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사연을 간직한 듯 꾸불꾸불 뻗은 고목의 가지들. 흘러간 시간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상은의 시는 그런 깊이를 느끼게 한다. |
錦瑟(금슬)
錦瑟無端五十弦(금슬무단오십현) 아름다운 거문고에 줄이 오십 개나 달린 이유 있으리
一弦一柱思華年(일현일주사화년) 줄 하나 기둥발 하나마다 꽃다운 시절 생각나네
莊生曉夢迷蝴蝶(장생효몽미호접) 장주는 새벽에 호랑나비로 착각하는 꿈을 꾸고
望帝春心托杜鵑(망제춘심탁두견) 망제(望帝)는 봄 시름을 두견에 부치었네
滄海月明珠有淚(창해월명주유루) 싸늘한 밤바다 밝은 달 흘리는 눈물 진주 되고
藍田日暖玉生煙(람전일난옥생연) 남전의 땅 날 따뜻해지면 옥돌에서 연기 피어올랐네
此情可待成追憶(차정가대성추억) 이러한 정 세월 흘러 추억이 되었지만
只是當時已惘然(지시당시이망연) 정작 당시엔 정신이 멍할 따름이었네
<이상은(李商隱); 812년 또는 813년-858년>
인간이 머릿속에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걸 환기(喚起)하는 능력을 기억(記憶, memory)이라고 한다. 한자 생각할 억(憶)은 마음 심(心)에 뜻 의(意)가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마음에 새겨둔 뜻이나 생각’을 말한다. 영어 ‘memory’의 뿌리는 ‘신경쓰다’ ‘관심을 갖다’ 등의 의미를 지닌 고대 그리스어 ‘mermēra’로서 마음에 걸리는 게 기억으로 남는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기억을 뇌 과학으로 설명하자면 대뇌피질의 여러 경로에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습득한 정보는 두 단계를 거쳐 저장되는데, 일단 ‘단기기억(short-term memory)’ 회로에 저장되어 몇 초에서 몇 시간 유지되다가 환기와 재환기를 통해 공고화되면 며칠에서 길게는 수십년간 ‘장기기억(long-term memory)’ 회로에 저장된다. 단기기억은 곧 잊혀지는 게 대부분이지만 장기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으며, 잠시 잊혀지더라도 다시 생각난다. 또 ‘작업기억(working memory)’은 현재 습득하는 감각정보를 이미 저장된 과거의 정보와 비교하고 조작한 후 미래의 행동을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인생의 절반은 추억(追憶) 만들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추억 곱씹기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장기기억 회로에 저장된 정보나 작업기억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바, 살아온 날들이 살날들보다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 미래에 대한 설계보다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늘어나고, 그래서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Time flies but memories remain)”는 격언 또한 만들어졌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추억은 왜 남나? 왜 인간은 장기기억 속에 저장된 기억을 환기하고 또 환기하나? 생선이나 야채를 장기 보존할 때 소금을 뿌려두듯이 잊혀지지 않는 것 또는 잊고 싶지 않은 것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회한과 그리움의 소금을 뿌려두는 것은 아닌지?
젊은 날의 이상은 초상과 '이상은 시가집해' 1988년 중화서국 |
‘대소이두(大小李杜)’라고 하여 이백(李白), 두보(杜甫), 두목(杜牧)과 함께 당나라 4대 시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상은(李商隱; 812년 또는 813년-858년)은 추억을 반추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시인으로도 손꼽힌다. 26세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을 영수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정담(鄭覃) 등을 영수로 하는 이당(李黨)의 싸움 즉 ‘우이(牛李)의 당쟁’에 휘말려 지방관리로만 전전하는 불우한 삶을 살았던 탓인지, 꽤나 감상적이었다. 대이(大李)로 불린 이백의 시풍이 호탕했던 반면 소이(小李)로 불렸던 이상은의 시풍은 관능적이고 화려하여 유미주의적인 경향마저 보인다. 그의 연애시(戀愛詩)들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읽혀온 것도 그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금슬(錦瑟)’은 이상은이 거문고를 타면서 추억을 반추한 시다. 거문고는 기둥발로 받친 줄의 장단을 손가락으로 조절하여 음을 만들어내는 악기이므로, “錦瑟無端五十弦(금슬무단오십현)”은 기둥발에 얹힌 줄을 조절하여 내는 소리 하나 하나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추억이 떠올려진다는 말, 장자가 호접지몽(胡蝶之夢)을 꾸어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경험했다든지 촉(蜀)의 망제(望帝)가 별령(鳖灵)에게 나라를 물려 준 후 그 다음 대(代)에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한이 맺혀 두견(杜鵑)이 되었다는 등의 고사는 자신 또한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껴봤다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거문고 음률 하나하나에 그런 몽유(夢遊)와 슬픔의 추억이 차례로 떠올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음률은 추억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상상으로까지 이어진다. ‘滄海月明珠有淚(창해월명주유루)’는 싸늘한 밤바다에 밝게 뜬 달이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고, ‘藍田日暖玉生煙(람전일난옥생연)’은 예부터 아름다운 옥의 산지로 유명한 남전(藍田)의 날이 따뜻해지면 옥돌 묻힌 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인데, 거문고 음률 하나로 머릿속의 추억과 상상을 자연스레 연결시키는 청각(聽覺)-시각(視覺) 이미지의 조합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운 추억과 상상이 자신이 진짜 겪은 것인지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능청이라도 떨 듯이, 미인을 보면 정신이 멍해지듯이, ‘망연(惘然)’이라는 말로 여운을 극대화하고 있음에 유미주의(唯美主義) 극치를 보는 듯하다. 몽환 속 오솔길을 헤매다가 갑자기 탁 트인 절경을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뇌 과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뇌의 ‘작업기억’ 기능을 믿는다면, 머릿속에 되도록이면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저장해두는 시인일수록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을 터, 이상은의 머릿속 또한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옥산지로 유명한 남전의 옥이 아름답다고 해서 “현명한 부모에게서 현명한 자식이 태어난다”는 의미의 ‘남전출옥(藍田出玉)’이라는 말이 생겨났다지만 “아름다운 추억에서 아름다운 시가 나온다”는 의미로 바꿔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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