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목요일

강촌(江村) - '쉰세대' 남자의 고독과 체념

매사추세츠 보스톤과 캠브릿지 사이를 흐르는 찰스 리버 풍경.  나이 들어 강가에서 살면 왠지 쓸쓸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촌(江村)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가 마을을 안고 흐르니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 강촌의 일마다 그윽하구나

自去自來堂上燕 (자거자래당상연)    절로 가고 절로 오는 건 집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驅 (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운 건 물 가운데의 갈매기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마누라는 종이에 장기판이나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병이 많아 바라는 바 약물(藥物) 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보잘 것 없는 몸이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두보; 712년-770년>

자(男子)의 남(男)은 그 옛날 생산의 원천이었던 밭 전(田) 아래 힘 력(力)이 붙은 것, ‘생산성’을 상징한다. 남자가 그걸 상실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요즘 인생 내리막길에 접어든 ‘쉰세대’ 남자들이 명퇴다 뭐다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세상 경쟁에서 밀려나 낙오자가 됐을 때 극심한 충격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데 대한 당혹감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당혹감을 곱씹어야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서럽건만 이빨은 사립문처럼 흔들흔들, 노안이 돼버린 두 눈은 신문지의 활자 따위에도 조롱을 당하는데, 아랫배는 주책없이 불룩 튀어나오고...그럴 때마다 온몸을 감싸는 건 무기력감과 고독감 뿐, 남자는 갑자기 자신이 부쩍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두보 초상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49세 때 성도(成都)에서 처자식과 함께 초당을 짓고 모처럼 만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760년 어느 여름날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7언율시(七言律詩) ‘강촌(江村)’도 그런 ‘쉰세대’ 남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후대 사람들은 두보를 ‘시성(詩聖)’이라고 추앙하고 있지만 당대의 두보는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었다. 남편이나 가장으로서의 생활력은 시쳇말로 젬병이었다. 30대 중반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이러 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에게 부(賦)를 바쳤으나 아무런 감투도 얻지 못한 채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던 참 무능한 가장이었다. 755년 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봉상(鳳翔, 장안의 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간 덕분에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으나 얼마 후 쥐뿔도 없이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옷을 벗는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주(華州)의 지방관리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진주(秦州)의 천수시(天水市)와 동곡(同谷)의 성현(成縣)을 거쳐 사천의 성도에 정착한다.

성도는 사천성(四川省)의 성도(省都)로서 삼국시대에는 유비가 이곳에서 촉한(蜀漢)을 세웠고 안록산의 난 때 현종이 피란하여 남경(南京)이라 일컫던 곳, 논밭이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여 없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먹고살기에는 불편함이 없는 곳이어서 두보는 이듬 해 봄 성도 교외의 완화계(浣花溪) 언저리에 완화초당(浣花草堂, 물론 후대 사람들이 이름붙인 것)을 짓고 살았다.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던지 이 때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썼고 친구 엄무의 추천으로 절도사 참모로 출사하여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보가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촌’은 세상 풍파 겪을 만큼 겪은 두보가 자신이 늙고 병들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지은 작품, 흔히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한 작품”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천만의 말씀, 인간의 ‘절대고독’이 진하게 묻어난다. 총 8구가 두 구씩 대구를 이루는 수-함-경-미(首頷頸尾) 4개연의 점층과 고조가 백미다. 청강(淸江)의 흐름은 세월의 흐름, “긴 여름 강촌의 일마다 그윽하다”는 건 흘러간 그 옛날의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의미, 그런 감상의 멍석 위에서 시인은 물질적 욕망 추구로 인해 고독해지는 인간의 삶을 한탄한다. 높일 상(尙) 아래 흙 토(土)가 붙은 집 당(堂)은 생계의 둥지,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친지들의 발길이 끊어진 자신의 집에 절로 찾아오고 가는 것은 ‘집 위의 제비’ 뿐이고 자신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 속의 갈매기’들만 서로 친하고 가깝다는 관찰이 쓸쓸하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 여자가 갱년기 지나고 나면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겁이 없어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늙은 아내는 세상사를 장기판 위의 놀음쯤으로 여기고, 기운이 팔팔하여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아들은 ‘곧은 바늘을 두드려 굽은 낚시를 만들고’(무엇이든지 억지로 밀어붙이고), 그런 마누라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신은 몸도 병들고 마음도 지친 나머지 약물(藥物)이나 구하고 있다는 고백이 너무나 처절하다.

자신을 미구(微軀) 즉 ‘하찮은 몸’이라고 표현하는 두보의 자학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런 ‘하찮은 몸’이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약(藥)은 풀 초(艹) 아래 즐길 락(樂)이 붙은 것, 웃기는 이야기지만 두보가 구하고자 하는 ‘약물’이라는 것 또한 육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나 소염제가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누그러뜨려주는 술이나 담배 따위의 ‘하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위스키 홀짝이면서 담배 연기 길게 내뿜어본 실업자 아저씨들만큼은 진심(?)으로 공감하리라 믿는다. 생산력을 상실한 나머지 마누라와 자식의 눈에게까지 ‘하찮은 존재’로 비쳐질 때 남자는 스스로 하찮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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