘진실’이 뭔지 확신하지 못해 고뇌하고 있음을 본다.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혼을 본다”느니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고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여자의 진실과 여자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진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독단마저 읽혀진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던 시인 류시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서정윤이 지난 2013년 재직 중이던 대구영신중학교에서 제자 성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벌금 1000만원과 40시간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수강을 선고받은 사건도 ‘사랑의 진실’을 확신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사건이 터지자 서정윤은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약간의 신체적 접촉만 있었을 뿐 성추행은 아니었다”라고 주장했지만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3학년 A양에게 “진학 상담을 좀 하자”며 교사실로 부른 뒤 몸을 껴안고 볼과 입술에 수차례 입을 맞추었는가 하면 “가슴이 얼마나 컸는지 만져 봐도 되나요?”하고 치근댔던 사실까지 까발려져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사춘기 여학생들이 푹 젖어드는 감성적인 시를 계속 써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서정윤이 사랑의 진실에 허기진 남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닌 듯싶다. 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시인이 열댓 살 먹은 소녀와의 성애를 탐했다기보다는 사랑의 진실을 찾지 못하고 방황만 해온 ‘가여운 영혼’의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서정윤 자신이 그의 출세작으로 꼽히는 ‘홀로서기’에서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고 예견(?)했듯이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여자를 찾다가 지친 나머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서정윤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해해주고 싶다. 

남과 여,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여자, 여자의 진실을 갖고 싶어 하는 남자, 인터넷에서 ‘서정윤 시인’을 검색해보면 ‘홀로서기’보다는 ‘여중생 제자 성추행’이 더 많이 떠오르고 있는 지금 한때의 베스트셀러 시인 서정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랑? 진실?....그것도 아니면 아픈 추억을 뒤적이면서 홀로서기? 어느 새 커피가 식어버렸다. 피에르 바슐레(Pierre Bachelet)가 불렀다는 영화 주제곡 ‘남과 여의 삼바’를 다시 듣고 싶다.

2017년 3월 2일 목요일

거대(巨大)한 뿌리- 더러운 역사 속 시인의 정체성 확인

뉴욕 포레스트 힐스 사우스 코압 아파트 정원의 거대한 떡갈나무 뿌리.








거대(巨大)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면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대한 뿌리’(1974년), 김수영(金洙暎: 1921~1968)>


는 누구인가? 사람은 왜 자신의 뿌리에 연연하는 걸까? 1976년 알렉스 팔머 헤일리 (Alex Palmer Haley)가 7대조 할아버지가 1767년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노예로 팔려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6대에 걸쳐 온갖 박해를 견디며 살아온 자신의 가계(家系)를 추적 기록한 세미 도큐멘타리 작품 ‘뿌리(Roots)’를 발표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었다. 미 전역에서 뿌리 찾기 열풍이 불었고, 그 열풍은 헤일리에게 1977년 퓰리처상 및 전미도서특별상을 안겨주었으며, ‘뿌리’를 극화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는 주요도시의 거리를 한산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왜 헤일리는 보통사람이라면 자랑은커녕 숨기고 싶은 자신의 뿌리를 파헤쳤을까? 비천한 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후예라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린 데 대한 창피함은 없었을까? 노예 후손이라는 신분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부린 사람들의 후손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만인평등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확신했기 때문일까? 2001년 전 뉴욕시경국장 버나드 B. 케릭이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였다는 것을 공개하는 회고록을 발표했을 때, 동두천 미군 기지촌 ‘양공주’ 출신 재미사업가 윤경순이 자서전 '나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통해 자신의 참담했던 과거를 고백했을 때, 비슷한 시기 한국 모 재벌의 사생아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벌였을 때도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었었다. 

그런 의문의 자물쇠를 열지 못해 쩔쩔 맬 때 학자들은 정체성(正體性)이라는 유식한 열쇠를 내민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독일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부한 후 미국으로 이주한 정신분석학자 에릭 홈버거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이 주장했던 ‘자기 동일성’(自己同一性, Identity)이다. 에릭슨은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환경과의 교섭을 통하여 새로운 경험을 거듭하게 되므로 생각이나 행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되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자기는 언제나 과거의 자기와 같은 자기이며 또 미래의 자기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었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그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답변하면서, 자기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이 삶이라는 것이었다. 

