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1일 화요일

가재미 - 영혼을 정화하는 ‘가난’의 눈물

롱아일랜드 시티 흑인 거주지역에서 본 벽화. 가난은 남보기에 초라한 것이지만 인간의 영혼을 말끔하게 정화하는 눈물일 수도 있다.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2004년 ‘현대시학’, 문태준(文泰俊); 1970년- > 

국서는 몸이 납작하고 두 눈이 오른쪽에 붙어 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가자미’라고 한다. 가자미의 눈이 한쪽으로 쏠리고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른 것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적응(適應)의 결과다. 가자미는 습관적으로 한쪽 면으로 엎드려 휴식을 취하는 육식성 저서생물(底棲生物)로서, 막 부화되었을 때는 여느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머리 양측에 눈이 한 개씩 달려있으나, 점점 자라면서 위험이 닥칠 때마다 모래나 진흙 속에 몸을 숨기는 습성이 몸에 배어감에 따라 왼쪽 눈이 머리를 돌아 오른쪽 눈에 들러붙고, 바다 밑바닥으로 깔아 햇볕을 덜 밭은 쪽 즉 눈이 없는 무안측(無眼側)은 흰색으로 남아 있는 반면 바다 수면을 향해 햇볕을 받은 쪽 즉 눈이 있는 유안측(有眼側)은 갈색 등의 색조를 띤다. 그렇듯 새끼와 어미의 모습이 전혀 달라 말 갖다 붙이기 잘하는 사람들은 ‘거짓’을 뜻하는 ‘갖’에 ‘어미’가 붙어 우리말 ‘가자미’가 생겨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가자미눈’을 “화가 나서 옆으로 흘겨보는 눈을 가자미의 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모래나 진흙 속의 자질구레한 갑각류나 극피동물 따위나 잡아먹고 사는 가자미가 들으면 눈을 흘길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두 눈도 위쪽으로 모아붙이고 몸통의 색깔마저 바꾸는 가자미 처지에 화를 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똑바로 바라볼 힘도 용기도 없어서 곁눈질이나 하다가 한쪽으로 쏠리는 눈”이라고 풀이하는 게 옳을 듯싶다. 실제로 가자미는 싸구려 생선에 속한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목(目)에 속해 생김새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육질이 쫄깃쫄깃한 도다리나 광어는 횟감으로 비싼 값에 팔리는 반면 육질이 덜 쫄깃쫄깃한 가자미는 주로 구이용이나 튀김용으로 서민들의 식탁에 주로 오른다. 

 시집 '가재미'  2006년 문학과지성사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 졸업 후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외 9편이 당선돼 등단한 시인 문태준의 작품 ‘가재미’는 문태준이 <현대시학> 2004년 9월호에 발표한 작품, 이듬해 도서출판 작가(대표 손정순)가 시인·평론가 12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은 시’ 추천을 받은 결과 수위를 차지했었다. 문태준이 그 시의 모티프를 도다리나 광어가 아닌 가자미(‘가자미’를 경상도 지방에서는 ‘가재미’라고 부른다)에서 얻은 것은 가자미에서 느껴지는 ‘볼 품 없는 가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문태준은 이 시에 대해 “어렸을 적부터 고향(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마을에서 같이 살다가 돌아가신 큰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바탕이 됐다”고 말했던 바, 그 큰어머니가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에 적응하기 위해 ‘가재미’처럼 살았다는 것이 시의 줄거리이고 보면, 이 시 또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맨발’과 마찬가지로 가난을 공통분모로 삼아 지은 것 같다. 

문태준의 시작(詩作)에 나타나는 ‘가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시 속의 ‘가난’ 또한 추하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답고 인간적이다. ‘가난’에의 순응(順應) 속에서 미(美)와 휴머니즘(Humanism)을 찾아내는 문태준의 시재(詩才)에는 ‘무등을 보며’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고 읊었던 미당 서정주조차 감탄해 마지않을 것 같다. 비유가 너무 섬세하여 사람이 가자미인지 가자미가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는 구절은 ‘그녀’가 아닌 ‘가난’이 흘린 눈물로 깨끗이 씻겨진 영혼들이 부둥켜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시 속의 화자(話者) ‘나’는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여 위만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자미눈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나와 당신, ‘그녀의 오솔길’과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와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과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로 순응을 체득한 그녀가 “산소호흡기로 들어 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는 대목에서는 시적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느껴진다. 

‘가난’은 느끼는 자의 것, 자기가 처한 곳보다 항상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현대인은 항상 ‘가난’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바,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린 가자미와 다를 바 없다는 문태준의 관찰에 동의한다. 그런 가자미들이 동병상련으로 나란히 누워 서로의 마른 몸을 적셔주는 것이야말로 휴머니즘 중의 휴머니즘, 볼 품 없는 가자미눈에서 그 아름다운 휴머니즘을 찾아낸 문태준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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