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수요일

맨발 - 생(生)의 간난(艱難), 그 슬픈 수오지심(羞惡之心)


뉴욕 로우어 맨해튼 중심부 메디슨 스퀘어 파크에서 한 일용직 노동자가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 오늘도 일감을 찾지 못하고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가리라.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2004년, 창작과 비평, 문태준; 1970년- >

람이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게 삶, ‘사람’ ‘살림살이’ ‘삶’은 모두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됐다.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것을 ‘가난’이라고 한다. '가난'의 어원은 어려울 간(艱) 어려울 난(難) '어렵다'는 의미가 중첩된 한자어 '간난(艱難)', 동음생략으로 앞쪽의 'ㄴ'이 떨어져 나가 가난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집 가(家) 어려울 난(難) '가난'(家難)과 연관이 있다고 우기지만 '家難'은 '집안의 재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살림살이가 딱하고 어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난의 동의어로 쓰이는 '빈곤'(貧困)을 들여다보면 가난의 실체가 보인다. 가난할 빈(貧)은 돈(貝)을 쓸 곳은 많은데 아무리 나눠도(分) 여의치 않은 형편을 일컫고, 괴로울 곤(困)은 나무(木)가 울타리(口)에 막혀 답답한 형상, 돈이 없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는 의미다. 영어 'poor'와 'poverty'의 뿌리 역시 '적다' '모자라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auper'다.

누군가 ‘가난은 불편한 것일지언정 수치(羞恥)는 아니다’라고 말했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간이란 게 영(靈)과 육(肉)의 복합체이고, 영은 형이상학적 양식을 먹고 사는 반면 육은 형이하학적 양식을 먹고 산다고 가정하면, 육의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영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바, 그게 지나치면 영과 육이 따로 돌아가면서 감정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 수치(羞恥)라는 말 또한 그 점을 암시해준다. 바칠 수(羞)는 그 옛날 제사 때 희생으로 쓰던 양(羊)과 소[丑]를 합쳐놓은 것이고, 부끄러워할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것으로서 신 또는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 마음으로 바친 양이나 소가 모자라는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제사 때 바친 양이나 소가 육적・물질적인 것이라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영적・정신적인 것으로서 그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수오지심(羞惡之心) 의지단(義之端), 일찍이 맹자가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옳음(義)의 단(端)이라고 역설했던 것도 영과 육의 교호작용을 간파했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항산이 있어야 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有恒産 有恒心)”고 주장했던 그는 “수오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라고 단정하기도 했었다.

시(詩)라는 것 또한 수오지심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육의 행위로 인해 영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승화하여 평정을 얻고자 하는 시도로서, 삶의 간난(艱難)이 시의 소재로 각광받는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보이거니와, 소재와 주제의 공통분모가 커질수록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 같다. 1970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한 후 1994년‘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署)’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젊은 시인’ 문태준도 그런 시인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육적인 가난을 영적인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문태준 개인의 성장사가 그런 재주를 배양시켰는지 모르겠으나 이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시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음을 본다.

어물전 개조개를 소재로 한 ‘맨발’은 그 중 백미(白眉)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가난의 상징인 움막, 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는 모습을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인 것에 비유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가난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영혼을 정화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부처의 제자처럼 삼가고 또 삼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는 대목은 너무 진지하여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개조개는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을 거라는 동병상련에는 부처도 감동할 것 같다.

문태준은 지난 2005년 도서출판 ‘작가’가 시인・문학평론가 등 문인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5 오늘의 시’ 설문조사에서 그의 또 다른 수작 ‘가재미’가 ‘가장 좋은 시’로 꼽히면서 그 자신 또한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됐었다. ‘가재미’는 임종을 앞둔 ‘그녀’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고통을 그린 것으로서, 훗날 문태준은 ‘그녀’에 대해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했던, 살붙이나 다름없던 큰 어머니’라고 밝힌 바 있는데,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는 대목에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토록 섬세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역시 육(肉)의 간난을 영(靈)의 감동으로 승화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슬픔은 육적인 간난을 영적으로 정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 같은 것, 시인들이 슬픔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게 삶의 진액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올해 나이 40에 지나지 않는 문태준은 “젊은이답지 않게 참으로 진지한 시를 쓰고 있다”는 칭찬을 들어 마땅할 것 같다. 이 땅 위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고 영혼의 갈증을 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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