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정말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맨해튼 차이나 타운의 야채 과일 행상들 옆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세상을 알만큼 안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모른 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김소월(金素月) : 1902년-1934년>

록이 봄 바닷물결처럼 넘실댄다. 멀리 새털구름 유유자적 흐르는 창천(蒼天)이 눈부시다. 우중충한 아파트 거실에서 속옷차림으로 환하디 환한 바깥세상을 다시는 바라보지 말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었건만 오늘 유약하게도 그 다짐을 또 깨고 말았다. 대가를 치르리라. 술과 담배 그리고 고단위 마이신 알약 같은 자기최면으로 얼기설기 덮어놓았던 마음의 병이 또 도진다. 기억의 저편에서 자의식(自意識)이란 놈이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꼼지락거린다.

김소월
그래, 김소월이 있었다. 주옥같은 270여 시편을 발표하고 불과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김소월(金素月 : 1902-1934)의 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까까머리 시절에 처음 외웠었지만 소월이 왜 그런 시를 썼는지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던 ‘철없던 시절’을 지나,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삶에 자학의 메스를 들이댔을 때, 고락에 겨운 입술 사이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었다.

문학을 좋아하면서 처음 만난 게 김소월이었으나 그를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를 주업(主業)으로 삼지 않고 돈과 명예를 위해 애썼던 속물(?)이었다. 평론가들은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한(恨)을 민요조에 실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왠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조부의 광산 일을 돕기도 했던 소월은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기 위해 조부와 어머니를 졸라 땅을 처분하여 운영자금을 마련했으나 실패했었고, 이 때문에 인생에 대한 회의와 실의에 젖어 술을 마시는 빈도가 잦아지다가, 끝내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술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소월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생활에 지쳤던 천재 시인이 예수처럼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것”으로 미화하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그런 미화와는 거리가 먼 아편 과다복용이었다. 죽기 전 날 아편으로 몽롱한 상태에서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싫지는 않았다. 진솔하고 수수하면서도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있었다. 김소월이 자신의 속물다움을 숨기기는커녕 시의 소재로 삼으면서, 자신의 정한(情恨)을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로 정화시키고 가다듬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까놓고 말하자면 그는 ‘인생 실패자’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스스로를 너그러이 용서하지도 못하고, 슬픔과 고뇌와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역설적이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라는 배출구를 통해 자신의 슬픔과 고독을 내보냈기에 더 쉽게 잘 읽혀지는지도 모르겠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먹고 살기 어려워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았던 시절에 김소월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김소월은 진짜 세상 모르고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나이에 비해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에 등장하는 두 개의 산 즉 ‘만수산(萬壽山)’과 ‘제석산(帝釋山)도 그 점을 암시한다. ‘만수산’은 개성 인근의 산으로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도 등장하는데, 이런들 어떠 하리 저런 들 어떠 하리 세상 돌아가는 대로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의 본향(本鄕)으로 간주되는 바, 김소월은 만수산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을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제석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의 산을 떠올리지만, 제석산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널려 있는 흔 하디 흔한 산 이름으로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 제석천(帝釋天) 신앙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는 바, ‘제석산 붙는 불(진짜 불이 난 게 아니라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금잔디 따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은 인연과 윤회의 상징으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에 대한 거자필반(去者必返) 기원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반어법으로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듯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또한 반어적으로 “마구잡이로 뻔뻔하게 살면 잘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

‘인생 실패자’ 김소월의 시가 2010년 한여름 그랜드 센트럴 파크웨이와 퀸즈 블러바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다시 읽혀지는 이유를 생각하면 처량하고 한심하지만 그의 시가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늘엔 새털구름 떠가고, 플러싱 윌로우 파크 언저리의 포플라 나무들이 유치원생들처럼 손바닥을 반짝이는데, 파타임 캐셔 일을 나가는 아내가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 끓이는 커피 냄새가 고소하기만 한데, 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하는 구절이 이빨 사이에 낀 갈비 찌꺼기처럼 뇌리 사이에 끼어 빠지지 않나? 이민 온 이후 철저하게 생활인으로 변신한데 대한 부끄러움이 뭉게구름처럼 커진다. 고락에 겨운 입술로 순수를 말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김소월이 고맙다. 김소월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앞으로도 세상 모르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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