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7일 월요일

When We Two Parted - 낭만적인 사련(邪戀)의 아픔과 슬픔

          2013, window, skchai

When We Two Parted 

WHEN we two parted                    우리 둘 헤어졌을 때 
In silence and tears,                      침묵 속에서 눈물 흘렸지, 
Half broken-hearted                       아픈 마음 두 동강 나서 
To sever for years,                         몇 해 동안 따로 따로 놀았지 
Pale grew thy cheek and cold,        창백해진 그대의 뺨 차갑게 변하고 
Colder thy kiss;                              그대의 키스는 더 차가왔네; 
Truly that hour foretold                   기실 미리 예견됐던 것이지 
Sorrow to this.                               이런 정도의 슬픔은. 

The dew of the morning                   그 날 아침의 이슬 
Sunk chill on my brow —                나의 이마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지 - 
It felt like the warning                      마치 경고해주는 것 같았어 
Of what I feel now.                         지금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 
Thy vows are all broken,                그대의 맹세 다 부서지고 
And light is thy fame:                      그대의 명성도 엷어져 
I hear thy name spoken,                  누군가 그대 이름을 말하면 
And share in its shame.                   나도 같이 부끄러워지네 

They name thee before me,            사람들이 내 앞에서 그대 이름 말하면 
A knell to mine ear;                        내 귀엔 조종(弔鐘)처럼 들리네 
A shudder comes o'er me —          온몸에 소름이 끼쳐 - 
Why wert thou so dear?                 왜 그대가 그토록 사랑스러웠나? 
They know not I knew thee,           사람들은 내가 그대를 알았다는 것을 몰라 
Who knew thee too well: —           그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걸: - 
Long, long shall I rue thee,              오래, 오래 나 그대를 한탄하리라 
Too deeply to tell.                           말로 다 못할 만큼 깊이. 

In secret we met —                       비밀리 우리는 만났지 - 
In silence I grieve,                          (그래서) 침묵 속에서(속으로만) 슬퍼하네 
That thy heart could forget,             쉽게 잘 잊는 그대의 마음을, 
Thy spirit deceive.                          속이고 거짓말 하는 그대의 영혼을. 
If I should meet thee                       언제고 그대를 다시 만난다면 
After long years,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How should I greet thee? —           나 그대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 - 
With silence and tears.                  침묵 속에서(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면서. 

                                 <1816년,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년-1824년> 

‘Romanticism’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중세기 프랑스 궁정에 널리 퍼졌던 기사들의 무용담을 ‘로망(Roman)’이라고 했고, 그런 무용담엔 허구와 과장이 덧붙여지는 게 예사여서, ‘상상의’ ‘모험적인’ ‘비현실적인’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형용사 ‘romantique’가 생겨났다. 그게 영어 ‘romantic’으로 변한 후, 그런 류의 예술 사조를 가리키는 말로 ‘Romanticism’이 만들어졌던 바, 그걸 일본인들이 물결 랑(浪) 흩어질 만(漫) ‘낭만주의(浪漫主義)’라고 음역(音譯)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흔히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하면 비 오는 날 카페에 들러 짙은 갈색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따위의 말초적인 감상부터 떠올리지만 본디는 그런 ‘싸구려’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성(感性)에 불을 붙여 높이 쳐든 횃불이라고나 할까, 낭만주의의 줄기를 더듬어보면 인간의 자기 사랑이 진하게 감지된다.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로부터 인간을 구해줬다. 다시 말하자면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理性)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성(感性)을 강조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의 딱딱한 잔소리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들은 이성 또한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개인의 감성을 존중했고, 사회라는 것 또한 개인의 감성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었으며, 시인들 또한 주변의 눈치나 격식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지금 읽으면 이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사사로운 감정을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것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신(神)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충격적이었고, 그런 개인주의적 감정 표출은 개인주의를 발판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조지 고든 바이런 초상
존 키이츠(John Keats),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단을 이끈 절름발이 미남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년-1824년)의 시들에 ‘낭만적’이라는 수사가 붙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그 만큼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런 자신은 1808년에 썼다고 했지만 1816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When We Two Parted’도 마치 실연한 남자가 술주정을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이런이 몰래 사귀던 유부녀 프란시스 웨더번 웹스터(Frances Wedderburn Webster)가 바이런을 속이고 딴 남자와 밀회를 즐긴 게 알려진 직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아픔과 슬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사랑했던 사람’이 공개돼서는 안 되는 사련(邪戀)의 상대였다는 것을 암시하듯, ‘silence and tears’라는 표현을 세 번씩이나 사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그 만큼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털어놓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시가 운율을 바탕으로 지어지기에 그걸 한글로 번역하면 시쳇말로 ‘앙꼬 없는 찐빵’으로 변해버리는데, 이 작품 또한 ‘parted’-‘hearted’ ‘tears’-‘years’ 등 각 연의 ABAB CDCD EFEF GHGH의 압운을 빼놓으면 재미가 반감된다. 그런 정교한 운까지 계산하여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 바이런의 시작(詩作) 테크닉이 돋보이기도 한다. 

바이런이 낭만주의 시작에 몰두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성품이 낭만적이었고 삶 자체가 낭만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휘어져 있었던 탓에 절름발이로 살아야했던 바이런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외톨이가 되는 등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운 좋게도 가문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아 상류사회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었고,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하여 숱한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同性愛) 경향을 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그가 스위스에서 퍼시 비시 셸리를 만나 각지를 떠돌면서 퇴폐에 찌들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문학사에도 언급될 정도다. 말하자면 바이런은 자기 감성이 명령하는 대로 산 사람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나머지 1823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했다가 독감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중 이듬해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을 했지만, 그 짧은 생애를 왕성한 시작과 함께 자유분방한 삶으로 일관했던 바, 지금도 ‘낭만주자 중의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낭만주의자의 무절제하고 방탕한 삶에서 주옥같은 시편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자체 또한 너무 ‘낭만적’이어서 지금은 골동품이 돼버린 낭만주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두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요즘엔 낭만주의 시 속에만 ‘낭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씁쓸한 느낌과 함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