김수영 시인과 1974년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들도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일제 식민지 한반도에서 태어나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시대의 굴곡을 온몸으로 뒹굴었던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박정희 독재 시절인 1974년 매우 시니컬한 시 ‘거대한 뿌리’를 발표한 것도 자기 정체성 확인을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에미 씹’ ‘개좆’ ‘미국놈 좆대강’ 등 보통사람이라면 입에 올리기 조차 꺼려할 욕설을 내뱉는 자기 비하,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개울에서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는 아낙네들과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증폭시키는 열등감, 동양척식회사-일본영사관-대한민국 관리-미국놈 좆대강을 관통하는 민족의 비애 등등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선언하는 오기가 자신의 ‘거대한 뿌리’에서 나오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 너무나 당당하여 시비를 걸기가 두려울 정도다. 

나는 누구인가? 에릭슨의 통찰을 빌려 말하자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自問)에 대한 자답(自答), 그리고 그런 자문자답은 이 작품의 첫머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가 암시하듯이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 재확인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실제로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기 두 달 전 부산 펜클럽 주최 문학세미나에서 발표한 ‘시(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存在)’를 통해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고 주장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그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답변하면서, 자기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이 삶이라는 에릭슨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시작(詩作)은 끊임없는 자기 확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불이’ 시인의 ‘메멘토 모리’

매사추세츠 보스턴과 케임브릿지 사이를 관통하는 알스톤 리버 사이드의 설경.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민음사, 1974)의 표제시, 고은(高銀):1933 - >


간의 삶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역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의 장군들이 원정에서 개선하여 화려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일 때 노예를 시켜 큰소리로 외치게 한 데서 유래했다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의 의미는 말 그대로 "죽음을 기억하라”,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으로서 박수갈채를 받고 있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고 자신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또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는 시간의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바, 죽음이야말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근년의 고은 시인(사진 왼쪽)과 1974년 민음사에서 펴낸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
전북 군산 출신의 시인 고은<高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은 일찍이 삶과 죽음이라는 게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군산중학교에서 4학년까지 수학한 후 1952년 19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詩作)을 했던 특이한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들 중에는 불교 냄새가 나는 것들이 많다. 그에게 명실상부한 시인의 명함을 쥐어준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의(文義)마을에 가서’도 그 중 하나다. 인적이 끊긴 채 눈만 내리는 문의 마을의 풍광을 불교 수행자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적멸(寂滅), 열반(涅槃)의 세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적(靜寂)과 무념(無念), 작중의 화자 역시 그런 적멸 속에서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며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불교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로 일컬어지는 열반은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함으로써 최고의 정신적 평안함에 놓이는 상태,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이므로 적정(寂靜)을 덧붙여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도 하는데, 열반적정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와 함께 불교 근본교의인 ‘사법인(四法印)’에 속한다. 

불가에서의 해탈은 번뇌를 전제로 한다. 이른 바 불이(不二)다. 고은이 눈에 덮이는 문의 마을의 적막 속에서 죽음을 봤지만 그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본 게 아니라 삶과 연결 지어 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 또한 불이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이라는 구절도 삶도 죽음과 만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그것들이 별개의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의 깨달음을 강조하기 위해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이라고 재차 덧붙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다보면 시적 감흥보다는 깨달음이 먼저 와 닿는 것도 삶과 죽음이 불이라는 불교 교리의 뼈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는 물음은 시구가 아니라 불가의 선문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은은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이를 지향했던 것 같다. 1960년 첫 시집으로 ‘피안감성(彼岸感性)’을 펴낸 데서 보듯 불교의 깨달음으로 시작의 토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유신독재 및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부터는 사회참여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개인적 깨달음이 사회적 깨달음으로 확대됐다고나 할까, 고은 시의 껍데기만 본 사람들은 1986년부터 발표하여 2009년 최종 탈고한 총 30권 4001편 짜리 연작시집 ‘만인보(萬人譜)’와 비슷한 시기 완성된 대서사시 ‘백두산’을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민족의 큰 시인’이라고 추켜세우지만 고은 시의 알맹이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사람들은 ‘문의 마을에서의 개인적 깨달음’이 ‘독재치하에서의 사회적 깨달음’으로 이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토를 달지 않으리라 믿는다. 고은 자신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는 듯이 최근 들어서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과 같은 깨달음의 시로 회귀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은 ‘불이’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우울한 사람들의 동병상련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선집’(산호장, 1955), 박인환(朴寅煥:1926~1956)>

