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타는 목마름으로 - 베낀 시와 가짜 민주주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다. 그 때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렸지만 지금도 독재세력들이 북한이 사주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5년, 김지하; 1941년- >


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다. 미국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었고 제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도 1787년 11월 13일 대륙회의 뉴욕주 대표 윌리엄 S. 스미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로 다시 생생해져야만 한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고 썼었다. 하긴 프랑스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웃기는 가정이지만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을 꼬드겨 제정 러시아의 신분제 사회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많은 인민이 압제자들이 돌리는 맷돌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 토를 달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의 애국자나 압제자의 피보다는 미국 등이 꽂아준 링거 주사를 더 많이 맞고 컸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선지 아직도 목이 탄다. 해방 후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왜 때리느냐고? 그건 내 자유지” 하고 킬킬거리던 사람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떠받들면서 독재의 콩고물을 나눠먹었고,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해괴한 ‘짝퉁 민주주의’로 국민을 윽박지르면서 지역 편중 개발 및 인사로 영구집권을 획책했었으며,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새싹이 겨우 기지개를 켰으나, 삽질 좋아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말라비틀어졌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실업자 청년의 온라인 게재 글까지 트집 잡는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명예훼손소송이니 뭐니 유형무형의 재갈을 물리고, 정권과 기득권층이 똘똘 뭉쳐 “우리가 하면 로맨스, 너희들이 하면 불륜”이라고 합창을 해대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건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트집이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 전 세계 각국의 인권과 자유를 감시하는 국제 엠네스티도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자 대량 기소, 전교조 교사 대량 파면, 천안함 사태 조사 결과 비판자 고발 등등을 예로 들면서 “정치참여와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었다. 

김지하(본명 김영일)가 ‘타는 목마름으로’를 쓴 것은 박정희 독재가 극에 달해 독기를 내뿜던 70년대 초,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지하가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투옥 10개월만인 1975년 2월에 풀려나 몰래몰래 퍼뜨렸던 것으로서, 김지하는 100% 자신의 창작임을 주장하겠지만 기실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시 ‘자유’의 프레임과 화법을 슬그머니 차용한 것이었다.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맞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앞장섰으며, 1942년 영국의 항공편대가 ‘자유’가 첫머리에 실린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지에 살포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나의 학습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의 ‘자유’의 앞과 끝 부분> 

어떤가? 옷만 바꿔 입었을 뿐 몸뚱이는 똑 같은 것 같지 않은가? 표절이라고 몰아붙이면 김지하가 두 눈을 치켜 뜨겠지만, 학창시절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했던 김지하가 프랑스 미학 서적을 뒤적이다가 엘뤼아르를 접했을 것이고, 거기서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류의 작품을 쓰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의 흉내 내기로 시작된 것을 패러디하듯 반독재 저항시가 자유주의 혁명의 본산인 프랑스의 시인 흉내 내기로 탄생한 것만 같아 쓴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반독재 저항시로 명성을 얻은 김지하는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가 주는 ‘로터스(LOTUS)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의(Poetry International)가 주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는 등 일약 ‘한국의 엘뤼아르’로 떠올랐었으나, 90년대 초 생명사상이 어쩌고저쩌고 노태우 독재 타도 시위학생들에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다가 졸지에 변절자로 몰렸었던 바, 과거 반독재 시위에 앞장서다가 지금은 여권에 몸을 담아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자유와 인권을 제약할 수도 있다”고 침 튀기는 데모꾼 출신 정치인들이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냐?”고 비실비실 웃고 있음을 본다. 지난 대선 때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공로(?)를 인정받았는지 요즘 여당 성향 매스컴에 얼굴을 자주 내밀고 있는 것을 보면 김지하의 머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까먹은 지 오래 됐는지도 모르겠다. 베낀 시와 가짜 민주주의의 생얼굴을 보는 것 같아 눈쌀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쨌거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목이 탄다? 그런 것 같다. 김대중 정권이 기득권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 의료보험 확대를 밀어붙인 덕분에 병원비 안 들이고 수명을 연장하게 된 달동네 노인네들까지 “빨갱이 김대중의 묘를 파헤치자”고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은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덜 마신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고, 박정희나 전두환․노태우 독재 때는 대통령 발뒤꿈치만 봐도 벌벌 떨던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개대중이 때려잡자’ ‘노개구리 잘 뒈졌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 자유고 뭐고 지연․학연으로 권력에 빌붙어 감투나 이권 부스러기 나눠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주주의라는 게 사치품인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부정권을 거치는 동안 유형무형의 혜택을 입은 특정지역 사람들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보면 타는 목을 축인답시고 콜라 잔뜩 들이키고나서 트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순수한 열정으로 독재자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여 '타는 목마름으로'를 낭송하던 김지하와 폭삭 늙어버린 후 민주주의고 뭐고 남들이 알아주고 대접해주기만을 바란다는 듯이 박정희 딸 박근혜를 공개지지한 후 매스컴에 얼굴을 들이내밀고 있는  김지하, 한국의 민주주의 나무가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마실 수 없다면 별 볼 일 없는 시인 나부랭이들의 반성이라도 실컷 마셔야 조금씩이나마 자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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