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베어마운틴 정상에서 바라본 허드슨 강 상류. 유사 이래 강은 인간을 품어줘왔지만 아직까지도 인간은 강을 품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 |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1982년 ‘21인 신작시집’(창비), 김용택(金龍澤); 1948년- >
강(江)과 하(河)의 차이는? 물이 흘러갈 때 강(江)은 물길이 곧아서[工] ‘工工工...’ 소리를 내고 하(河)는 물길이 굽어서[可] ‘可可可...’ 소리를 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우스개로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원래 강은 장강(長江) 즉 양자강(揚子江)을 가리키고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강남(江南)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말은 겨울이면 기후가 온화한 양자강 이남으로 날아간 제비가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이면 양자강 이북으로 돌아온다는 말이고 “백년하청(百年河淸)”은 “흙탕물인 황하가 언제 맑아지겠느냐”는 의미다. 또 중국서 ‘하북(河北)’은 ‘황하의 북쪽’을 가리키는 바, 하북의 베이징(北京) 인근 숲 속에서 70만 년 전부터 20만년 전까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일종인 ‘베이징 원인(北京原人)’의 화석이 발견된 데서 보듯, 이 지구상에서 일찍부터 강을 끼고 형성된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다.
강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바다 또는 호수 그리고 또 다른 강으로 흘러가는 경로’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체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고 또 숱한 민물고기들을 품어 예로부터 인간의 삶과 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구 북반부의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금과옥조로 삼은 것도 찬바람을 막아주는 산과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물을 고루 갖춘 곳이 명당이기 때문이었던 바, 황하 문화권에 속한 한반도 사람들 또한 산과 강 사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는 것은 주지의 상식에 속한다. ‘생명(生命)의 젖줄’이라는 표현도 그래서 생겨났거니와 한자문화권에서 유난히 많은 시인들이 강을 시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김용택의 섬진강 연작시 모음 시집 '섬진강'(창작과비평사)과 김용택이 글을 쓰고 황헌만이 사진을 찍은 '꿈꾸는 섬진강'(삼성당) |
섬진강(蟾津江) 연작시로 필명을 날려 ‘섬진강 시인’으로도 불리는 전라북도 임실군 출신 시인 김용택(金龍澤; 1948년- )이 평생 섬진강을 노래해온 것도 섬진강이 자신의 삶의 뿌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를 굽이쳐 흐르다가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의 길이는 212.3 km, 유역면적은 4,896.5 ㎢, 전라남북도 전체 면적이 2만여 ㎢이므로 전라도의 약 25%를 섬진강이 적셔주고 있는 셈이지만 시인 김용택이 보기에는 강물 못지않게 눈물 또한 넘쳐흘렀던 것 같다. ‘섬진강 1’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시의 전반부는 어머니 품 속 같은 섬진강의 생명력을 찬미한 반면 후반부는 수탈과 소외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고 있음을 본다. 당시 이 시가 그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한을 남긴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발표된 데다가, ‘전라도 실핏줄’ 또는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라는 등의 직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은 데서 보듯, 박정희 독재의 지역편중 개발로 인해 소외당하고 차별당해 온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표출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김용택 본인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고개를 흔들지 모르지만 그렇게 읽혀질 수도 있다는 것만큼은 지금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쉽다. 시적 감동의 보편성을 확대하지 못한 한계가 느껴진다. 좋은 말로 하면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 대변이겠지만 나쁜 말로 하면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의 한풀이 냄새가 풀풀 난다. 그걸 민중의 한풀이였다고 우기면 더 할말이 없지만.
오늘도 섬진강은 흐른다. ‘섬진강 시인’ 김용철의 ‘섬진강’ 또한 누군가에 읽혀지고 또 읽혀지고 있으리라.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30여년이 지난 지금 섬진강의 ‘흐름’과 ‘읽혀짐’이 잘 어우러지지는 않는 것 같다. 박정희 독재가 정권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치졸한 지역편중 개발과 인사로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지금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독재 쓰레기 세력에 빌붙어 단물이나 빨아먹고 사는 온라인 카페나 일부 언론들이 그 지역 사람들을 ‘홍어족’이니 ‘빨갱이’니 차별하고 폄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섬진강 1’이 그런 차별과 소외의 서러움도 강물에 실어 떠내려 보내고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까지 품어줬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모여 흐르는 섬진강이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왔다면 섬진강 또한 일찍이 노자(老子)가 설파했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도(道)를 따라 흘러왔을 터,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른다(處衆人之所惡)”는 말이 자꾸 곱씹혀져서다.
어쨌거나, 김용택의 ‘섬진강 1’은 강은 인간을 품어주지만 인간은 강을 품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작품이었다. 지금의 김용택 본인 또한 ‘섬진강’의 품에 안겨 자신의 시작(詩作)이 변모해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리라. 30여년 전 자신의 필명을 알린 ‘섬진강 1’이 분노와 한을 떠내려 보내던 강이었다면 이후의 ‘섬진강’들은 사람을 품어주는 섬진강으로 변해갔었다. 어머니, 누이, 강변의 아이들, 오래된 마을, 오고가는 사람들...환갑을 넘긴 그의 시작이 원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섬진강의 품에 안겨 살다보니 섬진강을 닮아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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