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5일 화요일

Brahma - 나에게도 ‘신성(神性)’이 있다


Brahma (브라흐마) 

If the red slayer think he slays,             피에 굶주린 살인자가 살인한다고 생각하거나, 
Or if the slain think he is slain,              혹은 살해당하는 자가 살해당한다고 생각하면, 
They know not well the subtle ways     그들은 미묘한 방법들을 잘 모르는 것, 
I keep, and pass, and turn again.         내가 존속하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그 오묘한 법을. 

Far or forgot to me is near;                   내게는 먼 또는 잊혀진 것이 가까운 것; 
Shadow and sunlight are the same;       그림자와 햇빛은 동일한 것; 
The vanished gods to me appear;         사라진 신들이 내게 나타나고; 
And one to me are shame and fame.     내게는 수치심과 명성이 하나. 

They reckon ill who leave me out;         그들이 나를 내팽개친다면, 잘못 생각한 것; 
When me they fly, I am the wings;        그들이 내 위를 날아갈 때, 나는 날개; 
I am the doubter and the doubt,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자 의심, 
And I the hymn the Brahmin sings.        나는 브라흐민이 노래하는 찬송가. 

The strong gods pine for my abode,      강한 신들도 내 거처를 동경하고 
And pine in vain the sacred Seven;        헛되이 일곱 성인들도 그리워한다. 
But thou, meek lover of the good!         그러나 그대, 온순한 선 애호가여! 
Find me, and turn thy back on heaven.  나를 찾고, 천국에 등을 돌려라.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1882년> 

이 세상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자신이 경험하고 또 사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 인간의 한계(限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고이래의 숱한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도 그런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의 장자(莊子)가 ‘장자’의 첫 머리 소요유(逍遙遊)에서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북명(北冥)의 물고기 곤(鯤)이 등의 넓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붕(鵬)으로 변해 남명(南冥)으로 날아갈 때 파도가 삼천리나 솟구친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또 불가(佛家)에서 천인(天人)이 3년마다 한 번씩 내려와 천의(天衣) 자락으로 둘레가 40리나 되는 큰 바위를 스치고 올라가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반석겁(磐石劫)이라고 부르는 등 인간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무량수(無量數)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것도 인간의 상상으로도 이해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처녀가 애를 밴다든지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믿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예수에게 귀의할 수 있다고 권면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근대국가로 발돋움 하던 미국의 전환기에 나타난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라는 것도 인간의 한계 극복 노력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신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신에게 떠맡기던 인간이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자립을 시도했고, 인간의 이성적 직관을 중시하는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 또는 인간의 감각으로 수용하여 축적된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노력해보았으나 그래도 뭔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았기에, 초월적 신성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초월적인 존재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게 초월주의였다. 자연이 초월적인 신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인간 또한 그 자연 및 신성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머슨 시선집,  2004년
하버드 대학출판부
초월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7대에 걸쳐서 성직(聖職)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 출신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1882년)에 의해 물꼬가 터졌다. 그 이전 개신교의 교리가 인간을 ‘죄인’으로만 몰아 세웠던 반면, 하버드 대학 신학부 출신 에머슨은 교인들의 영혼을 옥죄는 교회의 편협한 종교적 독단과 형식주의를 강력하게 비난했던 바, 1829년 개신교회 유니테리언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로 부임했으나 교회가 반발하여 1832년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835년 귀국한 에머슨은 산업혁명 후 급격히 확산된 물질문명을 혐오하여 자연 속에서 사색을 쌓아 시와 수필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철인(哲人)’이라는 칭송과 함께 당시의 미국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36년에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저술 <자연(Nature)>은 개인의 직관으로 얻어진 지식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인간도 신성의 일부이므로 양도할 수 없는 개인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여 미국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머슨의 초월주의는 인도 등 동양사상에 영향 받은바 크다는 게 중론, 그의 시 ‘브라흐마(Brahma)’도 그런 증거들 중의 하나다. ‘범천(梵天)’이라고 한역(漢譯)되는 ‘브라흐마’는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의 신, 낮에 43억 2천만년 동안 지속되는 우주를 창조하고 밤이 되어 잠이 들면 그 우주가 그의 몸으로 흡수되는데, 이 과정이 브라흐마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고 전한다. 기독교 출신의 에머슨이 기독교의 여호와 대신 힌두교의 ‘브라흐마’를 시의 소재로 삼은 것은 여호와나 브라흐마나 이름만 다르고 믿는 사람들만 다를 뿐 기실은 동일한 초월적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가교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에머슨의 ‘브라흐마’는 여호와로 환치해도 무방할 뿐만 아니라, 종전의 기독교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피조물인 인간을 분리하여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반면 에머슨은 인간에게도 신성(神性)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본다. 

시의 가장 큰 목적은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에머슨의 ‘브라흐마’는 ‘좋은 시’는 아니다. 혹평을 하자면 시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종교관을 시적 운율에 맞춰 풀어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에머슨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더 큰 대접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줄기차게 읽히면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시가 인간의 감성(感性)보다는 영성(靈性)을 파고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 바, 시가 그런 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혹평을 삼가야할 것 같다. 왜? 에머슨의 그런 시작(詩作)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등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후배 시인들의 작품은 에머슨 이전 시인들의 작품들 못지않게 많은 독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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