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강변에 만발한 벚꽃, 봄은 왔건만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아 술 한잔 같이할 '미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早春寄王漢陽(조춘기왕한양) |
聞道春還未相識(문도춘환미상식) 봄이 돌아왔다고 들었으나 아직은 낯을 맞댄 적이 없어
走傍寒梅訪消息(주방한매방소식) 한매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본다
昨夜東風入武陽(작야동풍입무양) 陽一昌) 어젯밤 동풍이 무양(武陽)에 불어들더니
陌頭楊柳黃金色(맥두양류황금색) 길모퉁이 버드나무 황금색
碧水浩浩雲茫茫(벽수호호운망망) 푸른 물 넓디넓고 구름은 아득
美人不來空斷腸(미인불래공단장) 아름다운 사람 오지 않아 애간장만 태우네
預拂青山一片石(예불청산일편석) 일찌감치 청산의 바위 한 자락 쓸어놓았으니
與君連日醉壺觴(여군련일취호상) 그대와 연일 술독에 빠져 보세나. <이백; 701년-762년>
4월도 어느 덧 하순, 아파트 정원 나뭇가지 끝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싹들이 돋아나오고 플러싱 메도우 파크 호수 언저리에도 초록빛이 감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연한 봄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의 여한미진(餘寒未盡)이라고나 할까, 기상대에서는 한낮의 최고 기온이 56°F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하고 있지만 창문을 열 때마다 밀려들어오는 바람의 한기가 만만치 않다. 매해 그랬듯이 올해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가 보다. 실업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데서 보듯 불황의 먹구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데다가 날이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그런지 퀸즈 블러바드 건너 편 버스 정류장 표지판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여전히 칙칙하고 무거워 보인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이른 봄 왕한양에 부치다(早春寄王漢陽)’라는 시를 쓴 것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봄이 돌아왔다고 들었으나 아직은 낯을 서로 맞댄 적이 없어서/ 한매(寒梅)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본다....무슨 소식을 물어봤나? 봄이 어디쯤 왔느냐고? 천만에. “어젯밤 동풍이 무창에 불어들더니/길모퉁이 버드나무는 황금색/ 푸른 물 넓디넓고 구름은 아득한데...”라고 읊은 데서 보듯 봄이 왔다는 건 이백 자신 또한 잘 알고 있었던 바, 이백이 기다린 건 봄이 아니라 ‘아름다운 그 사람’이었다는 데 주목해야할 듯싶다. 사람이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건 매해 반복되는 계절이 아니라 ‘만나면 즐겁고 반가운 그 사람’이라는 고독한 관찰이 또렷하게 읽혀진다.
그런데 그 ‘미인’이 누군가? 왕한양? 한시 깨나 읽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해석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작품으로만 보면 ‘美人’은 왕한양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지만, 봄이 왔는데도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해 한매에게 달려가 소식을 물어보고 싶다고 너스레를 떤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왕한양은 술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이백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다리는 ‘미인’은 아니었을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천자가 뱃놀이에 불러도 응하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주중(酒中)의 선(仙)’이라고 칭했던 이백이고 보면,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미인’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걸 만고지수(萬古之愁)로 삭히면서 살았기에 술친구 하지장(賀知章)이 ‘적선인(謫仙人)’이라는 별호를 붙여줬던 게 아닌가 싶다.
이백도 없고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실 왕한양도 없는 뉴욕의 봄은 어디까지 왔나? 아파트 앞 정원에 만개한 목련 곁으로 달려가 소식을 물어보고 싶다. 누가 보더라도 봄은 이미 왔지만 ‘미인’이 오지 않았기에 봄이 왔는데도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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