람은 왜 우울(憂鬱)해질까? 의학과 과학이 별로 발전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동서양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했던 것 같다. 근심 우(憂)는 원래 머리 혈(頁)과 마음 심(心)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뒤져서 올 치(夂)가 합쳐진 것으로서 머릿속의 어떤 생각이 마음을 짓눌러 뒤처지는 것을 말한다. ‘우울’을 뜻하는 영어 ‘depression’의 뿌리도 ‘내리 누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primere’다. 그러나 심장도 바꿔치기 하는 요즘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마음의 감기'로도 불리는 우울증에 관해 아직도 ‘당사자의 정신적 의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학자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 발생하는 생리학적·해부학적 문제로서 부정적인 감정은 그런 변화에 따른 결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세로토닌(serotonin)과 멜라토닌(melatonin), 도파민(dopamine),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등 신경과 관련된 여러 가지 호르몬이 우울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뇌를 순환하면서 신경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신경대사물질 세로토닌은 데 감정 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바, 이 물질이 부족하면 감정이 불안정해서 근심·걱정이 많아지고 충동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2배 정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월경 주기를 전후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등 여성 호르몬의 불균형이 뇌를 자극하여 세로토닌 분비에 변화를 야기하는 바, 세로토닌의 농도가 조금만 변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 등 여러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생리 전 불쾌 기분 장애, 산후 우울증, 폐경기 우울증 등등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1941년 4월 3일 울프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1면에 게재한 뉴욕타임스
소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픈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1882~ 1941)도 꽤나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데 이어 190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두 번째 정신 이상증세를 보이면서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선천적으로 정신병(精神病, mental disease)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한 데 이어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한 후에는 ‘항해(1915)’ ‘밤과 낮(1919)’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올랜드(1928)’ 등등을 발표하면서 필명을 떨쳤고 1906년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 중심가 대영박물관 근처의 블룸즈버리(Bloomsbury)에서 소설가 E. M. 포스터, 전기작가 리턴 스트레이치,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버네서 벨과 던컨 그랜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등과 어울리면서 당대의 지성을 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부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등으로 인한 충격을 채 극복하기도 전에 세상에 대한 환멸과 불안과 고독이 그녀의 정신을 짓밟아 눌렀고 평생 우울증과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1941년 3월 28일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우즈 강(River Ouse)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고 만다. 

지금도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한 여류지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래서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가 1962년 브로드웨이 무대 위에서 초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류 지성의 고뇌를 떠올렸지만 기실 그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당초 극중에 1933년 개봉되어 히트 친 디즈니 영화 ‘아기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의 노래 ‘누가 크고 못된 늑대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를 차용하려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자 다른 노래에 ‘the Big Bad Wolf’와 어감이 비슷한 ‘Virginia Woolf’를 넣어 가사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몰랐던 많은 관객들이 ‘Virginia Woolf’라는 이름에 끌려 표를 샀다고 전해지는데, 그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자 1966년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 주연의 동명 영화를 만들어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했다. 우울한 여류지성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계인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이용(?)당한 데 대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생전의 박인환 시인(왼쪽)과 1955년에 펴낸 '박인환 시선집'
우울한 사람은 우울한 사람이 더 잘 이해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사회의 우울한 지성들이 버지니아 울프를 벗 삼았던 것도 그런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항상 우울하여 최면·진정·항경련(抗痙攣) 작용이 있는 페노바르비탈(phenobarbital)에 의존했다는 시인 박인환(朴寅煥:1926~1956)도 버지니아 울프를 꽤나 좋아하여 그녀의 작품을 탐독했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인 ‘목마(木馬)와 숙녀(淑女)’를 읽다보면 그가 버지니아 울프를 짝사랑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작품에서의 키워드들 중의 하나는 목마, 목마는 세상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어른들이 아니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의 놀이도구, 버지니아 울프 같이 여리고 순수한 영혼은 생의 우울과 고독과 허탈감을 수용하지 못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고 말았을 거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작품 중간의 ‘……등대(燈臺)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에 발표한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 )’에서 따온 듯,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자문(自問)에서는 자신 또한 목마를 타고 떠난 버지니아 울프의 뒤를 따라갈 거라는 우울한 예고가 감지된다. 실제로 박인환은 이 시를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페노바르비탈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삶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가? 사람이 우울해져서 삶이 우울하게 느껴지는 건가? 버지니아 울프와 박인환이 환생하여 정신과 의사들과 논쟁을 벌인다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우울증이 버지니아 울프를 잡고 박인환을 잡고 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잡고 있지만 동서고금의 애송시 들에서 우울을 걷어내면 맹숭맹숭하기 짝이 없는바 우울증 또한 삶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 또한 우울할 때 읽어야 제 맛이 나지 않던가?!

