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7일 금요일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very impressive’한 애국가 제창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때 계엄군들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소년에게 총을 겨누며 신문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1974년 개봉한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계엄군에게 신문 당했던 그 소년이 극장에 갔다면 영화 상영 전 애국가를 경청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황지우(黃芝雨); 1952년- > 

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들 중의 하나가 ‘아이러니(irony)’다. ‘irony’의 어원은 ‘위장(僞裝)’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ironeia’로서, 시쳇말로 하면 빈정거림이고 수사적으로는 어떤 낱말이 표면의 뜻과는 반대로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미국인들이 꼴불견을 봤을 때 ‘very impressive(매우 인상적)’이라고 비실비실 웃는다거나 윗사람이 매우 멍청한 짓을 하면서 억지로 아랫사람의 동의를 구할 때 “매우 현명한 결단을 내렸다”고 말하는 것 등등 일반적으로 진의(眞意)와 반대되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한국어로는 ‘반어법(反語法)’이라고 한다. 아이러니를 구사하려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는 바, 지적인 날카로움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기지(wit, 機智)와 통하고, 간접적으로 비난한다는 점에서는 풍자(satire, 諷刺)와도 가깝다. 그래서 아이러니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거나 상대방과 얼굴 붉히면서 다투고 싶지 않을 때 많이 나타난다. 목소리 큰 놈이 판치던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무지를 깨우쳤던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Socratic irony)’가 좋은 예다. 

한국의 ‘애국가(愛國歌)’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안창호(安昌浩) 또는 윤치호(尹致昊)가 작사한 것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부르다가 1935년 안익태(安益泰)가 지은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Symphonic Fantagia KOREA)’으로 대체한 것이라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 ‘한국환상곡’이 한국서는 1961년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기념 음악회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에 의해 처음 연주됐고, 작사자나 작곡자 모두 친일부역자로 밝혀져 말들이 많다. 외국인 또는 비애국자가 만든 노래를 애국가라고 부르는 셈이다. 윤치호는 이토 지코(伊東致昊)라고 창씨개명을 한 후 일제의 귀족원 의원 및 일제의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 고문으로 활동했었고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안익태 또한 유럽 체류 시절 당시 대일본제국의 관변 단체 ‘일본-독일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 건국을 축하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하는 등 일제 부역 사실이 까발려져 둘 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었다. 그런 노래를 국민들에게 애국가로 부르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박정희(朴正熙)가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애국가 제창을 강요한 것도 ‘very impressive’하다. 일제에 충성 맹세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창씨개명한 박정희의 일본 이름)가 애국심을 강요했다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거니와, 안인숙과 신성일이 벌거벗고 누워 “경아,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 주세요”라고 코맹맹이 소리로 속삭이는 ‘불륜’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차렷 자세나 가슴에 오른손을 얹은 자세로 애국가를 경청하는 모습이야말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블랙 코미디였다는 것을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을 획책했던 박정희만 몰랐던 것 같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 개봉)의 메가폰을 잡았던 이장호(李長鎬) 감독은 표현의 자유가 말살된 당시 은근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면서도 흥행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바, 그 영화를 통해 티 없이 맑고 착한 품성을 가진 아가씨 경아의 인간성이 어떻게 망가져 자살에 이르는 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림으로써 한국 영화계의 거목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은 관객들이 드러내놓고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경아의 ‘불륜’을 동정하고 공감한 것 또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였다. 또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측근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한 후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한 전두환이 또 다시 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데 반발하여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이 벌어졌을 때 애국가를 부르는 시위대를 향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국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국민들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한 비극적 아이러니의 극치로 남아있다.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3년 문학과지성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재학 시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어 제적당했던 황지우(黃芝雨, 본명 黃在祐; 1952년- )가 1983년에 발표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도 그런 ‘very impressive한 아이러니’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황지우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한 후 1983년에 펴낸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펴내고 그 해 제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시적 감동보다는 현실 비판에 더 치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등 그의 작품 다수가 아이러니 덩어리이고 풍자 반죽인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이거니와, 그가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에 임명됐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자칭 보수 세력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쫓겨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것은 그의 현실 비판이 생경함을 극복하고 시의 경지로까지 올라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좋은 예다. 애국가를 경청하는 극장 안 관객 떼[群]와 을숙도 갈대숲을 이륙하는 새떼를 함께 연상시켜놓은 후, 말만 삼천리 화려 강산일 뿐 자유를 억압당한 대한민국을 떠나는 새떼와 애국가가 끝나면 각기 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관객 떼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화자(話者)의 울분을 공유하게 만들고 있음을 본다. ‘총칼로 윽박지르는 독재국가’를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고 노래 부를 수밖에 없는 대한 사람들이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하고 주저앉는 대목에서는 처절한 체념마저 느껴진다. 

조선을 착취한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고 군부 독재자들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한 사람들이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고 노래 부르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마침표를 찍을지 한숨이 길게 이어진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부 하부 조직책’으로 암약하다가 들통 나 무기징역까지 언도받았는데도 박정희 세력은 김대중 등 박정희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였고,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 기념관이 들어선 데 이어 중구청까지 3백억원을 들여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모의했던 신당동 집을 중심으로 기념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수천억을 부정 축재한 전두환의 아들이 조세도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게 까발려져 검찰이 은닉재산을 환수하겠다고 나섰건만 전두환 고향 합천군에선 전두환 아호로 명명한 ‘일해공원(日海工園)’이 문을 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박정희 이래 전두환․노태우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군부독재의 단물을 빨아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를 외치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이 혹여 밥 대신 아이러니를 먹고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과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는 게 과연 애국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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