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순간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폭발하듯 퍼지는 햇빛. 찰나의 시상도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고은의 시 짓기를 닮은 것 같다. |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2001년 ‘순간의 꽃’ 문학동네, 고은(高銀); 1933년- >
‘찰나(刹那)’라는 게 있다. 원래는 산스크리트어 ‘ksana’를 음역한 불교 용어였다. ‘대비파사론(大毘婆沙論)’이라는 논소(論疏)를 보면 1주야(晝夜)는 30수유(須臾), 1수유는 30랍박(臘縛), 1랍박은 60달찰나(怛刹那), 1달찰나는 120찰나(刹那)라고 정의되어 있으므로 1주야를 24시간으로 잡아 계산하면 1찰나는 1/75초에 해당한다. ‘대비파사론’에는 그게 어느 정도 짧은 순간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2명의 성인남자가 여러 가닥의 명주실을 팽팽히 잡아당기고 또 다른 성인남자가 잘 드는 칼로 그 실을 단번에 자를 때 1가닥을 자르는데 64찰나가 경과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으나, 그건 부처님 말씀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목탁 두드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바, ‘찰나’의 개념을 도입한 진짜 의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생멸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찰나생멸(刹那生滅)·찰나무상(刹那無常)이므로 집착(執着)하지 말라”는 깨우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찰나’의 상대적인 개념이 ‘겁(劫)’이다. ‘겁’ 또한 산스크리트어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줄임말, 불교의 뿌리인 힌두교에서는 “우주창조의 신인 브라흐마(Brahmā)의 하루에 해당하며, 1칼파는 43억 2천만년”이라고 설명한다. 그게 어느 정도 긴 시간인지 감을 못 잡는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불제자들은 또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사방 40리 성안에 개자 씨를 가득 넣은 후 선인(仙人)이 3년에 한 개씩 가져가 다 없어지는 시간을 뜻하는 개자겁(芥子劫), 사방 40리 바위 둘레를 선인이 3년에 한번씩 천의(天衣)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뜻하는 불석겁(拂石劫) 또는 반석겁(磐石劫),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이 우주의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을 갈아 먹(墨)을 만든 후 동방(東方)으로 일불국(一佛國)을 지날 때마다 일점식(一點式) 떨어뜨려 마침내 그 먹물이 다한 다음 지나온 불국토를 미진(微塵)으로 만들어 또 천국토(千國土)를 지날 적마다 일점식 투하하고 또 다시 지나온 모든 세계를 분말로 만들어 일진(一塵)을 일겁(一劫)으로 계산한 진묵겁(盡墨劫) 등등. 그러나 그걸 헤아린다는 것 또한 무의미한 도로아미타불, 기실은 인연(因緣)이라는 게 그만큼 끈질기고 오래 이어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과장법에 지나지 않는다. 일례로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인연(因緣)’이라는 말 속의 인연은 무려 500겁이나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찰나의 인연이 수천수만 겁 동안 이어진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시인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찰나의 시상(詩想)이 문자화(文字化)됨으로써 천년이고 만년이고 읽힌다는 점에서는 시(詩)도 인연을 닮았다. 전라북도 옥구 출신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한 이래 시작에 전념해온 고은(髙銀; 1933년- )의 시들 중 상당수에서 찰나의 인연과 그에 대한 깨달음이 감지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혹자는 고은의 문학적 성향을 1974년의 ‘문의 마을에 가서’를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누면서, “그 이전의 시들은 허무와 절망과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반면 그 이후의 시들은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투쟁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말하지만, 고은의 시작(詩作) 기법이 긴 시간 동안 갈고닦는 ‘점수(漸修)’보다는 번득이는 시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돈오(頓悟)’에 더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그런 구별이 무의미해 보인다. ‘문의 마을에 가서’도 그렇다. 겨울 문의에 가서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보고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퍼뜩 떠올린다.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투옥된 후 감방에서 구상한 이래 25년만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그의 대표작 ‘만인보(萬人譜)’ 또한 고은 자신이 만난 인물들에 대한 찰나(한시적 공간)에 포착한 이미지들을 읊은 것이지 해당 인물들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시집 '순간의 꽃' 2001년 문학동네 |
찰나의 시상을 긴 여운으로 남기려는 고은의 시작 경향은 2000대 들어 더욱 짙어진 것으로 보인다. 2001년 4월 펴낸 ‘순간의 꽃’은 그런 성향이 절정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불가의 선시(禪詩)처럼 최소의 말로 최대의 울림을 이끌어내려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극치를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미니멀리즘이 고은의 독창은 아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modernism)이 발흥한 이래 1960-70년대에 이르러서는 잡다한 기교와 군더더기 설명을 생략하면서 핵심에 근접하려는 미니멀리즘이 시각예술과 음악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여 문학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었다. 모더니즘의 선구자격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2년-1972년)가 이미 1913년에 발표한 단 두 줄짜리 명시 ‘메트로의 한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를 보자.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군중(群衆) 속 얼굴들의 출현;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젖어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파운드가 펜실베이니아와 뉴욕에 머무를 때 시상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극히 절제된 언어로 대도시 근로자들의 삶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바, 대도시 서민교통 수단인 지하철이나 전철 정거장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흑인 등 육체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얼굴을 젖은 꽃잎에 비유함으로써 생동감 넘치는 한 장의 클로즈업 사진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은의 ‘짧은 시’들을 에즈라 파운드의 ‘짧은 시’ 아류(亞流)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파운드 등 다른 이미지스트들이 주로 이미지 환기에 의지했던 반면 고은은 이미지 환기에 관계없이 찰나의 깨달음을 찾았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그 꽃’의 경우에도 색조나 모양은 전혀 포착하지 않고 ‘내려갈 때’와 ‘올라갈 때’ 그리고 ‘보았네’의 순간[찰나]만 언급하고 있을 뿐인데, ‘내려갈 때’의 찰나 속에는 “욕망을 포기하고 내려간다”는 순응과 체념이 가득 차 있는 반면 ‘올라갈 때’의 찰나 속에는 “욕망 충족을 위해 올라간다”는 도전과 집착이 가득 차 있음이 그 시를 읽는 찰나에 느껴지거니와, ‘올라갈 때’가 아닌 ‘내려갈 때’ 무념무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그 꽃을 보았네’라는 찰나 속의 깨달음 또한 긴 여운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게 고은이 시인이기 이전 승려로서 불도에 정진할 때 깨친 것인지 시작의 연륜이 쌓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순간의 꽃’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눈 깜박일 순(瞬) 사이 간(間) 즉 찰나에 스쳐가는 시상을 최소한의 언어에 담았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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