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 햇살이 꿈결처럼 흐른다. 저 햇살의 흐름을 보고 인식한 후 머리속에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또 저 햇살이 죽은 후엔 무엇이 남을까? |
Music, When Soft Voices Die
Music, when soft voices die, 음악은, 부드러운 소리들이 죽을 때,
Vibrates in the memory; 기억 속에서 울려퍼지네;
Odours, when sweet violets sicken, 향기는, 향기로운 바이올렛들이 병들 때,
Live within the sense they quicken. 그것들이 소생시킨 감각 속에서 생생해지네,
Rose leaves, when the rose is dead, 장미 꽃잎들은, 장미가 죽었을 때,
Are heap'd for the belovèd's bed; 사랑하는 사람의 침대 위에 쌓이네
And so thy thoughts, when thou art gone, 그렇듯이 그대 생각도, 그대가 가버렸을 때,
Love itself shall slumber on. 꿈결에 계속 이어지고 싶어 하리라
<Percy Bysshe Shelley; 1792년–1822년>
음악이란 무엇인가? 꽃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은 ‘인식(認識; cognition)’을 통해 앎과 경험을 축적한다. 인식은 객관적 실재의 의식에의 반영, 영어 ‘cognition’의 뿌리 또한 ‘-과 함께’ ‘-로’를 뜻하는 접두사 ‘con-’과 ‘알다’라는 의미의 ‘gnōscō’가 붙은 라틴어 ‘cognosco’로서 혼자만의 사유나 추론이 아닌 외부의 ‘-로’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대상이 어떤 개인의 감각에 포착되면 직접적·개별적·구체적인 감성적 인식이 형성되는데, 이 때의 인식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포착된 것에 지나지 않는 바, 그런 감각적 인식은 시행착오 정정과 함께 다른 대상과의 비교·구별 등을 통하여 개념·판단·추리를 거듭하면서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인식을 ‘이성적 인식’이라고 한다. 이 ‘이성적 인식’은 개인적 인식의 실천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역사적 축적은 물론 다수의 사람 즉 집단적 인식으로 가다듬어져 비로소 보편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인지발달이론(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을 개척한 스위스 출신의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인지발달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고,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또 인식의 과정을 생략하고 단번에 대상을 파악하는 것을 ‘직관(直觀; intuition)’이라고 한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이성적 인식’과 같지만, ‘이성적 인식’은 지각과 판단과 사유 등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반면 직관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꿰뚫는 점에서 다르다. 사유나 보편성 인정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신속하고 간편하지만, 인지과정(설명)이 생략되어 타인의 동의나 공감을 얻기가 어렵고, 자칫 핵심을 꿰뚫지 못하면 아집과 오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되도록이면 말을 줄여 여운(餘韻)을 길게 남겨야 하는 시작(詩作)의 특성상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인식보다는 직관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경우 직관이 어긋나면 이성적 인식능력을 갖춘 보통사람들로부터도 비웃음을 살 뿐만 아니라 시 자체가 혼자만의 넋두리로 변하고 만다.
셸리 초상 (Amelia Curran 작) |
셸리는 1822년 7월 8일 북부 이탈리아의 스페치아 만에서 보트를 타고 레리치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익사하고 만다. ‘Music, When Soft Voices Die(음악, 부드러운 소리들이 죽을 때)’는 셸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그가 죽기 1년 전인 1821년에 쓰인 것이었으나, 1824년에 메리의 서문과 함께 출간된 ‘퍼시 비시 셸리 유고집(Posthumous Poems of Percy Bysshe Shelley)’을 통해 발표됨으로써 그의 죽음과 맞물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당시 셸리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구명보트가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체 발견 당시 헤엄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옷과 부츠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단순 사고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Music, When Soft Voices Die’의 매 행 또한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셸리는 생전에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이 작품이 한국에 소개될 때도 많은 사람들이 ‘When Soft Voices Die’를 ‘부드러운 가락이 끝날 때’로 의역하는 등 ‘die’와 ‘dead’의 직역을 회피했으나 이 작품에서 ‘죽음’을 빼면 시쳇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되어버린다. 음악이라는 건 소리가 죽고 나서도 기억 속에 울림이 이어질 때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고, 향기는 그 향기가 일깨운 감각 속에서 더 생생하고, 장미 꽃잎들은 장미가 죽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의 침대 위에 쌓일 때 더욱 아름답다는 셸리의 ‘죽음의 미학’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셸리는, 대부분의 낭만파 시인들이 그랬듯이, 현실에의 불만족을 시적 상상력으로 메우면서 끊임없는 고뇌와 사색과 방황으로 갈고 닦은 자신의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고 노력했던 시인이었다. 시라는 게 직관을 통해 얻은 사물의 본질을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고 보면 셸리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셸리가 ‘Music, When Soft Voices Die’의 마지막 행에서 재확인시켜줬듯이 셸리가 가버리고 없는 지금에야 셸리의 시정(詩情)이 꿈결인 듯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