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으로 비판한 골육상잔(骨肉相殘)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폐허가 된 인천의  한 공장건물 앞에서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여자 어린아이. 그 여자 어린아이는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하기 위해 38선을 그었고 북한과 남한이 그들을 대리하여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고 
漉豉以爲汁 (록시이위즙)   즙을 걸러내 메주를 만든다. 
萁在釜下燃 (기재부하연)   콩깍지는 가마솥 아래서 타고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속에서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시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서로 닦달하는 게 어찌하여 이리도 급한가? 

                                       <조식(曹植); 192년-232년> 

육상잔(骨肉相殘)이 벌어지면 ‘골(骨)’과 ‘육(肉)’이 공멸한다. 뼈 골(骨)은 서로 연이어져 있는 뼈대 모양의 뼈대 알(歹)의 원형 아래 살코기 덩어리를 본뜬 고기 육(肉)이 붙은 것으로서, 살은 뼈가 없으면 형태를 갖출 수 없고 뼈는 살이 없으면 연결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외부의 충격에 상하기 쉬운 바, 뼈와 살은 싫어도 서로 붙어 있어야 하는 사이다. 그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둘 다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간의 다툼이나 동족간의 전쟁 등 골육상잔이 끊이질 않았던 이유는? 삼국시대 이래 같은 민족끼리 골육상잔을 일삼아온 한국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패전국 일본에 전쟁 도발 책임을 물어 당시는 엄연한 ‘일본 땅’이었던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데다가 한반도 내부에 누적된 모순과 갈등이 도화선이 되어 촉발되었다는 게 정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1981년에 펴낸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 1990년 증보판 발행)’에서 “6· 25는 해방과 건국 이래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과 분단 상황을 풀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으로서 국가수립을 둘러 싼 남한 내부의 대립과 투쟁, 미군정의 오판과 정책오류, 남북의 국지적 무력충돌 등이 어우러져 전면전으로 비화되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말해보자. 제2차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미국이 한국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분할 점령했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했고, 당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방어선' 발언에서 보듯 동아시아에서 한반도를 울타리 삼아 일본을 보호하려했던 미국이 참전하여 북상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 또한 참전하여 또 다시 휴전선이 그어진 것 아닌가?! 실제로 얼마 전 한국의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국민 10명 중 6명(58.6%)만 6·25전쟁을 북한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나머지 상당수(37.1%)는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김일성 개인에게만 6.25의 책임을 물으면서 남북 분단 상황을 독재 정당화에 써먹었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독재시대 세뇌교육 탓인지 아직도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게만 묻는 ‘보수꼴통’들이 수두룩하지만,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보다는 그걸 당기도록 만든 쪽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구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이나 미국을 등에 업고 분단을 현실화한 이승만 또한 뒤통수 긁적이면서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반성은커녕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이리저리 찢겨지고 있음에 골육상잔으로 죽은 귀신들이 죄다 한반도에 모인 건 아닌가 하는 우스개 생각도 든다. 이명박 정권 때 국론을 분열시켰던 천안함 사건만 해도 그렇다. 남한서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대북 심리전 방송을 위한 대형 확성기를 설치하겠다고 나서자 북한이 ‘서울 불바다’ 운운하면서 “전면적 군사적 타격행동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공갈 협박한 가운데 남한 내부에서는 반정권-친정권으로 나뉘어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박치기만 해댔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도 북한서 대남․대미 공갈협박을 일삼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나 되는 듯이 전 세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꼴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미국서 위기를 과장하여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무기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반면 친미주의자들이나 북한 위협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세력은 “북한이 김정은 체제의 안정적 구축을 위해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음을 본다. 

청대에 그려진 조식 초상
중국 후한(後漢) 말기 조조(曹操)의 다섯째 아들 조식(曹植; 192년-232년) 또한 씁쓸하게 비웃을 것 같다. 최종 봉국(封國)이 진(陳)이고 시호가 사(思)여서 ‘진사왕(陳思王)’으로도 불리는 조식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시문에 능통했으나 후계 권력투쟁에서 형 조비(曹丕)에게 밀려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사(正史)에는 처음엔 조식이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비에 비해 처세가 떨어지고 음주를 절제하지 못하는가 하면 수레를 타고 천자만이 다니는 길을 지나갔다가 물의를 빚어 후계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제위에 오른 조비는 조식 세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조식을 제거하기 위해 “네가 시재(詩才)가 뛰어나다고 하니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라.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그래서 지었다는 시가 바로 ‘자두연두기’로 시작하는 ‘칠보시(七步詩)’다. 

전설에는 조식의 칠보시를 들은 조비가 크게 뉘우치고 반성하여 조식을 살려줬다고 하나 그건 조조 일가를 폄하하기 위해 후대 사가들이 쓴 소설일 뿐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투쟁에서 시 하나를 놓고 생사를 흥정(?)했다는 게 자다가 일어나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칠보시’의 전설이 진실이라면? 시를 잘 지은 조식의 시재(詩才)보다도 시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라이벌을 살려준 조비의 아량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저런 사서(史書)는 생전의 조식은 자주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의 일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관직을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가운데 아내가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절망과 근심 속에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조식의 시재도 뛰어났지만 형 조비도 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조조 역시 전장을 누비며 지은 ‘횡삭부시(橫槊賦詩; 창을 비켜들고 지은 시)’로 유명하여 3부자가 ‘건안삼조(建安三曹)’라고 불렸다. 

어쨌거나 ‘칠보시’는 골육상잔의 당사자들을 꾸짖기 위한 잠시(箴詩)로 인구에 회자되지만 누가 ‘콩깍지’이고 누가 ‘콩’인지 따져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칠보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조비는 가마솥 아래서 타는 ‘콩깍지’이고 조식은 가마솥 속의 ‘콩’이지만,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 제3자만 이득을 취할 뿐, ‘콩깍지’나 ‘콩’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6.25 전쟁 때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일본은 패망의 잿더미 속에서 경제를 재건하는 기틀을 다졌고, 남북한 긴장이 고조될수록 미국․중국․러시아의 무기 장사꾼들만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가운데, 정작 ‘콩깍지’와 ‘콩’ 노릇을 하는 남한과 북한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말이다. 군사적 대치 및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켜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남북한 기득권 세력을 제외한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 남북간의 골육상잔은 진짜 잔(殘), ‘殘’은 부서진 뼈 알(歹)에 창 과(戈) 두개가 붙은 것으로서 창칼로 뼈를 부수는 것, 골육끼리 창 들고 싸워봤자 뼈가 바숴지는 것 말고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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