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목요일

산중문답(山中問答) - ‘비인간(非人間)’을 지향한 ‘인간(人間)’


산중문답(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나에게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매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로워지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 꽃잎 물위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로세  

                                                      <이백(李白); 701년-762년>

람은 사회적 동물,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사람 인(人)은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문 문(門) 속에 해 일(日)을 넣은 사이 간(間)의 원형은 ‘日’ 대신 ‘月’이 들어 있는 틈 한(閒)이었으나 인간이 달보다는 해에 맞춰 활동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나서는 ‘間’으로 굳어졌던 바, ‘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나 그 사회의 구성원을 말한다. 이른 바 ‘삼간(三間)’의 하나다. 고대 중국인들은 광대무변한 우주 즉 하늘[天]과 땅[地] 사이를 공간(空間)이라고 했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시[時]의 영속을 출생이나 사망 등 특정한 사건과 사건 사이로 토막 내 기억하는 것을 시간(時間)이라고 했으며, 그 공간과 시간에서 태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것을 인간(人間)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유기적 관계보다는 개체적 존재를 강조하는 ‘인(人)’과는 말맛이 확연히 다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산다는 게 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욕망 추구다. 속세(俗世)의 속(俗)자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俗’은 사람 인(人)에 곡식 곡(穀)의 간자체인 골 곡(谷)이 붙은 것이고, ‘谷’은 아가리를 크게 벌린 골짜기의 형상을 그린 것인 바, 먹고사는 문제로 아옹다옹하면서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덤벼드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찰이 읽혀진다. 영어로 말하자면 ‘interest’다. ‘interest’의 뿌리는 ‘사이’를 뜻하는 접두사 ‘inter_’에 ‘놓이다’ ‘존재하다’라는 의미의 ‘esse’가 붙은 ‘interesse’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돈이나 명예 또는 권력 등의 관심사를 말한다.

이백 초상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대해 혹자는 도연명(陶淵明 ;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세상살이의 핵심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못 본 척 했던 이백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백이 도연명의 3,4백년 후배(?)여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속세와는 확실하게 유리된 이상향(理想鄕)을 꿈꿨던 반면 이백은 ‘산중문답’에서 지저분한 인간사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극복하고자 애썼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알고도 안 하는 것과 몰라서 안 하는 것은 천지차이, 흔히 이백을 ‘시선(詩仙)’이라고 하여 일부러 인간사를 멀리한 산중의 도사쯤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 이백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겪는 갈등과 고뇌를 천형처럼 수용하려 했던 ‘人間’이었다.  

인간이라는 말이 한정하고 있듯이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 이백 또한 그걸 절감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산중(山中)’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는 ‘인간(人間)’의 상대적 개념, 거기에 인간세상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인 문(問)과 답(答)을 대비시킨 것이야말로 모순이라면 모순, 창녀에게 순결이 무어냐고 묻는 장난기가 도를 넘어 자조와 자학으로 치닫고 있음을 본다. 먹고사는 욕망을 추구할 하등의 필요나 당위가 없는 산중에서 사는 이유를 묻는 덜 떨어진 놈에게 진지하게 답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더니 마음이 절로 한가로워지더라는 지독한 경멸이 바로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다. 7언절구의 경우 1,2,4구에 운(韻)을 맞추는 바, ‘산중문답’의 경우 첫째 구의 ‘산(山)’과 둘째 구의 ‘한(閑)’, 넷째 구의 ‘간(間)’이 운을 이루고 있는데, ‘산’이 이상향이라면 ‘한’은 그걸 추구하는 심정적 태도를 말하고 ‘간’은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현실 인식, 그걸 복숭아 꽃잎이 물위에 떠 흘러가듯 자연스레 꿰맞춘 천재성과 치밀함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낙천적이고 호방했던 이백에게 있어서 별천지(別天地)는 인간과 무관한 선경(仙境)이 아니라 ‘비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人間’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고뇌를 벗어나는 지름길은 ‘非人間’, 그걸 추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술을 좋아했던 것도 알콜 중독자들처럼 술 그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맨 정신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여이동소만고수(與爾同消萬古愁)! 저 유명한 ‘장진주(將進酒)’의 끝을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을 삭여보리라”고 맺은 것도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시름을 술로써나마 달래보자는 게 아니었던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면서도 ‘비인간’을 지향했던 이백이야말로 진짜 휴머니스트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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