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5일 목요일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보스톤 알스톤의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캠브릿지의 하버드 기숙사 단지를 연결하는 다리. 하버드 재학 중에 만난 연인들이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졸업기념으로 난간의 벽돌을 떼어가기도 한다. 먼 훗날 다시 찾은 이 다리 위에서 '미라보 다리'를 읊조릴는지도 모르겠다.



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른다 
Et nos amours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Faut-il qu'il m'en souvienne                                 나는 기억해야만 하나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                   괴로움 뒤에는 늘 기쁨이 따랐다는 것을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Les mains dans les mains restons face à face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Tandis que sous                                                 그 동안 저 아래서는 
Le pont de nos bras passe                                  우리가 팔짱 끼고 걷는 다리 아래서는 
Des é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매우 느린 물결이 영원의 눈길을 보낸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멀어져간다. 
L'amour s'en va                                                  사랑은 멀어져간다 
Comme la vie est lente                                        삶은 왜 이다지도 느린가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                       희망은 또 왜 이다지도 강렬한가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Ni temps passé                                                  가버린 시간도 
Ni les amours reviennent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1912, Guillaume Apollinaire; 1880년-1918년>

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모든 게 다 흘러간다. 하다못해 노래도 흘러간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작달막하고 예쁘장한 체구에 코맹맹이 음색으로 인기를 끌었던 가수 혜은이가 1979년에 불러 크게 히트했던 ‘제3한강교’(길옥윤 작사․작곡)도 어느 덧 왕년의 뽕짝이 돼버리고 말았다. 제3한강교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유사시 서울시민 피난과 경부고속도로를 위해 건설한 한강 위의 3번째 다리, 그러나 본래 목적(?)과는 달리 ‘강남 부동산 투기 다리’ 또는 ‘강남 유흥가 가는 다리’가 돼버렸고, ‘제3한강교’ 또한 당초에는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으나 독재정권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불허하여 그 부분을 뺀 채 검열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제 그 노래를 만든 길옥윤도 저 세상으로 갔고, 평생 늙을 것 같지 않던 혜은이도 초로의 아줌마가 돼버렸고,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데서 보듯 사람들을 옥죄던 박정희 독재정권도 아픈 역사가 돼버렸다. 싫든 좋든 모두 다 제3한강교 밑의 한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다는 점에서 무상함을 금할 수 없다. 

흐른다? 흐름이 뭔가? 흐를 류(流)는 물 수(水)에 양수가 터져 아기의 머리가 나오는 모양을 그린 류(㐬)가 붙은 것으로서 본래는 ‘아이가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다’라는 의미였다고 하는 바, 인간이 본성적으로 ‘흐름’에 친숙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또 ‘흐름’은 중단 없는 영속성(永續性)을 뜻하는 바, 세월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든지 인생을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부평초(浮萍草)에 비유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거니와, 영원히 흐르는 세월의 강물 위에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것을 ‘유전(流轉)’이라고도 했다. 

기욤 아폴리네르
인생유전(人生流轉), 그 흐름을 누구라서 거역할 수 있으랴.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했으나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귀화하여 성장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또한 인생은 유전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짧은 생애 동안 마음 내키는 대로 좌충우돌 살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버지 없이 자라서 그런지 반항적이었고, 젊었을 적엔 포르노 소설을 써서 밥벌이를 했는가 하면(물론 본인은 부인했지만) 명화 ‘모나리자’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후 1917년 기존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한 채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한 부조리극 ‘티레지아의 유방(Les mamelles de Tirésias)을 발표하여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한때 루브르 박물관을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미라보 다리’는 아폴리네르가 27세 때 사랑하던 여인과 이별한 후 현실과 추억 속의 갈등이 교차되는 가운데 옛 사랑을 잊지 못하여 쓴 시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단순한 사랑과 이별의 시는 아니다. 사랑과 이별은 곁가지일 뿐 끊임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내쳐진 한 영혼의 절규가 줄기다. 어떤 불문학자는 첫 번째 연 후반부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를 “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라고 번역했으나 그보다는 “나는 기억해야 하나/ 괴로움 뒤에는 늘 기쁨이 따랐다는 것을”이 옳다. “사랑은 저 멀리 흘러가는데...예전에도 그랬듯이 이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 기쁨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하느냐”는 절규인 것이다. 세 번째 연 후반부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도 마찬가지다. 흔히 “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서생들의 넋두리, “삶은 왜 이다지도 느린가/ 희망은 또 왜 이다지도 강렬한가”라고 감정을 푹 집어넣어 격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멀어져 가는데....이 고통스런 삶의 시간은 왜 이리도 늦게 가는지 그리고 그녀가 돌아설 지도 몰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등등의 희망은 왜 이다지도 강렬한지 모르겠다는 한탄 통탄을 빼놓으면 이 작품은 앙꼬 없는 찐빵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미라보 다리’를 감상할 때는 아폴리네르가 성질 급하고 정열적인 사람들 많은 이탈리아에서 출생했고 기존의 가치와 권위를 깡그리 부인하는 초현실주의자였다는 점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흐름’ 속의 ‘머물음’에 주목해야 한다. 단언컨대 ‘미라보 다리’의 주제는 사랑의 상실과 이별의 아픔이 아니라 그런 상실과 아픔을 세월의 흐름 속에 던져버릴 때의 처절한 체념(諦念)이다. 그것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오기로 절규하면서 수용하는 옹골진 체념, 각 연 말미에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라는 후렴구를 붙여놓은 것도 그런 옹골진 체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모든 게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처럼 흘러가도 자신만큼은 머물겠다던 아폴리네르마저 이제는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무상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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