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9일 월요일

춘야희우(春夜喜雨) - 봄비에 젖는 자기연민


매사추세츠 보스톤의 찰스 리버 사이드에 봄비가  내려 활짝 핀 벚꽃을 촉촉하게 적셨다. 봄비에 촉촉하게 젖은 벚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봄이 만개하면 오죽 좋으련만.

春夜喜雨(춘야희우)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을 맞아 내리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밤에 잠입하여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만물을 세세하게 적시면서도 소리가 없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에는 비탈길과 구름이 함께 어두운데

江船火獨明(강선화독명) 강에는 배에서 밝힌 불 홀로 환하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동틀 녘 붉게 젖은 곳 바라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꽃들이 금관성에 만발하였네    <두보; 712년-770년>


기저기서 꽃망울 팍팍 퍽퍽 터지는 소리 들려온다. 신문 독자란이나 칼럼에도 '춘(春)' '새싹'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이....' '그 추웠던 겨울이 가고...' '훈풍' 등등 봄과 관련된 단어들이 제철을 만났다는 듯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지하철 입구 자투리 공원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봄볕 즐기면서 구구구 모여드는 비둘기들을 향해 빵 쪼가리 던져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얼굴에도 윤기가 돈다. 가벼운 발걸음, 부산한 움직임, 부쩍 증가한 소음....태양 주위를 돌면서 자전하는 지구의 축이 약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년 이 때쯤이면 더 많은 태양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이토록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세상의 변화라는 게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간사한 변화로 인한 흥분을 가라앉혀줄 봄비[春雨]라도 촉촉하게 내리면 금상첨화이리라! 

한자 '春'은 풀 초(艸)와 태양 일(日) 그리고 싹(철)이 땅(一)을 뚫고 나오는 형상의 둔(屯)자가 합쳐진 것으로서 풀밭에 태양이 비쳐지는 가운데 싹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그렸다. 영어 'spring' 또한 어원이 '뛰다' '솟다'라는 의미의 고대 노르웨이어 'springa'로서 봄에는 새싹이 솟고 사람들의 몸놀림이 가벼워진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인의 '봄'은 꽤나 자기중심적이고 감성적이다. '봄'은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본다'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 '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닌 객체를 인식하는 것인 바, 봤는데도 인식되지 않을 경우 김소월이 '산유화'에서 읊었듯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비아(非我)의 변화에 그치고 만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는 겨울처럼 암울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꽃피고 새가 우는 봄이 또 오면 세상에 대한 괴리감과 함께 더욱 더 극심한 자기 연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 비 우(雨)는 하늘[一에]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형적인 상형문자로서, 농사로 먹고 살았던 농경문화권에서의 비는 초목을 생장시키는 매우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이자 절기 변화의 전령사, 봄에는 만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감우(甘雨)가 내리고 여름에는 구름[雲]이 천둥[雷]과 번개[電]를 동반한 임우[霖]가 내리고 가을에는 이슬[露서]과 서리[霜]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雪]이 내린다. 그런 우(雨)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는 게 농경문화권 사람들의 습성이었던 바, 비가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겠다. 반면 영어 'rain'은 농경문화권 사람들이 우러러 마지않았던 하늘[一는]과는 무관하게 'water falling in drops condensed from vapor in the atmosphere(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축되어 떨어지는 물)'로서 국지적 기상변화의 일종으로 인식된다. 'rain'의 뿌리는 '비'를 뜻하는 고대 고지 게르만어 'regan'으로서 12세기 이전에도 쓰임새가 보이지만 문학적 소재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로서 농경문화권의 인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후세에 그려진 두보 초상화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春夜喜雨(춘야희우)'는 봄날의 자기 연민을 봄비에 촉촉하게 적시면서 지은 작품으로 보인다. 전화를 피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떠돌다가 50세 무렵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짓고 전원생활을 할 때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로서 금관성(錦官城)은 청두의 옛 이름, 흔히 "희망이 생동하는 봄날 밤비가 내리는 정경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건 껍데기만 봤을 뿐 알맹이는 못 본 것, 두보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만물을 생육하는 봄비에 적셔 위로받고자 했다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 된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의 들길과 구름과 어두움은 암울한 현실, 강물 위의 배가 홀로 밝힌 불은 간절한 희망, 꽃이 만발한 금관성의 안이 아니라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면서 지은 시라는 것을 감안하면 '희우(喜雨)'는 단순히 '기쁜[喜] 비'가 아니라 '슬프고 서러워서 팍팍해진 자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좋은[好] 비'로 해석해야 한다. 첫 구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의 첫 머리를 '喜雨(기쁜 비)' 대신 '좋은 비(好雨)'로 시작한 것도 그런 암시 중의 하나, '시절'은 '봄'을 뜻하기도 하나 '간난을 극복하고 생동하고픈 두보의 불우한 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비이므로 기쁠 희(喜) 대신 좋을 호(好)를 쓴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대기 중의 습기가 많아지면 비가 오는 것은 당연지사이건만 불우한 처지의 자신을 연민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기 마련, 그걸 누가 감히 비웃으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실패한 사람들이 두보의 시에 푹 젖어드는 것 또한 감정이입의 탓이 아닌가?! 기쁘고 슬픈 건 계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세상에는 봄이 와서 꽃들이 만발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가슴 속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봄비가 소리 없이 내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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