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 처녀 시인의 당돌한 사무사(思無邪)

롱아일랜드 동쪽 끝 오리엔트 포인트의 조약돌길. 천명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면 길거리의 작은 돌멩이들에서도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는 디킨슨의 관찰에 동의한다.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              저 작은 돌은 얼마나 행복할까 
That rambles in the road alone,          길에서 혼자 노닥거리네, 
And doesn't care about careers          출세 따윈 걱정 안하고 
And exigencies never fears;               급한 일로 두려워하지도 않네;
Whose coat of elemental brown         천연의 갈색 코트는 
A passing universe put on;                 지금의 이 우주가 입혀준 것;
And independent as the sun               태양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서 
Associates or glows alone,                함께 어울리거나 혹은 홀로 빛나거나,
Fulfilling absolute decree                   순전(純全)한 천명을 이행하네 
In casual simplicity.                          스스럼없는 질박함 속에서      
                                          
                                                                         <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년-1886년> 

대 중국 최초의 시가집 ‘시경(詩經)’을 편찬했던 공자(孔子)는 “시 3백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말했었다. ‘詩經’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詩’를 파자해보면 말씀 언(言)에 절 사(寺)로 나눠지는데, ‘寺’는 발 지(止)와 손 우(又)가 합쳐진 것으로서 ‘마을’ ‘관청’을 뜻하다가 ‘모시다’라는 의미가 추가되었으나, 후한 이후 불교가 전래 된 이후 ‘절’을 뜻하게 됐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시경’이 후한 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편찬된 것임을 감안할 때 ‘詩’는 원래 ‘말로 모시다’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일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바, 시는 진실만을 말하여 모시는 것이라는 행간이 읽혀지고, 공자가 ‘사무사(思無邪)’를 말했던 것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는 사특함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또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로 옮긴 것(詩言志)”라는 말이 나오는데, 뜻 지(志)는 원래 발 지(止)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것으로서 ‘행동이나 말로 하고자 하는 것’을 뜻했던 바, 거기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공자가 환생하여 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년-1886년)의 시를 읽는다면 ‘사무사’라는 감탄을 연발할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순진무구(純眞無垢) 그 자체다. 시어로 선택한 어휘들도 흡사 길거리의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시 전편을 굴러다니며 소리를 낸다. 천진난만한 심성을 타고나지 않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이미지와 소리를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그걸 원고지에 옮겼던 디킨슨은 55세로 타계할 때까지 결혼도 거부한 채 은거하면서 시 쓰기에만 전념했던 ‘영원한 처녀’였다. 1800편에 가까운 그녀의 시 가운데 생전에 발표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의 사후 그녀의 동생이 시집을 낸 후 천재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세상과 거리를 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영원한 처녀’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건 자연이었고, 그 자연 속에서 순진무구한 영혼으로 인간의 사랑과 죽음과 이별을 노래하면서,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었다. 디킨슨이 '자유시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과 함께 19세기 미국 시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자연과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타고난 천재성으로 순진무구한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던 탓이 아닌가 한다. 디킨슨과 휘트먼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미국정서를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의 시는 청순한 처녀애가 곱게 접어놓은 손수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깔끔하다. 시를 다듬고 포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통찰과 감정을 싱싱하게 드러내면서도,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한편,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당돌함과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How happy is the little Stone’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다. 길거리의 하찮은 돌멩이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직관도 놀랍거니와, 그 돌멩이의 이미지(coat of elemental brown)를 자신이 속한 ‘현재의 우주(A passing universe)’로까지 확장시켜 놓은 후, ‘순전한 천명(absolute decree)’을 수용하고 있음에 질박하면서도 순수한 디킨슨의 심성이 절로 느껴진다. 영어 ‘decree’의 뿌리는 ‘결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cernere’다. 타고날 때 하늘이 결정해준 운명을 말하는 바, 자연에 귀의한 한자문화권의 시인들이 ‘순응(順應)’을 삶의 지표로 삼았듯이, 디킨슨 또한 19세기 당시 미국의 전원에서 꽃피웠던 초월주의(Transendentalism)에 심취하여 ‘absolute decree’을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행복 추구의 지름길이요 자연에의 귀의(歸依) 완성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초월주의는 직관적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내재하는 신성 및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망라하는 관념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립 이후 미국 특유의 역사적․문화적 토양에서 필연적으로 자생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시의 매력은 당돌함에 있다. ‘당돌하다’는 것은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올차고 다부진 것”, 마음에 구김살이나 두려움이나 욕심이 있으면 나타나기 어려운 바, 돌멩이를 이 우주의 중심인 태양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디킨슨의 당돌함에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이 작품 속의 ‘돌멩이(the little Stone)’가 디킨슨 자신의 삶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돌멩이의 당돌함은 디킨슨 자신의 심성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을 표출한 것이라고 하겠다. 노처녀 시인의 당돌한 순수, 욕망으로 뒤범벅된 세상이 지저분하다고 느껴질 때 읽어보고 싶은 시들 중의 하나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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