2017년 2월 14일 화요일

고한행(苦寒行) - 대장부 큰 뜻을 이루려면

산시성과 산둥성을 가르는 태항산맥. 


苦寒行(고한행)


北上太行山 (북상태행산) 북으로 태항산에 오른다
艱哉何巍巍 (간재하외외) 참 어렵도다, 어찌 이리도 높고 험한가
羊腸阪詰屈 (양장판힐굴) 구절양장 골짜기 구불구불
車輪為之摧 (차륜위지최) 수레바퀴도 안 굴러가는구나
樹木何蕭瑟 (수목하소슬) 수목들은 어찌 이리도 쓸쓸한지
北風聲正悲 (북풍성정비) 북풍 소리가 실로 구슬프구나
熊羆對我蹲 (웅비대아준) 큰 곰은 나를 보고 웅쿠리고
虎豹夾路啼 (호표협로제) 호랑이는 좁은 길에서 울부짖네
溪谷少人民 (계곡소인민) 골짜기엔 사람이 드문데
雪落何霏霏 (설락하비비) 눈은 어찌 이리도 펄펄 날리는지
延頸長嘆息 (연경장탄식) 목을 늘이면 긴 탄식이 나오는데
遠行多所懷 (원행다소회) 멀고 먼 길 소회가 많네
我心何怫郁 (아심하불욱) 내 마음 어찌 이리도 울적한지
思欲一東歸 (사욕일동귀) 마음은 오로지 동으로 가고 싶구나
水深橋梁絕 (수심교량절) 물은 깊은데 다리는 끊어져
中路正徘徊 (중로정배회) 길 가운데서 오락가락하네 
迷惑失舊路 (미혹실구로) 미혹하여 지나온 길을 잃어버렸는데
薄暮無宿棲 (박모무숙서) 날은 저물어 묵을 곳이 없구나
行行日已遠 (행행일이원) 걷고 또 걷는데 해는 이미 기울고
人馬同時飢 (인마동시기) 사람과 말이 모두 배가 고프구나
擔囊行取薪 (담낭행취신) 보따리를 진 채 다니면서 땔나무를 줍고
斧冰持作糜 (부빙지작미) 도끼로 얼음 쪼개어 죽을 끓이네
悲彼東山詩 (비피동산시) 슬픈 저 동산의 시가
悠悠令我哀 (유유령아애) 걱정 또 걱정으로 나를 슬프게 만드네

