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4일 월요일

신현곡(神絃曲) - ‘귀재절’이 귀신 부르는 노래



神絃曲 (신현곡) 

西山日沒東山昏 (서산일몰동산혼) 서산에 해 지고 동산에 어둠 깔리자 
旋風吹馬馬踏雲 (선풍취마마답운) 회오리바람 말에 불어 말이 구름마다 밟는다 
畵絃素管聲淺繁 (화현소관성천번) 그림 속 비파와 흰 피리 소리 얕게 깔리다가 뒤섞이고 
花裙綷綵步秋塵 (화군최채보추진) 꽃 치마 오색 비단 걸음 가을먼지 일으키네 
桂葉刷風桂墜子 (계엽쇄풍계추자) 계수나무 잎 바람으로 씻겨지자 나무 열매 떨어지고 
靑狸哭血寒狐死 (청리곡혈한호사) 푸른 털 살쾡이 울어 피 토하고 추운 여우 얼어죽네 
古壁彩虯金貼尾 (고벽채규금첩미) 낡은 벽에 그려진 용은 꼬리에 금박을 두르고 
雨工騎入秋潭水 (우공기입추담수) 비 만드는 신령 말을 타고 가을 못에 들어가는데 
百年老鴞成木魅 (백년노효성목매) 백년 늙은 부엉이 나무 도깨비 되니 
笑聲碧火巢中起 (소성벽화소중기) 웃음소리 푸른 불 둥지에서 일어나네 

                                              <이하(李賀); 790년~816년> 

람이 귀신(鬼神)에게 홀리면 ‘헛것’이 보인다고 했다. 그 ‘헛것’을 ‘환상(幻像)’이라고 한다. 환(幻)은 베를 짤 때 쓰는 북[予]이 굽은 막대기 끝에서 어지럽게 움직이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서 ‘헛보이다’ ‘미혹하다’ ‘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그러므로 귀신에 홀려 환상을 본다는 것은 귀신이 변한 게 눈에 보인다는 의미다. 

귀신이라는 게 뭔가? 영혼불멸을 믿었던 고대 중국인들은 사람은 정기신(精氣神) 즉 육신(肉身)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靈)의 생명력인 신(神)이 기(氣)에 의해 결합되어 생명을 이루고 있는 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의 운행이 정지되어 정(精)과 신(神)이 분리되는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더라도 정(精)은 백(魄, 얼)이 되어 땅으로 흩어지고 신(神)은 혼(魂, 넉)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 가운데는 사람의 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온 것도 포함하므로 그런 신이 변하여 나타날 때는 사람과 관계되는 것 즉 이승의 그 어떤 것으로 변하여 나타날 확률이 매우 크다는 게 한자 문화권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지금도 중국서는 제야(除夜)의 12시가 지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들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접신의식(接神儀式)을 행하는 바, 집집에서 부엌이나 곳간 등에 제물과 함께 해당 신의 화상(畵像)을 걸어놓고 분향하는데, 그 때 좋지 않은 신들일랑 깜짝 놀라서 집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폭죽을 터뜨리기도 한다. 인간의 혼이 변하여 신이 되기에 배가 고플까봐 음식을 차리기도 하고 폭죽을 터뜨리면 깜짝 놀랄 거라고 믿는 것이다. 

후대에 그려진 이하의 초상. 이하는 삶이 불우하고
병약했던 탓에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는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죽음, 귀신, 눈물, 곡성 등등 귀신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시어들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거니와 시상(詩想)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게 많았다. 그 만큼 죽음이나 귀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이겠지만, 기질이 매우 염세적인 탓도 컸던 것 같다. 운도 없었다. 몰락한 당 황실의 후예로 17세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시재를 인정받은 후 그의 권유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進)이 같은 음이므로 휘(諱)를 범하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얼토당토않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한유가 그런 비난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명문장 ‘휘변(諱辯)’을 써서 이하를 감싸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한유는 ‘휘변’에서 “...父名晉肅(부명진숙, 아버지의 이름이 진숙이라 하여) 子不得擧進士(자불득거진사, 아들이 진사가 될 수 없다면) 若父名仁(약부명인, 만일 아버지의 이름이 ‘인(仁)’인 경우에는) 子不得爲人乎(자불득위인호, 아들은 사람이 될 수도 없단 말인가?)”라고 꾸짖었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봉례랑(奉禮郞)이라는 미관말직을 얻어 2년 남짓 지냈으나 그나마 건강이 좋지 않아 사직한 후 불우한 나날 속에서 염세적이고 몽환적인 시나 쓰면서 울분과 비애를 달래야만 했다. 

이하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귀신을 벗 삼았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신현곡(神絃曲)’을 보면 흡사 귀신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마냥 음산하지만은 않다. 무섭거나 혐오스럽지도 않다. 비파와 피리 소리의 뒤섞임 속에서(청각적 이미지) 꽃무늬 비단치마의 펄럭이게 하고(시각적 이미지) 꼬리에 금박 두른 용까지 등장시킴으로써 현란하고도 역동적인 한 폭의 ‘귀신도(鬼神圖)’를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백년 늙은 부엉이 둥지 한가운데서 웃음소리 푸른 불이 치솟는다는 대목에서는 괴기한 공감각적 이미지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이후 많은 시인들이 이하의 ‘신현곡’을 흉내 내 ‘귀신의 노래’를 지었지만 이하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자(字)가 장길(長吉)이어서 ‘이장길’이라고도 불리는 이하는 27세로 숨을 거두면서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백옥루에 상량문을 지으러 간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와 통찰(洞察)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서 삶과 죽음을 노래했다는 평가가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닌 듯싶다. 그가 그의 벗 진상에게 주는 시 ‘증진상(贈陳商)’에서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를 끌어당기네(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랴(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라고 읊었던 것도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들 꺼려하고 혐오하는 죽음과 귀신까지도 아름답게 미화하여 시의 소재로 끌어올린 이하야말로 말 그대로 ‘귀재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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