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Ich, der Überlebende - 지식인의 자학


퇴근 시간 맨해튼에서 퀸즈로 빠져나오는 전철 안 풍경. 저마다 상념에 사로 잡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서글픈 진실을 곱씹고 있는 건 아닌지.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Bertolt Brecht; 1898년-1956년>


아남기 위해 애쓰는 것을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이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자원(먹이·생활공간 등)에 관해 공통의 요구를 가지는 생물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이라고 부드럽게 정의되지만 실상은 혹독하기만 하다. 한자 ‘생존(生存)’도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날 생(生)은 싹(ꟈ)이 땅 위(一)로 돋아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있을 존(存) 또한 싹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양의 재주 재(才)와 아들 자(子)가 합쳐진 것으로서, 새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그게 재주를 부려 살아남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생존투쟁’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진화론의 비조 찰스 R. 다윈, 그는 “환경조건에 따라 적응한 변이가 생존경쟁의 결과로서 보존되며, 생물이 서서히 변해가면서 새로운 종(種)이 만들어진다”는 자연선택설을 제창했었다. 모든 생물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윈의 생각은 인간사회로 재이입(再移入)되어 전쟁이나 인종·계급의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회진화론의 모태가 됐었고, 최근에도 영국 옥스퍼드대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유전자는 이기적이며 유전자의 이기성이야말로 개체 이기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스꽝스런 이야기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나 하다 못해 최근의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논란’이나 ‘영포 게이트’도 그런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고향만 개발하고 고향 선후배들만 등용하면서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도 생물학적 이기심의 발로로 보면 틀림이 없다. 

‘생물학적 이기심’은 타인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체면이나 인격 또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데 가장 큰 멍에다. 추하다. 그래서 일찍이 계몽주의 시대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바,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양(委讓)하여 평화적인 공동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했었으나, 법적인 강제보다는 양심과 도덕이 더 효과적이고 보기에도 좋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생물학적 이기심’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을 교양과 인격의 가늠자로 여기고 있음을 본다. 

20세기 서양 연극사를 대표하는 희곡작가이자 연출가로 손꼽히는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도 ‘생물학적 이기심’을 양심과 도덕률로 억제하려고 애썼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나치 독일에 반발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심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생물학적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브레히트에게 있어서 지식인의 책무란 ‘나’ 아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었다. 1898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자본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나치 집단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비판하다가 무려 15여 년간이나 망명을 했었으며, 이윽고 나치 독일이 무너진 후 서(西) 베를린이 아닌 동(東) 베를린으로 귀환하여 자기의 작품들과 ‘서사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에 몰두했었다. 

‘Ich, der Überlebende’를 직역하자면 ‘나, 살아남은 자’, 그러나 한국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소개됐다. 역자(譯者)가 나름대로의 감상으로 의역한 것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자의식(自意識)이 허락하지 않는 짓들을 서슴지 않은 자신을 벌주고 싶어 한 브레히트의 의도가 묵살(?)한 감이 없지 않아 아쉽다. ‘haßte’의 뿌리는 ‘증오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고지 게르만어 ‘haz’이고 ‘haz’는 ‘돌보다’ ‘염려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kēdos’와 같은 의미였던 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자의식이 허용하지 않는 행위를 했을 때 더 많이 자책한다는 의미가 읽혀지므로, 브레히트는 유독 그 단어를 골랐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한 자기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슬픔’이라고 해석하는 건 읽고 번역하는 사람의 자유겠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염려한 나머지 자신을 혹독하게 징치하고자 했던 브레히트의 ‘생물학적 이기심 극복’까지 도매금으로 간과해서는 아니 될 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브레히트는 세상으로부터 ‘강한 자’로 인정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살아남다’ ‘생존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survive’의 뿌리는 ‘초(超)’ ‘-를 능가하는’을 뜻하는 접두사 ‘super-’에 ‘살다’라는 의미의 ‘vivere’가 붙은 라틴어 ‘supervivere’로서 한 때는 ‘재빠른’을 뜻하는 ‘quick’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던 바, 살아남기 위해서는 잽싸야 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단물이 빠진 껌은 가차 없이 내뱉고, 권력이 바뀌면 잽싸게 신발을 바꿔 신고, 남들보다 먼저 이득을 취해야 ‘강한 자’로 인정받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브레히트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런 아픈 곳을 콕콕 찌르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돈 많이 벌고 큰 권세 휘두르는 사람일수록 자의식의 채찍을 아프게 맞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세상살이가 참 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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