                                                <조조(曹操; 155년-220년>


람이 뜻을 세우면 ‘고행(苦行)’을 각오해야 한다. ‘고행’은 불교용어로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 산스크리트어 ‘tapas’을 의역(意譯)한 것으로서, ‘tapas’의 원래 의미는 ‘열기’ 또는 ‘열정’이었다. 힌두교 경전 베다가 말하는 고행은 ‘육체의 금욕’과 함께 이루어지며, 고행의 실천은 해탈(解脫)을 위해 신체를 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바, 단식이나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는 요가 등의 수행과 결합했다. 그게 힌두교나 불교 밖으로도 전파되어 일반적으로는 뭔가 하고자 하는 열기와 열정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행을 아무나 하나? 아무리 큰 뜻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칠 때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고통과 고뇌를 겪어야 하나?”라는 한탄이 터져 나올 때가 많다. 그런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가슴 속에 품었던 ‘열기’가 식어버리는 것은 물론 극심한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신의 아들’ 예수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sabachthani?;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는 이야기가 마가복음 15장 34절에 전한다. 또 지금의 고행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도 고행을 중단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하루에 삼씨 한 알과 보리 한 알만을 먹는 등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행을 실천했던 석가모니 또한 그런 극심한 자기학대 고행이 해탈에 이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제자들에게 고행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조의 초상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환관의 후손으로 태어나 적수공권으로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함으로써 훗날의 위(魏)나라 건국의 토대를 구축했던 당대의 영웅 조조(曹操; 155년-220년)도 고행으로 인한 극심한 고뇌에 시달렸던 것 같다. 주변으로부터 간웅(奸雄) 또는 효웅(梟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물론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암살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칼을 쥐고 자면서 ‘몽중살인(夢中殺人)’까지 해야 했던 그는 군웅들이 한 황실 재건을 외치며 덤벼들 때마다 홀로 맞서서 물리쳐야 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袁紹)를 격파한 직후인 건안 11년(서기 206년) 원소를 구하기 위해 거병한 원소의 생질 고간(高幹)을 격파하기 위해 출병했을 때 썼다는 ‘고한행(苦寒行)’을 보면 조조의 고뇌와 번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고독감,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태항산 골짜기에서 겪는 추위와 배고픔....오죽하면 “我心何怫郁(내 마음 어찌 이리도 울적한지) 思欲一東歸(마음은 오로지 동으로 가고 싶구나)”하고 말머리를 돌리고 싶어 했을까? 그러나 말머리를 돌리면 그 즉시 자신의 웅대한 포부도 끝장, 조조는 이를 악물고 태항산을 넘어 고간군을 격파했다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는 전한다. 동쪽으로는 화북평야와 서쪽으로는 산서고원 사이에 위치한 태항산맥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400km에 걸쳐 뻗어 있고 평균 해발은 1,500m에서 2,000m 정도, 산세가 험해 요즘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도 불린다. 산시성(山西省)이나 산둥성(山東省)이라는 지명은 이 태항산의 서쪽과 동쪽에 있다고 해서 생겨났다.

조조가 만난(萬難)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겠지만 대장부로서의 포부와 불굴의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주지하다시피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게 대패하고도 기가 꺾이기는커녕 군세를 정비하여 재기할 정도로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였다. 또 인재를 선발하고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한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평했었다. 시쳇말로 말하자면 그 만큼 통이 컸다는 이야기다. 근대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은 “조조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뒤에 올 시대를 개척한 영웅이며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이었다”며 자신의 마음 속 깊이 감복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토대를 닦은 모택동(毛澤東)은 “조조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조조를 공식적으로 복권시키기도 했다. 또 당대 최고 시인들 중의 하나로 꼽혔던 조조는 두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과 함께 ‘건안삼조(建安三曹)’로 불렸던 바, 그가 지은 시편들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 중 조조의 웅지를 담은 ‘구수수(龜雖壽)’를 참고로 적어둔다. 

神龜雖壽 (신구수수) 신령한 거북이가 비록 오래 산다고 해도
猶有竟時 (유유경시) 언젠가는 죽는 때가 있다.
謄蛇乘霧 (등사승무) 이무기가 안개를 탄다 해도
終爲土灰 (종위토회) 끝내는 흙먼지가 된다.
老驥伏櫪 (로기복력) 늙은 준마는 구유에 엎드려 있으나
志在千里 (지재천리) 뜻은 천리 먼 곳에 있다.
烈士暮年 (열사모년) 강하고 곧은 선비는 만년에 들어서도
壯心不已 (장심불이) 웅대한 포부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盈縮之期 (영축지기) 흥망성쇠의 때는 
不但在天 (불단재천) 하늘의 뜻에만 있지 않도다
養怡之福 (양이지복) 복 받은 기쁨을 키워 나가야 
可得永年 (가득영년) 영원함을 얻을 수 있네
幸甚至哉 (행심지재) 운이 다해 어려움이 닥쳐도
歌以詠志 (가이영지) 노래를 불러 뜻을 기리리라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 - 생명 아닌 생철학 예찬

