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장진주(將進酒) - 관주(觀酒)들을 위한 권주가


將進酒(장진주)

琉璃鐘(유리종) : 유리잔
琥珀濃(호박농) : 호박빛 액체
小槽酒滴眞珠紅(소조주적진주홍) : 작은 술통의 술방울 진주처럼 붉네
烹龍炮鳳玉脂泣(팽룡포봉옥지읍) :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니, 옥 같은 기름 눈물 흘러내리고
羅屛繡幕圍香風(나병수막위향풍) : 수놓은 비단으로 병풍 치니, 향기로운 바람이 에워싸네
吹龍笛(취용적) : 용의 피리를 불고
擊鼉鼓(격타고) : 악어 가죽 북을 치니
皓齒歌(호치가) : 하얀 치아의 미인이 노래하고
細腰舞(세요무) : 가는 허리 미인은 춤을 추네
況是靑春日將暮(황시청춘일장모) : 하물며 이 청춘도 저물려하는데
桃花亂落如紅雨(도화난락여홍우) : 복사꽃도 붉은 비처럼 어지럽게 떨어지는구나
君終日酩酊醉(권군종일명정취) : 그대여 종일토록 흠뻑 취하여 보라
酒不到劉伶墳上土(주부도유령분상토) : 술이 유령(劉伶)의 무덤 흙 위엔 도달하지 못하였도다

                                                       <이하(李賀); 790년-816년>

구멍으로 술술 잘도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라고 명명했다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부어라 마셔라 나도 취하고 세상을 취하게 만들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시인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로 따지자면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수는 없는 ‘관주(觀酒)’로 승단(昇段)한 것 같다. 술 한 잔 마시면 잇몸이 붓고, 두 잔 마시면, 울적해지면서 고향 생각이 나고, 세 잔 마시면 그 다음 날 아침 머릿속과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정신력과 체력이 쇠퇴하여 몸이 술을 즐기는 게 아니라 술이 몸을 혹사시킨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이빨이 바닷가 오두막 사립문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한 이후 딱딱한 음식을 씹지 못해 씹지 않고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술을 너무 많이 즐긴 탓이리라. 자의반 타의반 술을 끊게 생겼다. 나이 50 중반에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나 술을 끊었다”고 침 튀기는 친구들의 알량하고도 서글픈 속사정을 이해하게 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인가?! 지난 연말 한국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모 한인 단체장으로부터 기사 잘 써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로 받은 조니워커 블루의 뚜껑을 차마 열지 못하고 침만 꿀꺽 이리 만지고 저리 살펴보고만 있음에 고참 관주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의 중장년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재수생 시절이었다. 명문대로 상징되는 제도권 진입을 거부당했다는 열등감과 모멸감을 삭히는 한편 “내가 취하면 세상도 취한다”고 굳게 신봉하여 세상 돌아가는 꼴이 못마땅할 때마다 술을 마셨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로 배운 게 술판 밖에 없어서 기분 좋아 한 잔 기분 나빠 한 잔, 시나브로 술을 친구로 삼게 됐던 것 같다. 시인묵객이나 한량으로 행세하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한자문화권의 전통의 격려(?)를 받으면서 부어라 마셔라 청춘을 술에 절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어깨에 짊어진 사회적 체면과 책임감을 내려놓을 때도 술기운을 빌렸던 듯하다. 술에 취해 한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들 틈에서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을 때나, 망가져서 긴장을 풀고 싶을 때나, 서먹서먹한 인간관계에 기름칠을 하고 싶을 때 마신 술을 돈으로 환산하면 집을 몇 채 장만하고도 남았을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 다정한 벗과 이제는 헤어져야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다. 섭섭하다 못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관주’에서 머무르는 수밖에. 더 이상 미련을 홀짝거리다가는 주도 18단계의 마지막 ‘열반주’로 승단할까봐 겁난다. 

이하 시선집, 1962년
한흔 출판사
염세적이고 몽환적이어서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도 관주(觀酒)에 머물렀던 것 같다. 몰락한 당 황실의 후예로 17세 때 대문장가 한유(韓愈)를 만나 시재를 인정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벼슬길까지 막혀 능가경(楞伽經)과 초사(楚辭)나 읽으면서 “이제 길이 이미 막혔거늘(祗今道已塞) 어찌 꼭 머리가 희어지기를 기다리랴(何必須白首)”고 탄식했던 그는 양보다는 질을 즐겼던 진정한 의미의 애주가였다. 술 그 자체보다도 술자리의 분위기에 취했다. 그에게는 음주가 곧 탐미(眈美)였던 것 같다. ‘유리종(琉璃鐘) 속의 호박농(琥珀濃)’을 요즘말로 풀면 최고급 크리스탈 술잔에 담긴 최고급 스카치위스키나 코냑, 종이컵에 싸구려 화학주를 마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바, ‘하얀 치아의 미인’과 ‘가는 허리 미인’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술 한 잔을 마셔도 깔끔하고 고상하게 마셨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랬다. 이하는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깔끔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했다. 20세 때 그의 재능을 인정한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추천을 받아 진사시험을 치르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사(進士)의 ‘진(進)’이 음이 같으므로 시험을 치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관습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성격 자체가 그러했다. 약관의 나이에 백발이 되어 별종(別種) 의식을 부풀린 탓도 있겠으나, 성격이 섬세하고 고아하여 시정의 탁류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는 “천제(天帝)가 백옥의 높은 누각을 세운 기념으로 시를 짓게 하려고 나를 부르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하를 기려 ‘이장길 소전(李長吉 小傳); 장길(長吉)은 이하의 자(字)’을 지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어느 날 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상제께서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하려 한다’고 쓰인 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죽었다”고 부풀리기도 했다. 그 이후 문인의 죽음을 “백옥루(白玉樓) 안의 사람이 된다”고 표현하게 됐다. 마지막 구절 "酒不到劉伶墳上土(주부도유령분상토)"는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서 술을 무척이나 즐겨 ‘주덕송(酒德頌 )’까지 지었던 서진(西晉)의 시인 유령(劉伶)의 고사를 상기시킨 것, 유령은 자신이 언제 술에 취해 죽을 지도 모른다며 외출할 때 항상 괭이를 들고 다녔는데, 정작 그의 묘에는 술이 부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죽으면 못 마시는 술, 살아 있을 적 실컷 마시라는 충고(?)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눈으로만 즐기게 된 이 세상의 모든 ‘관주’들에게 이하의 ‘장진주’를 권한다. 바라보고 만지작거릴 술이 없으면 지난 연말에 받은 조니워커 블루를 기꺼이 내어 주리라.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정을 함께 공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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