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2001년 ‘현대시학’, 정일근(鄭一根); 1958년- >
언어(言語)를 뜻하는 영어 ‘language’의 뿌리는 ‘혀’를 뜻하는 라틴어 ‘lingua’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척한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개인적 발화(發話) 즉 ‘파롤(Parole)’과 그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발화행위를 가능케 하는 추상적 체계 즉 ‘랑그(Langue)’로 나누어 설명했었다.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체계나 규칙이 랑그라면 그게 입안에서 혀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파롤, 한자어 ‘언어(言語)’도 그런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자 말씀 언(言)은 혀 설(舌)이 변해 만들어진 것, 그걸 우리[吾]가 주고받으면 ‘어(語)’가 된다. 머릿속에 어떤 의미를 떠올린 후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만들어내는 음이 ‘言’이라면 그걸 너와 내가 같은 의미로 알아들을 때 비로소 ‘語’가 된다는 말이다. 또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말을 만들어내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한다면 그걸 사회적으로 인정하여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을 ‘언어의 사회성(社會性)’이라고 한다.
사회성이 지역적 또는 계층적으로 한정된 언어를 ‘방언(方言, 사투리, dialect)’라고 한다. 'dialect'의 뿌리는 ‘담화’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diálektos’로서 특정한 무리가 자기네들만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어(隱語)나 아직은 사회적 언어체계를 습득하지 못해 간단한 음성체계로 의사를 전달하는 유아어(乳兒語)등과는 다르다. 그 방언이 개인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을 ‘idiolect(굳이 번역하자면 ‘개인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라도 혀가 짧은 사람과 긴 사람 또는 성격이 느긋한 사람과 급한 사람 등등 개인적 차이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는 바, ‘개인어’를 보면 그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이나 사회적 수준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들은 “어떤 언어는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언어 집단에 속한 개인어의 총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은 나라는 손바닥만 하지만 높은 산이 울타리처럼 막힌 데다 오랫동안 농경정착문화를 유지해온 탓에 사투리가 유난히 많다.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 말씨가 다르고 제주도 사람들의 말씨를 육지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만큼 외부와의 단절이 오래 지속됐다는 증거다. 사투리가 표준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지역감정’이라는 고질병이 말해주듯 지역 사람들이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사투리를 조탁(彫琢)하여 시어(詩語)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 또한 적지 않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서정주(徐廷柱)는 전라도 사투리를 토속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양념으로 사용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경상북도 경주 출신의 박목월(朴木月)은 아예 <경상도의 가랑잎>(1968년 민중서관)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많은 시인들이 토속적 분위기 또는 향수(鄕愁)를 손쉽게 환기하기 위해 사투리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효과는 미지수였던 것 같다. 박목월은 <경상도 가랑잎>에 실린 ‘사투리’라는 작품에서 “우리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런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고 읊었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 또한 그 시를 읽으면서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을까? 다른 지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사투리를 자신의 고향 특산물인 것처럼 애용하는 한국의 시인들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영어가 처음 유행하던 시절 한국어 대신 영어 몇 개 삽입해놓고는 영어 자체가 ‘모더니즘’인 것처럼 착각했던 사이비 모더니스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정일근의 첫 시집 '바다가 바라다....' 1987년, 창작과 비평사 |
사투리를 시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면 사투리 자체보다도 그 사투리에 담긴 인간 보편적 정서에 초점이 맞춰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점에 유의한다면 1958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를 나온 후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정일근(鄭一根; 1958년- )이야말로 시 속에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쓸 자격이 있어 보인다. 그의 대표작 ‘어머니의 그륵’을 읽노라면 시인들에게 ‘사투리 시어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시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깊이 보다 더 깊은 ‘어머니의 그륵’ 깊이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어머니의 ‘개인어’로 재인식하여 모정(母情)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정서를 넉넉하게 담아내는 시재(詩才)가 놀랍다. ‘어머니의 그륵’이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시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상위에 서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시인 각자가 떠올린 시상(詩想)을 시인 각자가 선택한 시어로 표현하는 게 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 또한 일종의 사투리이고 개인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상이 먼저이지 시어가 먼저는 아니라는 점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비슷비슷한 산물(産物)인데도 ‘특산물(特産物)’이랍시고 비싸게 팔아먹는 장사치처럼 사투리를 ‘특산물’로 애용해온 시인들이 정일근의 ‘어머니의 그륵’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 한 수 배웠으면 좋겠다.
참 맛있는 글 잘 먹었슴니다. 고맙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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