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chai ,Salutation, 2013 |
Salutation(인사)
O generation of the thoroughly smug 오 진짜 점잖은 족속
and thoroughly uncomfortable, 그래서 진짜 불편할 거야,
I have seen fishermen picnicking in the sun, 어부들이 햇볕 아래 소풍하는 걸 봐왔네,
I have seen them with untidy families, 그들이 지저분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봐왔네,
I have seen their smiles full of teeth 이빨을 완전히 드러내고 웃는 걸 봐왔네
and heard ungainly laughter. 품위 없는 웃음소리도 들어왔지.
And I am happier than you are, 그래서 난 당신들보다 행복해,
And they were happier than I am; 그 사람들은 나보다도 행복했어;
And the fish swim in the lake 호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and do not even own clothing. 옷조차도 입지 않네
<1913년, Ezra Pound; 1885년-1972년>
인간사회의 계층구조를 피라미드에 비유한다면 자유와 행복은 꼭대기에 있을까? 밑바닥에 있을까? 20세기 초 모더니즘(modern) 시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는 밑바닥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향할수록 자신을 격식과 품위로 옭아매야 하지만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남의 눈치 안 보고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어 행복감이 더 커진다는 관찰이었다. 그래서 쓴 게 ‘인사(Salutation)’라는 짤막한 시다. 여기서의 ‘Salutation’은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목례나 손 흔듦이 아니라 신사복에 중절모를 쓴 ‘진짜 점잖은 족속’이 중절모를 살짝 벗는 시늉을 하면서 표시가 날 듯 말 듯 목과 허리를 숙이는 인사, 그 인사를 제대로 하려면 두 발과 다리의 모양새뿐만 아니라 눈길을 주는 방향도 잘 잡아야 하는 등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지 않으면 익히기가 어려운 바, 더운 날에도 신사복에 하얀 와이셔츠 받쳐 입고 품위 있게 인사를 한다는 게 그 얼마나 불편하겠느냐는 것이다. 반면 피라미드 아래쪽에 위치하여 남의 시선을 의식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되레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부분이 있다. 품위 따지는 사람들은 위아래 이빨들을 활짝 드러낸 채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정작 그들이야말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이 아닌가?!
젊은 시절의 에즈라 파운드 |
그렇다고 해서 파운드의 ‘Salutation’을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에 대한 단순한 빈정거림으로만 보면 안 된다.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을 꼭대기에 올려놓고 그 아래에 ‘지저분하고 교양 없는 어부 가족들’을 배치한 후 맨 아래 옷 조차도 없는 물고기들이 알몸 그대로 헤엄치게 만드는 피라미드 구축 의도를 간파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만다. 파운드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의 미국은 민주주의 사회이기는 했지만 영국식 예의범절과 격식과 품위를 중시하는 소수의 ‘진짜 점잖아서 불편한 족속’이 다수의 ‘지저분하고 품위 없는 서민가족’을 깔보는 분위기가 역력했던 바, 파운드가 ‘Salutation’을 쓴 것은 그런 위선적인 분위기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으며, 자신이 평소 가슴에 품고 있었던 휴머니즘(Humanism)의 표출이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게 뭔가? 인간을 전통(傳統)과 관습(慣習)과 종교(宗敎) 등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답게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자는 주장 아닌가? 14~16세기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인식을 촉구하는 문예부흥(Renaissance)이 인간세상을 기독교의 신이 지배했던 중세의 종언을 고한 이래, 17~18세기 자연과 역사의 영역에서 인간의 합리적인 자율성을 추구했던 계몽주의가 18세기말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준 데 이어, 그게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실존주의를 거쳐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등으로 분화됐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에즈라 파운드가 주창했던 모더니즘 역시 휴머니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에서 휴머니즘이야말로 그의 시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Salutation’에서도 파운드는 ‘나(I)’와 ‘그리고(And)’를 강조한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고’로 연결되는 인간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바, ‘나’와 ‘인간사회’의 소통의 제스처인 ‘인사’를 통해 무엇이 더 인간적이고 인간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햇볕 아래서 소풍하는 어부 가족들을 ‘봐왔다(have seen)’고 쓴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인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And’ 다음에 ‘I am happier than you are’와 ‘they were happier than I am’의 단정적인 표현을 쓴 것은 나의 판단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며, 그런 판단에 대한 결언 및 증거로 덧붙인 ‘the fish swim in the lake/ and do not even own clothing’에서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나 미래시제가 아닌 진리나 보편적 사실의 무시제(無時制)를 사용한 것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파운드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구속하는 그 어떤 가식이나 격식을 거부하면서, 인간이 본성대로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사회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주시하면서,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시를 썼다. 파운드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모티프를 얻어 ‘현대판 신곡’을 목표로 썼다는 저 유명한 미완성 서사시(敍事詩) ‘칸토스(The Cantos)’의 첫 편의 첫머리 ‘And then went down to the ship’를 ‘그리고(And)’로 시작한 것도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이전’ 또는 ‘인류의 처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고 보면, 파운드의 시작(詩作)은 곧 휴머니즘의 천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정치경제사회 제반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시작에 반영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반전활동을 벌이다가 반미(反美)로 몰려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시라는 게 어떤 형식으로든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고 보면 에즈라 파운드의 모더니즘 시 운동이나 사회참여 시작(詩作)에서 요즘의 시인들이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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