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 Kind (그런 여자)
I have gone out, a possessed witch,
난 밖으로 나돌았지요, 홀린 마녀,
haunting the black air, braver at night;
검은 공중에 출몰하고, 밤에 더 용감하지요;
dreaming evil, I have done my hitch
악마를 꿈꾸면서, 갈고리를 걸어왔지요(기웃거렸지요)
over the plain houses, light by light:
평범한 집들 위에, 불빛 하나하나마다;
lonely thing, twelve-fingered, out of mind.
외로운 물건, 손가락이 열두 개, 제 정신이 아닌
A woman like that is not a woman, quite.
그런 여자는 여자가 아니겠지요, 확실히.
I have been her kind.
난 그런 여자랍니다.
I have found the warm caves in the woods,
난 숲 속에서 따뜻한 동굴들을 찾았어요
filled them with skillets, carvings, shelves,
프라이팬들과 큰 포크들과 선반들로 가득 차 있더군요
closets, silks, innumerable goods;
작은 방들, 비단들,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
fixed the suppers for the worms and the elves:
벌레들과 요정들을 위해 저녁상을 차려줬지요
whining, rearranging the disaligned.
흐느껴 울면서, 흐트러진 것들을 다시 정돈했지요
A woman like that is misunderstood.
그런 여자는 이해받지 못하지요
I have been her kind.
나는 그런 여자랍니다.
I have ridden in your cart, driver,
나는 당신의 수레에 탔어요, 마부,
waved my nude arms at villages going by,
내 벌거벗은 팔을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흔들었지요
learning the last bright routes, survivor
마지막 환한 길을 배웠지요, 생존자
where your flames still bite my thigh
당신의 불꽃들은 아직도 내 허벅지를 물어뜯고
and my ribs crack where your wheels wind.
당신의 바퀴들이 구를 때 내 갈비뼈는 부서져요
A woman like that is not ashamed to die.
그런 여자는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I have been her kind.
나는 그런 여자랍니다.
<앤 섹스턴(Anne Sexton); 1928년~1974년>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요한 입센(Henrik Johan Ibsen)이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쓴 건 1879년의 일이었다. ‘인형의 집’에서 변호사의 아내 노라는 남편의 억압과 비겁한 모습에 반발하여 집을 뛰쳐나온다. 요즘 같으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되었겠지만 모든 아내들이 남편에게 종속돼 있던 당시 아내가 스스로의 삶을 찾아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파격적이어서 무대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페미니즘(féminisme)’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한 것은 1837년 프랑스의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에 의해서였다. 그는 그 이전부터 “여성의 권리 신장이 모든 사회 진보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말 그대로 ‘공상적’ 주장으로 그치고 말았다. 또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公理主義)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하나의 성이 타 성에게 법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이는 인류 발전에 크나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책까지 썼지만 21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여 ‘지적 동지’로 삼았던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Harriet Taylor) 같은 여성을 위한 개혁론이었고, 하원의원이 된 후 1869년 영국 의회 안에서는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좋은 생각일 뿐’이라는 호응밖에 받지 못했다.
여성들의 권리 신장이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여성 권리신장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이었다. 전장으로 차출된 남성들의 빈 자리를 채우고 공산주의 혁명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참전국들은 여성을 가정 밖으로 끌어내고 러시아 혁명 정부는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완전히 동등한 정치권을 주는 한편 사회생활을 권장했지만 여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성에 의한 시대적 변화였을 따름이었다. 여성들에게는 가장 불행한 전쟁과 혁명이 여성 권리신장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미국서도 1920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줬으나, 여학생의 대학입학을 허가한 것은 하버드가 1943년이었고 예일은 1969년인데서 보듯, 가사노동이나 자녀 양육 등등 보이지 않는 장벽이 겹겹이 놓여 있다는 것은 미국 남성들 또한 부인하지 않는다. 아직도 여자가 결혼하면 대부분 남성의 성(姓)을 따라간다.
앤 섹스턴 시선집, 2000년 하우턴 미플린 하코트 |
여권신장 운동이 거세게 일던 1900년대 중반 활동했던 시인 앤 섹스턴(Anne Sexton, 혼전 이름은 Anne Gray Harvey)이야말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여성이었다. 1백년 쯤 전 또는 1백년 후 쯤 태어났더라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 1928년 당시만 해도 매우 보수적이었던 메사추세츠 뉴턴에서 태어나 19세 때 알프레드 멀러 섹스턴(Alfred Muller Sexton) 2세와 결혼한 그녀는 26세 때 출산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걸린 뒤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 시도까지 한다. 그녀가 시작에 몰두하게 된 동기도 여성으로 태어나 겪는 불안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였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시의 소재나 주제 또한 여성으로서의 고뇌와 차별과 경험이었다. 월경, 낙태, 마약 중독 등등 당시로서는 여성의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던 것들을 직설화법으로 시작에 반영함으로써 술주정뱅이 대학교수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 및 섹스턴의 지음(知音)이었던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쓰(Sylvia Plath) 등과 함께 미국 시단에서는 ‘자기 고백 시인(confessional poets)’으로 불리기도 한다. 1966년 시선집 ‘살거나 죽거나(Live or Die)’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나 46세가 되던 해인 1974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 해 10월 4일 출판업자와 출판을 상의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낡은 모피코트를 입고 보드카를 끼얹은 후 차고에 들어가 차 엔진에서 배출되는 일산화탄소를 흡입함으로써 자살했다고 전한다.
섹스턴이 1960년에 발표한 ‘Her Kind(그런 여자)’도 자기 고백들 중의 하나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용모의 아가씨 앤 그레이 하비가 ‘모범적인 가정주부’ 앤 섹스턴으로 살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처녀 적에는 ‘뭔가에 홀린 마녀(a possessed witch)’가 되어 꿈꾸며 살려고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제 정신이 아닌(out of mind)’ 여자가 아닌 여자(A woman like that is not a woman) 취급을 받았고, 결혼을 하면 ‘숲 속의 따뜻한 동굴들(the warm caves in the woods)’ 같은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벌레들과 요정들(the worms and the elves)’ 같은 남편과 자식들 저녁밥상이나 차리고 집안 청소나 하며 흐느껴 우는 게 고작이었고, 나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끄는 마차의 마부(driver)가 되어 동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민소매 팔뚝을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남편의 종속물로 전락한 나머지 자아를 상실하는 위기를 맞아 ‘생존자(survivor)’가 되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화형(火刑)을 당하는 마녀처럼 허벅지를 물어뜯기고 갈비뼈가 바스러지는 고통뿐이어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여자(A woman like that is not ashamed to die)가 돼버렸다는 고백이 처절하다. 이미 그 때 자신의 자살을 예견한 것이어서, 1974년 자살을 감행하기까지 십 수 년 동안 섹스턴이 얼마나 큰 고통과 고뇌에 시달렸는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다.
섹스턴의 시상(詩想)이나 사상(思想)을 더듬어보면 지독한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 치고 섹스턴을 모르는 사람 없지만 섹스턴은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시인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그 만큼 그녀의 시재(詩才)가 뛰어났다는 반증이리라. 시라는 게 인간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인간의 정서 중 가장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게 고뇌와 고통이라면, 여성 권익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대에 여성의 고뇌와 고통을 정교한 시작으로 형상화한 섹스턴이야말로 시대를 대변했던 시인이 아닌가 싶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먼 훗날에도 섹스턴의 시가 끊임없이 읽혀지면서 시대를 뒤돌아보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 섹스턴 또한 ‘그런 여자(her kind)’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