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2일 월요일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 ‘막다른 골목’ 질주하는 현대인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오감도(烏瞰圖)  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1934년 '조선중앙일보', 이상; 1910년-1937년>


안(不安)에 최초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불안 철학’(Philosophy of anxiety)의 기반을 닦았던 독일 철학자 M.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인간은 세계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원초적인 공포 때문에 늘 불안을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지만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에 휘말려 잠시 잊고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었다. 또 절망적인 자기상실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일컬었던 S .A. 키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는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이라는 질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며 “불안의 교화(敎化)를 받아 신앙으로 귀의(歸依)할 수 있고 화해에 의해 비로소 평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었다.

젊은 날의 시인 이상
불안을 공기처럼 들이마시고 사는 오늘, 시인 이상(李箱)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너무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쳐 중단했다는 ‘오감도’(烏瞰圖)를 다시 읽어보면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든다. 천재 시인 이상의 작품이 그 만큼 시대를 앞서 갔다는 증거이리라. 제1호시를 놓고 당시 우리나라의 도(道)가 13도였으므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한다느니,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느니, ‘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를 상징한다는 등등 별별 해석들이 나돌고 있지만 기실은 쓰인 그대로 시인 자신이 ‘까마귀(불안한 관찰자의 모습)’가 되어 ‘13인의 아이(현대인)’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1의 아해’부터 ‘제13의아해’가 모두 무섭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시인의 관찰이 암호문 같은 숫자와 단어의 조합을 알기 쉽게 풀이해준다. 현대인은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하며,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도로를 질주하지만, 결국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막 다른 골목’은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질주’는 급변하는 삶의 속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모는 것 같은 심리를 잘 그렸다.

‘오감도’를 영역하여 뉴욕타임스에 연재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국경제가 금융위기로 인한 불황에서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가운데 불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바,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는커녕 동병상련의 감상문들이 쇄도할 것 같다.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어떤 길을, 왜 가야하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질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실제로 엊그제 한 시사주간지는 “불안장애는 가장 흔한 정신병의 일종이지만 미국인 대부분이 이를 병으로 자각하지 않고 치료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의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도 했었다. 미국 내 불안장애 환자가 1천9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치료를 받은 사람이 25%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뿐 자기 자신을 치유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76년 전 식민지 조선의 한 천재시인이 간파했던 것처럼 모두들 ‘무섭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무서운 아해’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그렇다면 선택은 별로 없어 보인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든지, 종교에 귀의하든지, 사랑을 하든지, 그래도 불안하면 죽음을 수용하는 수밖에. 물론 그 때는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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