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모름지기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김남주(金南柱); 1946년-1994년>
시(詩)란 무엇인가? 한자 ‘詩’는 말씀 언(言)에 관청 또는 절을 뜻하던 사(寺)가 합쳐진 것, ‘寺’는 손 우(又)와 마디 촌(寸)이 합쳐진 것으로서 본디 ‘모시다’라는 의미였던 바, 말 그대로 풀이하면 ‘말로 모시다’라는 의미이고 말로 모실 때에는 뜻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서경 (書經)의 순전(舜典)에도 “시는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늘인 것(歌永言)”이라고 정의돼 있다. 주(周)나라 때부터 전해 오던 시가(詩歌) 331편을 선별하여 ‘시경(詩經)’을 편찬한 공자(孔子)는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고 했다. ‘사무사’는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말한다. 영어권의 생각은 좀 다르다. ‘poem’의 뿌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poiein’, 여기서의 ‘창조’는 영원불변의 신의 세계인 이데아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수용하여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詩人)은 어떤 사람인가? 물론 ‘시를 쓰는 사람’을 일컫지만 시를 쓴다고 해서 다 시인 은 아니다. 시작(詩作)을 업(業)으로 삼아야 하고 쓴 시가 일반인들이 쓰는 시의 평균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는 묵시적 인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를 직업적으로 쓰다 보면 나름대로의 특성이 생기는 바, 그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시를 만드는 기술만을 강조한다면 ‘시인’이 아니라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을 ‘도공’이라고 불렀듯이 ‘시 만드는 기술자’ 즉 ‘시공(詩工)’이라고 불렸을 테니까. 그런 시인의 특성을 감안하여 시인에 대해 정의를 내린 사람들 중의 하나가 플라톤(Platon)이다. 플라톤은 영원불변의 이데아를 모방하는 테크네(techne, 기술)를 이미 자연에 재현되어 있는 것을 모방하는 ‘획득적인 테크네’와 자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테크네’로 나눈 후(이데아의 그림자), 재차 ‘생산적인 테크네’를 실물의 생산과 이미지의 생산으로 구분하고는(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 시는 일차 모방된 것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 즉 ‘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그렇듯 시는 사람들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물론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자극하여 연민 따위나 불러일으키므로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 바 ‘시인추방론(詩人追放論)’이다. 그러나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가 ‘사무사(思無邪’를 주장했듯이, 시에는 사악함이 없는 뜻만 담겨야 한다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었고 그런 시를 쓰는 시인 또한 사악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바, 시를 잘 짓는 사람을 관리를 뽑았던 것도 그런 발상 때문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김남주 첫 시집 '진혼가' 1994년 연구사 |
플라톤의 생각대로라면 시인은 감정을 충동질하여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바, 정치적 견해에 따라 폭군을 미화하는 서사시들이 난무하고 시가 선전․선동에 자주 이용됐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반면 공자의 생각대로라면 시인은 사악함이 없는 뜻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인 바, 자고이래 시인들이 폭군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섰던 것도 그런 신념의 표출이라고 하겠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주로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시를 썼던 전라남도 해남 출신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년-1994년)는 공자의 시론(詩論)을 신봉하면서도 플라톤의 시론을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아니 그 양자 사이에서 무척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첫 작품 ‘진혼가(鎭魂歌)’에서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고 독자들의 감성을 뒤흔들어 선동(?)한 데 이어 ‘시인이란 모름지기’라는 작품에서는 “불의한 권력이나 위선적인 권위에 머리를 숙이지 말고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이란 것들’에서는 “밤중에/ 홀랑 꾀벗고 마누라와 그것을 하다가 열렬하게 하다가/ 문득 사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나/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가 그것을 수첩에 적어놨더니/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하니까/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버린다."”고 시인으로서의 자괴와 고민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었다는 듯이 ‘시’나 ‘시인’에 대해 유달리 많은 시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김남주는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일견 ‘창작과 비평사’라는 문예전문지를 통해 등단했으므로 ‘시인’임에는 틀림없겠지만, 1977년 해남농민회 결성에 참여하는가 하면 1979년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는 등 평생 독재타도와 민중운동에 앞장섰던 바, 사상적으로는 혁명가라는 딱지가 더 어울려 보인다. 김남주의 편에 서는 사람들은 “김남주에게 있어서 시는 이 땅의 독재와 싸우는 무기였고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일상에 안주하여 부정과 불의를 눈감으려는 소시민적 태도에 가해진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시인과 혁명가를 겸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겠지만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판단하는 독재나 부정과 불의의 기준이 뭐냐? 일방의 정치적 견해라고도 볼 수 있는 김남주의 판단이 꼭 옳으냐?”고 반문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라는 것 또한 시간(시대)과 공간(상황)과 인간(시대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김남주가 시인이냐 혁명가냐 따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우문인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이 시인이라고 여기면 시인이고 혁명가라고 여기면 혁명가일 뿐, 김남주의 시가 공산당이나 독재자들의 생경한 구호보다는 감동적이어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지는 바, 아이러니컬하게도 김남주의 또 다른 작품 ‘시인이여’의 첫 연이 우문에 대한 현답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김남주는 “암흑의/ 시대의/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침묵일까/ 관망일까/ 도피일까/ 밑 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라고 자문하고는 ‘첫 닭의 울음소리’나 ‘전투에의 나팔소리’나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라고 반신반의했었다. 혹여 그 ‘반신반의’야말로 시인으로서의 운명적인 고뇌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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