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chai 2013 |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마루 한가운데 그가 즐겨 앉는
의자가 안 보이고 원목의 의자에 어울리는
책상이 안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장본의
노트가 안 보이고 언제나 뚜껑을 열어 놓은
고급 만년필이 안 보인다 머리를 긁적이며
깨알같이 써 내려가는 그의 글씨가 안 보이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릿결을 내맡기는
그녀가 안 보인다 햇살 고운 그녀와
아침마다 잎을 떨구는 초록의 나무가
안 보이고 묵묵히 초록나무를 키워온
환한 빛의 화분이 안 보인다 너무 환해서
웃음까지 삼켜버린 둘의 사진이 안 보이고
영영 안 보이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의 어깨가 안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오랜 손길이 안 보이고
아무도 없는 마루를 저 혼자 떠도는
먼지가 안 보인다 문이 열리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의 빈방이
안 보인다
<2003년, 김언; 1973년- >
보는 건가? 보이는 건가? 사람이 사물을 볼 때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게 사물의 참모습이라고 여기지만 기실은 사물이 눈앞에 나타나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나마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치자. 같은 나무인데도 어떤 사람은 줄기나 가지를 보고 어떤 사람은 잎이 얼마나 무성한지를 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거나 흥분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등의 시쳇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영어 속담 “Seeing is believing”도 마찬가지다. 본다는 것 또한 주관적인 감각의 작용인 바, 그런 주관적인 관찰(觀察)에 의해 얻어진 개념을 ‘관념(觀念)’이라고 한다. 한자 볼 관(觀)은 황새 관(雚)에 볼 견(見)이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황새가 긴 목을 빼고 뭔가 응시하는 모습이 떠올려진다. 또 생각 념(念)은 이제 금(今)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진 생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념은 자신의 시각으로 뭔가를 보고 머릿속에 떠올려진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런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본 사람들 중의 하나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다. 플라톤은 사물을 볼 때 육안(肉眼) 대신 사유(思惟) 즉 지적 직관(直觀)으로 사물의 핵심을 볼 것을 촉구했었다. 소위 ‘이데아(idea)’다. 감각으로 지각되는 대상들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들이어서 육안으로 볼 때는 매번 다르게 보이지만, 한결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이데아는 불변의 실재성(實在性)을 갖는 바, 지적 직관으로 그걸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일본인들이 ‘관념(觀念)’이라고 번역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관념’은 보는 주체의 생각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이데아’는 보는 주체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물의 참 모습을 의미하는 바, 말맛이 다르다. 그런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만물의 생성․변화론을 설명했던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 “이데아 또한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역시 감각으로 인지한 사물을 머리 속에서 영원한 것으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공박을 당한다. 결국은 도로아미타불,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냐 아니면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으로 지각되는 대상은 매번 다르게 보인다”는 것만큼은 헤라클레이토스든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든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김언 시집 '숨쉬는 무덤' 2003년 천년의 시작 |
독자들과의 공감적 감상을 전제로 시를 써야하는 시인은 사물을 볼 때 자신의 감각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지적 사유를 통해 최대한 객관화시킨 사물의 실체를 보려고 애를 쓰는가? 그런 우문(愚問)에 대해 1998년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 김언(1973년- )이 현답(賢答)을 해주는 것 같다. 2003년 펴낸 첫 시집 <숨쉬는 무덤>의 표제시를 읽노라면 시인이 자신의 감각을 통해 수용한 이미지를 독자들과 어떻게 공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 감상의 관건은 ‘보인다’와 ‘안 보인다’의 차이, 김언이 왜 첫 행을 ‘보인다’로 시작하여 수많은 ‘안 보인다’를 나열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김언의 감각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더듬어 볼 수 있거니와, ‘보인다’와 ‘안 보인다’를 바꿔서 읽으면 비디오 리플레이(replay)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전후의 풍경이 눈앞에 훤히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는 “애인과 이별하여 낙망한 나머지 감각의 기능마저 마비된 그의 눈에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어올 리 없고, 그런 상태에서의 ‘빈방’은 ‘숨쉬는 무덤’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풀어쓴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정작 이 시의 묘미는 작중의 화자(話者)의 눈에 ‘안 보인다’는 것들이 독자의 눈에는 ‘보인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감각을 통해 본 것들을 ‘안 보인다’고 능청을 떨면서 독자들의 눈에 들이대는 김언의 의뭉한 의도가 돋보인다. 그러나 그런 의뭉한 의도에 대해 눈을 흘길 수가 없다. 왜? 시인의 관념을 독자들의 관념으로 보편화하려는 노력이니까!
참 재밌는 시다. 어떤 시든지 어렵게 해설하기를 좋아하는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서도 ‘기존의 모형과 틀을 뒤집는 미래시의 생김새’가 이러쿵저러쿵 사족을 붙이지만, 시라는 게 쉽게 읽으면 쉽게 이해되고 난해하게 읽으면 한없이 난해해지는 바, 우선은 재밌게 읽고 쉽게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숨쉬는 무덤’이라는 제목이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 박정만(朴正萬; 1946년-1988년)의 시 ‘숨쉬는 무덤’과 같은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 게 께름칙하거니와, 시의 뼈대 또한 기형도(奇亨度; 1960년-1989년)의 ‘빈방’과 닮았고, 깊이가 없어 보이는 게 흠이라면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격을 좁혀준 데 대해서만큼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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