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The Arrow and The Song - 허무 속에서 의미 찾기

롱아일랜드 윗쪽 끝 오리엔트 포인트에서 발견한 썩은 고목 밑둥. 녹음을 짙푸르게 드리우던 한창 시절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The Arrow and The Song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허공중에 화살 하나를 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몰라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너무 빨리 날아갔기에 바라봐도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따라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허공중에 노래 한 숨 내쉬었네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그것도 땅으로 떨어졌지만 어딘지는 몰라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날카롭고 매서운 눈을 가졌다 한들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어찌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잡을 수 있겠나?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한 참나무에서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                그 화살을 찾았네, 그제도 부러지지 않은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그리고 그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한 친구의 가슴 속에서 다시 찾았네

                                                        <1845년,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년–1882년>

월 빠르기가 ‘쏜살’ 같다고 했던가?! 미적분 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듯이 무한대 분모 위에는 그 어느 것을 올려놓아도 제로, 무한 시공 속에서의 유한 인생 또한 제로로 수렴된다. 영웅호걸도 시정잡배도 죽음이라는 무한대 위에 서면 형체도 흔적도 없어지는 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장자(莊子) 잡편(雜篇)에서 자신을 설득하러 온 공자를 되레 꾸짖는 도척(盜跖)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 살, 중간 정도로는 80살, 밑으로 가면 60살, 그나마 병들고 문상하고 걱정거리로 괴로워하는 것을 빼고 나면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 4,5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유한한 육체를 무궁한 천지간에 맡긴다는 것은 준마가 좁은 문틈을 획 달려 지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바, 그 지극히 짧은 시간에 욕심을 채워봤자 얼마나 채울 것이며 인의예지를 떠벌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물으면 대꾸할 말이 적절치 않다. 이른 바 허무(虛無)다. 그래서 장자는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면서 주어진 수명을 다하는 게 지고의 도(道라)고 역설했었지만 그런 도를 깨우쳤다고 한들 무변광대한 우주에서 티끌보다 못한 인생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마저도 결국엔 한강물에 돌 던지기이고 태평양에 오줌 누기이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와 명예는 물론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복감까지도 따지고 보면 뜬 구름 같은 것, 삶은 그런 뜬 구름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 그게 부질없는 짓인 줄을 잘 알면서도 그 짓이라도 해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게 인생의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1807년 2월 27일 당시는 메사추세츠주의 일부였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모자람이나 불편함 없이 성장했으나 성년이 되어서는 사랑하는 누이를 결핵으로 잃고 두 번씩이나 상처(喪妻)하면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던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도 그런 딜레마를 곱씹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1845년에 발표한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 또한 허무 속에서의 의미 찾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1835년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토어러 포터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방황하다가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패니 애플톤과 재혼한 후 참으로 오랜만에 안정된 생활을 맛봤기에 그런 착실한(?)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 전편에 짙게 깔린 허무의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울지 않으련다”고 입술을 깨무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화살’인가? 화살은 어떤 목표를 맞추기 위해 활시위를 힘껏 당겨 날리는 것, 즉 인생의 목표 추구인데, 그걸 '허공중(into the air)'에 쐈다? 롱펠로우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화살’의 ‘빠름’처럼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세월의 화살’로 무엇을 맞춰 떨어뜨렸는지 진정 몰랐었다는 부끄러운 실토가 그 얼마나 뼈아픈지는 부귀와 명예를 좇다가 이빨 다 빠지고 두 눈 침침해지자 마지막 발악을 하듯 아스팔트 우파가 어쩌고저쩌고 이리 저리 몰려다니면서 만만한 정치인들에게 욕지거리나 퍼부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노인네들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또 왜 하필이면 ‘노래’인가? 롱펠로우는 노래는 음계와 장단에 따라 부른 게 아니라 가슴에서 ‘내쉬어진(breathe)'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song’의 뿌리는 고대영어 ‘sang’로서 음률뿐만 아니라 숨이 내쉬어져 만들어내는 소리는 물론 시나 넋두리까지 포함했던 바, 롱펠로우의 노래 또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가 괴로울 때나 자신의 가슴 속에서 내쉬어진 ‘삶의 소리’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화살’은 ‘인생의 목표 추구’, ‘노래’는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알게 모르게 내쉬어진 삶의 숨결, 죽기 전에 그 ‘화살’이 부러지지 않고 어느 굵직한 참나무 등걸에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노래’ 또한 어느 ‘친구(여기서는 항간의 친구가 아니라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순박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롱펠로우 자기만의 확신이 슬프고 안쓰럽기만 하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다고는 말하지 말자. 그럴 자신이 없다고 풀이 죽을 필요도 없다. 롱펠로우 또한 입으로는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고 노래 불렀었지만 그런 자기 확신이 못 미더웠던지 틈만 나면 자기 최면을 걸었으니까. 저 유명한 ‘인생찬가(A Psalm of Life)’의 첫머리를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슬픈 숫자들(사연 또는 곡조)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라고 읊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롱펠로우가 지금 환생한다고 해도 끝까지 침 튀기면서 우길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그래, 인생이 허무하다고 치자.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대? 짧은 인생, 아무리 허무하더라도 허무하지 않다고 우기고 보는 게 허무의 접시에 코 박고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