땅거죽을 뚫고 나온 나무 뿌리.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행문사, 1947), 유치환(柳致環: 1908∼1967)>


명(生命)의 생(生)은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여린 싹의 모양을 그린 것이고 명(命)은 말하고 먹는 구멍 구(口)와 하여금 령(令)이 합쳐진 것, '생'은 이 땅 위에 나와 사는 것 또는 살아 있는 것이고 '명'은 말하고 먹는 것이 내리는 령(지시), 그러므로 생명은 이 땅 위에 나와 말하고 먹으면서 삶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을 뜻하는 영어 ‘life’의 어원도 생명과 비슷하지만 말맛이 약간 다르다. ‘life’는 ‘몸’ 또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는 고대 노르웨이어 ‘lif’로서 ‘살아 있는 존재’를 강조하는 느낌을 준다. 

인간의 삶을 이성으로만 따져서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philosophy of life)’이라는 것도 생겨났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등에 의해 토대가 다져진 생철학은 세상만사를 이성으로만 설명하는 합리주의 철학에 반발하여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했었다. 모든 철학의 화두가 ‘어떻게 사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만큼 서로 다른 철학이라고 해봤자 오십보백보이겠지만 합리주의 계열의 철학들이 지나치게 사변적(思辨的)이어서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등한시한 반면 생철학은 살아 쉼 쉬는 것들의 삶 자체를 직시했었다. 저 유명한 선언적 어록 "생을 생 그 자체로부터 이해한다(Das Leben aus ihm selber verstehen)"라는 말을 남긴 딜타이는 "생만이 모든 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 존재를 단지 표상(表象)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의욕(意欲)을 갖고 정감(情感)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인간 정신구조는 어떤 대상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표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으나, 그런 기초 위에는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의욕이 있으며, 그리고 그 의욕 위에는 가치를 평가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반도의 현대문학사에 ‘생명파’라는 명함을 뿌렸던 사람들이 정말 생명 그 자체를 고귀하게 여겼을까? 아니다. 생명파는 1936년에 발간된 시 동인지 ‘생명부락(生命部落)’에 참여했던 서정주(徐廷柱), 유치환(柳致環), 오장환(吳章煥), 함형수(咸亨洙), 김달진(金達鎭), 김상원(金相瑗), 김동리(金東里), 윤곤강(尹昆崗), 신석초(申石艸) 등등을 일컫지만 시인부락이 통권 2호로 종간된 데서 보듯 이렇다 할 실적도 없었고 그들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면 생명을 노래했다기보다는 생철학으로 포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이 주제가 아니라 소재였다는 말이다. 더욱이 ‘시인부락’ 1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던 서정주(徐廷柱)가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조선인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죽음을 찬미하는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를 발표하고 1980년대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전두환에게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바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생명파’라는 이름을 지워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폄훼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생명파’라는 이름을 잘못 붙여줬다는 말이다. 

청년시절의 유치환(사진 왼쪽)과 1955년 간행된 시집 '생명의 서' 재판본
후대 평론가들이 ‘시인부락’ 참여 시인들에게 ‘생명파’라는 명찰을 만들어 붙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유치환 (1908∼1967)의 작품 ‘생명의 서(書) 일장(一章)’도 생철학의 주장을 운율로 풀어쓴 것 말고는 돋보이는 게 없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는 이성(나의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회의나 삶의 애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생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고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라는 대목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고독을 짧게 간추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생철학을 예찬하는 작품 전편이 생철학자들이 싫어했던 사변(思辨)으로 도배질되어 있는 점도 눈에 거슬린다. 유치환 또한 서정주와 마찬가지로 생명보다는 이념에 흔들려 해방 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 등을 지내면서 민족문학 운동에 앞장섰는가 하면 6·25 때에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순수(純粹)하다. 시의 본질 또한 순수한 감동을 추구하는 데 있는 바, 시를 읽을 때도 포장을 벗기고 순수한 알맹이를 봐야 한다. 붕어 성분이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풀빵을 붕어빵으로 부르는 항간의 관행을 문학에서도 통용시킨다면 붕어빵 독자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