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장진주(將進酒) - 누가 감히 ‘취생몽사’를 비웃으랴

롱아일랜드 윌리스턴 파크 소재 한 한국인의 술가게 쇼윈도우. 한국어로 "한국술, 소주, 백세주, 복분자 등등 판매합니다!"라고 써놓은 안내문이 정겹다. 고단한 이민살이 술을 벗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리라. 

將進酒(장진주)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 (분류도해불부회)   바삐 흘러 바다에 이르러는 다시 오지 못 하는 것을 
又不見 (우불견)                            또 보지 못 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당명경비백발)  부잣집 맑은 거울 속 슬픈 흰 머리는 
朝如靑絲暮成雪 (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푸른 실 같던 게 저녁에 눈같이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인생 잘 풀릴 때 즐거움 다 누리고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금 술잔 헛되이 달과 마주 하지 마시오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준 나의 재능 반드시 쓰임새 있으리니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복내)  천금이 흩어져 없어져도 다시 생겨날 것이오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낙)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하나니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요 
岑夫子 (잠부자)                            잠 선생 
丹丘生 (단구생)                            단구 선생 
將進酒 (장진주)                            술 올리니 
君莫停 (군막정)                            그대들은 거절하지 마시오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그대들에게 노래 한 곡 불러주노니 
請君爲我側耳聽 (청군위아측이청)  그대들 나 위해 귀 좀 기울여주시오 
鐘鼓饌玉不足貴 (종고찬옥부족귀)  종고찬옥(진수성찬과 보배)일랑 귀히 여기지 않느니 
但愿長醉不愿醒 (단원장취불원성)  단 오래 취하여 깨지나 말기를 바라오 
古來聖賢皆寂寞 (고내성현개적막)  예부터 성현은 모두 다 잊혀지고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류기명)  술꾼만 이름을 남겼다는 걸 생각해보시오 
陳王昔時宴平樂 (진왕석시연평낙)  진왕은 그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 열었을 때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한 말에 만량이나 하는 술 마음대로 즐겼다오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주인이 어찌 돈이 적다 하리오 
徑須沽取對君酌 (경수고취대군작)  얼른 술 사다가 그대들과 대작 하리다 
五花馬 (오화마)                            오색 갈기털 말 
千金裘 (천금구)                            천금짜리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미주(美酒)로 바꿔오겠소 
與爾同消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들과 함께 만고의 시름 삭여보리라 

                                                           <이백(李白); 701년-762년> 

가 감히 '취생몽사(醉生夢死)'를 비웃나? 송나라 때 주자학의 기틀을 잡은 학자 정호(程灝)는 “비록 높은 재주와 밝은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견문이 고착되면 술에 취한 듯 살고 꿈꾸듯 죽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雖高才明智 膠于見聞 醉生夢死 不自覺也)”고 말했다지만 난세에 학문을 배우고 견문을 넓혀봤자 써먹을 데가 없어 되레 괴롭기만 한 ‘고재명지(高才明智)’들은 어떻게 하나? 혼탁한 세상에 적응 못하는 자신이 못 나 보이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대계를 품은들 펼칠 기회가 없고, 가슴 속에 감동의 불을 지피는 시문을 써도 그걸 제대로 감상하는 지음(知音)이 없을 때 술이 친구이고 꿈속이 안식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옛날 왕조시대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한 문인들이 술과 산수를 벗 삼고 꿈을 도피처로 삼았던 것도 ‘취생몽사’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진짜 취생몽사했다기보다는 그런 자학(自虐)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억지로나마 시문에 몰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세에는 이름깨나 알려졌지만 당대에는 낙백(落魄)했던 시인치고 술 권하는 노래 즉 ‘장진주(將進酒)’나 음주를 예찬하는 작품을 남기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어떤 사람들은 되레 그들의 낙백과 취생몽사가 되레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다. 

이백 시선 1996년 삼련서점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취생몽사 또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고급관리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에게 ‘천상에서 지상으로 유배를 당한 선인’ 즉 ‘적선인(敵仙人)’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데서 보듯, 이백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었다. 혼탁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724년 43세의 나이에 겨우 한림봉공(翰林供奉)이 되었으나 이듬해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사서 사직해야만 했고, 이 곳 저 곳을 떠돌다가 56세가 되어 현종의 아들 영왕의 군대에 몸을 담았다가 반군으로 몰려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됐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사면을 받아 풀려난 후에는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762년 62세 때 당도(當塗) 현령이었던 족숙(族叔)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던 중 술병을 얻어 죽었다고 <구당서(舊唐書)>는 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백이 술에 취해 장강(長江)에 비친 달그림자를 건져 올리려다가 강물에 빠져죽었다는 믿거나말거나 전설로 그의 죽음을 포장하고 있지만, 술 마시면서 시문 짓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은 이백의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감히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겨는 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라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게 위대한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백은 겉으론 낙천적이고 호탕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염세적이고 여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 또한 수박 겉핥기로 읽으면 낭만적이고 화려하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그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울분과 탄식과 체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장진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天生我材必有用(하늘이 준 나의 재능 반드시 쓰임새 있으리니)’은 세상을 잘못 만나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펴 보이지 못하는 답답함의 표출이요, ‘千金散盡還復來(천금이 흩어져 없어져도 다시 생겨날 것이오)’는 술값조차도 궁색한 자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고, 맨 마지막 ‘與爾同消萬古愁(그대들과 함께 만고의 시름 삭여보리라)’는 자신의 시름을 ‘만고수(萬古愁)’에 비유할 정도로 불우한 신세를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술 사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술을 사마실 돈도 없기에, 값나가는 물건을 술과 바꿔서라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셔보겠다는 이백의 술잔을 누구라서 뿌리칠 수 있으랴. 그나마도 여의치 않자 달과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술을 마시면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기까지 했던 그의 삶을 ‘취생몽사’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시에 취하나 술에 취하나 취하기는 마찬가지, 혼탁한 세상에서 불우한 자신을 달래는 데는 시문 짓기와 술 마시기가 유일한 방도였을 터, 이백의 취생몽사를 동정(同情)한다. 갈수록 사는 게 팍팍해지고 돈과 권력 없이는 술 한잔 같이 할 친구 찾기조차 쉽지 않아서 그런지 이백이 내미는 술잔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댓글 1개:

  1. 공감. 이백의 장진주에서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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